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8)
아기 요정은 악당-188화(188/200)
키에른과 체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키에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사이,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키에른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죽어야 한다고?”
체샤는 그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환역을 무리하게 펼쳐서….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면 그냥, 누구 하나라도 사는 편이 나으니까.”
누군가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자꾸만 목소리가 아래로 처졌다.
체샤는 차마 더 이상 키에른과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발치에 그려진 검은 마법진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어른에 가까운 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조그만 아기인 것만 같았다.
미숙한 어린아이라서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못하는.
회초리를 앞둔 심정으로 키에른의 말을 기다렸다.
이내 허탈한 웃음이 들려왔다.
“아, 그러니까.”
키에른은 사나운 목소리로 빈정거리듯 말했다.
“어린아이 행세를 하며 여태껏 나를 기만했으니, 그 죗값을 목숨으로 치르겠다, 이건가?”
체샤가 단 한 번도 그에게서 들어 본 적 없는 어조였다.
숨김없이 분노를 드러낸 키에른이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어째서.”
그의 호흡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주인의 동요를 따라 검은 마법진에서 소용돌이치는 그림자도 일순 힘을 잃고 주춤거렸다.
키에른이 바짝 마른 눈을 하고서 속삭였다.
“내가 뭘 선택할 줄 알고.”
건조한 속삭임 아래에 들끓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가 무얼 선택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마지막으로 제일 쓸모 있게 사용하려는 것뿐이었으니.
하지만 결심과는 다르게 막상 체샤는 선뜻 행동하질 못했다.
검은 마법진에 뛰어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갈고리처럼 체샤를 삶의 미련에 걸어 두는 이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리체시아.”
체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림자에 묶인 하일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체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사방을 헤집는 이곳에서 환한 은발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체샤는 그가 밤하늘의 별과 같다고 생각했다.
홀로 별빛처럼 희고 깨끗한 이는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금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리체시아.”
마치 저를 봐 달라는 듯이.
체샤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리체시아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모른 척 외면했던 나날들이 숨 막히는 무게가 되어 체샤를 짓눌렀다.
체샤는 눈매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자신이 감정적인 부분에서 미숙함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와 제대로 된 관계를 쌓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보육원이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하여 선생님과 친구들하고 원만하게 지내고, 하일론과 바실리안가의 남자들하고도 평범한 계기로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이 상황에서 조금 더 좋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지금보단 나은 상황을 이끌어 냈을지도 몰랐다.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키에른에게는 죽은 아내를 돌려줄 수 있다지만, 하일론에게는 해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몇 번이나 반복할 따름이었다.
하일론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렇게 말없이 저를 응시하기만 했다.
태풍을 맞이하기 직전의 바다처럼 고요한 푸른 눈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눈임을 알고 있으나,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체샤는 결국 하일론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법진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석상처럼 가만히 마법진 위에 서 있던 키에른이 차갑게 경고했다.
“멈춰, 체샤.”
이미 마법은 시작되었고 마지막 제물만이 남았을 뿐이다.
체샤가 마법진에 발을 디디면 키에른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멈추라고 했어.”
키에른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체샤를 노려보며 재차 경고를 날렸다.
체샤는 멋대로 걸음을 옮기며 그를 위로했다.
“괜찮아요.”
일평생의 사랑이지 않은가.
거짓말한 가짜 딸보다는 인생을 바칠 만큼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이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니까.
“정말 괜찮아요.”
검은 마법진에 발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차르륵!
사슬 소리가 들렸다.
눈 깜빡할 사이, 온 사방이 새하얀 사슬로 가득 찼다.
아프도록 몸통을 꽉 조이는 사슬에 체샤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하얀 사슬이 검은 숲을 가득 채우고, 그 너머까지 끝없이 뻗어 나갔다.
사방을 뒤덮은 사슬에 서느런 냉기가 돌았다.
어느새 하일론이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가 거친 손길로 체샤의 턱을 붙들었다.
피하고 싶었던 시선이 기어코 맞부딪쳤다.
모든 부정한 어둠을 정화시킬 듯, 성스러운 외모를 가진 이는 가장 깊고 어두운 감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나부터 죽여.”
푸른 불꽃 같은 눈을 하고서, 하일론은 체샤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의 숨결이 코와 입술을 간질였다.
“네 도끼로 목을 베든, 머리를 쪼개든, 심장을 갈라놓든.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죽여라.”
자신을 첫 번째로 삼으라 요구했던 때처럼,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선언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를 보내 주지 않을 거니까.”
검은 어둠이 바람에 휘몰아치고, 하얀 사슬이 사방을 뒤덮은 광경은 체샤의 환역보다도 기묘했다.
흑과 백이 공존하는 체스판 같은 공간에서 체샤는 소리쳤다.
“나 지금, 곧 죽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건데……!”
“그래서 눈앞에서 죽는 꼴이나 지켜보라고?”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이었으나, 하일론은 단숨에 체샤의 결심을 쳐 냈다.
그의 사슬이 숨 막힐 정도로 체샤를 죄었다.
“윽, 하일론, 아파……!”
아프다는데도 조금도 느슨하게 풀어 주질 않았다.
체샤가 사슬을 떨쳐 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찰나였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
체샤도, 하일론도, 그리고 키에른도.
흠칫 놀라며 눈을 치떴다.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키에른이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완성한 흑마법.
그리고 하일론이 지닌 신성력을 죄다 끌어서 펼쳐 낸 성유물.
극과 극으로 상반된 거대한 두 기운이 한데 응집되면서 폭주하는 것이었다.
“안 돼……!”
키에른의 마지막 염원을 이룰 기회를 이렇게 허무히 날릴 수는 없었다.
제발,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체샤는 눈을 질끈 감고서 힘을 끌어올렸다.
이미 모든 힘을 다해 생명력까지 긁어다 쓴 상태였다.
남은 힘이 있을 리가 없으나, 무작정 요정의 힘을 사용했다.
흑백의 공간에 화려한 색채가 더해졌다.
검은 그림자와 하얀 신성 사슬이 뒤얽힌 위로 꽃이 피어나는 순간.
세 가지 기운이 뒤섞이며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을 꿰뚫듯 쏘아진 기운이 사라진 후.
검은 숲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과 요정 하나는.
“…아.”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서 눈을 떴다.
바실리안 백작 부인이자 요정 여왕인 로즈가 처음 검은 숲에 떨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