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7)
아기 요정은 악당-187화(187/200)
시아노르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한 도끼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답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꼴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체샤는 도끼를 휘둘렀다.
“흐어억!”
성왕이 질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도끼는 성왕의 목이 아닌, 그의 팔에 박혔다.
돌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성왕의 의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체샤는 다른 쪽도 마저 도끼질해 주었다.
순식간에 양팔을 잃어버린 성왕을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인간들은 이자를 재판에 회부시켜 모든 죄를 낱낱이 밝히고 처벌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대륙 전체가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증거, 증거가……!”
“성왕의 죄는 바실리안가가 입증하겠습니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린 성왕이 헐레벌떡 외치는데,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벨제온이 뺨에 묻은 핏물을 닦아 내며 나섰다.
벨제온의 양옆으로 카르하와 이슈엘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자리했다.
성인의 모습을 한 삼 형제는 자신들이 바실리안임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바실리안 백작은 뒷세계의 주인으로, 성왕이 이단 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바실리안가의 누명을 밝힐 증거이기도 하니.”
벨제온은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팔렌의 태양 황제께서 바실리안가의 명예를 보증해 주실 것입니다.”
얼빠진 채로 구경만 하던 황제가 뒤늦게 흠칫 놀랐다.
그는 떠밀리듯 더듬더듬 말했다.
“바실리안 백작이 뒷세계의 주인이라는 말은 진실이네…….”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벨제온은 여전히 굳어 있는 신성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매서운 눈길을 받은 그들은 그제야 뒤늦게 성왕을 체포했다.
양팔이 날아간지라 꽤나 우스운 꼴로 밧줄에 묶였다.
성왕이 처리되는 걸 보고 나니 마음이 약간 놓였다.
체샤는 도끼를 꽃으로 흩어 보냈다.
극도로 고조되었던 흥분이 조금 식으면서, 미뤄 두었던 고통이 밀려왔다.
입에서 계속 피 맛이 감돌았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통증도 함께였다.
생명력을 소모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많은 힘을 써 버린 모양이었다.
심상치 않은 상태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꾸만 꺾이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서 있으니, 왕관이 툭툭 타박을 놓았다.
“어리석도다.”
“기어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도다.”
왕관의 탄식에 체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절한다고 조절했는데, 생명력을 너무 퍼부은 모양이었다.
‘나 죽는구나.’
과거 노예 사냥꾼들에게 쫓기며 느꼈던 죽음의 공포가 떠올랐다.
우습게도 그 순간 두려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내가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은 어쩌지?
하일론도, 바실리안도…….
아직 거짓말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용기가 났다.
체샤는 조심스럽게 여태 외면했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벨제온과 쌍둥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시선을 마주해 왔다.
셋 다 할 말 많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체샤를 향한 눈빛에는 어떤 미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안도를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체샤를 응시하는 푸른 눈은 고요했다.
삼 형제와 다르게 일견 무심하게 보일 정도로 평온한 눈이었다.
그러나 체샤는 알고 있었다.
저럴 때야말로 하일론이 가장 무서울 때였다.
절로 마른침이 꼴딱 넘어갔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그는 체샤를, 리체시아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체샤는 키에른을 바라보았다.
“…….”
체샤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바실리안가의 체샤일 것인가.
확신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키에른이 먼저 이름을 불러 주었다.
“체샤.”
무엇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품에 안겨 어리광이라도 부리고픈 마음이 솟구쳤으나 꾹 눌렀다.
지금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키에른을 보는 순간 명확해졌다.
‘평생의 소원 하나 정도는 내가 이뤄 줄 수 있겠구나.’
결심을 내리는 과정은 거침없었고, 또한 기이하리만큼 차분했다.
체샤는 고통으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요.”
앞뒤가 다 잘려 나간 말이었다.
그러나 키에른은 곧장 그 의미를 깨달았다.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이는 붉은 눈을 보며 질문했다.
“준비는…….”
“항상 되어 있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아무것도 되묻지 않는 이에게 체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키에른은 체샤의 머리 위에 씌워진 왕관을, 제게 내민 가느다란 손을 보았다.
어떤 감회에 사로잡힌 듯, 잠시 짧은 숨을 내쉰 그가 느릿하게 체샤를 향해 다가왔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했다.
체샤와 키에른은 손을 맞잡았다.
단단하게 부여잡은 손과 함께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와 동시에 발치에서 그림자가 치솟았다.
그림자가 둘을 삼키기 직전.
차르륵!
하얀 사슬이 체샤와 키에른을 각기 휘감았다.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밝아졌을 때.
체샤와 키에른은 동부 검은 숲의 꽃밭에 와 있었다.
하일론도 함께 말이다.
어두운 숲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쏟아지고 푸른 잎과 싱그러운 꽃이 만발한 곳이었다.
꽃밭 한가운데에 놓인 텅 빈 관 옆에 서서, 하일론이 싸늘하게 물었다.
“지금 뭐 하는 짓거리입니까.”
그는 사슬로 체샤와 키에른을 구속한 채 눈을 번뜩였다.
키에른이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림자를 끌어다 사슬을 깨뜨려 버렸다.
이미 마물에게 내상을 입었던 하일론은 사슬이 파괴된 반작용에 다시금 피를 뱉었다.
역으로 하일론을 그림자로 붙들어 두고서, 키에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손을 하늘로 내뻗었다.
그러자 검은 숲의 어둠이 키에른에게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암흑을 끝도 없이 집어삼키니, 검은 숲이 본래의 푸르름을 되찾아 갔다.
소용돌이치는 어둠 속에서 키에른이 체샤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하며, 관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어둠으로 그려진 마법진에서 거센 바람이 일었다.
마법진을 본 하일론이 드물게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키에른이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했다.
“죽은 아내를 되살릴 겁니다.”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리는 와중에, 키에른은 싱긋 미소했다.
“전직 이단 심문관님 앞에서 할 짓은 아니지만, 이쪽 사정이 급한지라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키에른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그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마법을 시작했다.
빈 관에서 작고 하얀 무언가가 두둥실 떠올랐다.
부부의 결혼반지는 검은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키에른은 그림자로 제 머리카락을 조금 베어 냈다.
그리고 손바닥을 베어 핏방울과 함께 흩뿌렸다.
그의 머리카락과 피는 전부 결혼반지와 마찬가지로 마법진에 흡수되었다.
마법진에서 일어나는 돌풍이 더욱 거세졌다.
검은 숲의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릴 만큼.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제물뿐이었다.
키에른이 체샤를 바라보았다.
체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바실리안 백작 부인은 선대 요정 여왕이었어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제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를 되살리는 데 필요한 제물은 여왕의 왕관이 아닌, 등가 교환.”
점차 커지는 붉은 눈을 보며 마법진으로 향했다.
체샤는 키에른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저를 제물로 바쳐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