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20)
아기 요정은 악당-20화(20/200)
그가 갑자기 왜 루딘 백작저에 등장했는지 알 수 없었다.
체샤는 소파의 천을 꼭 움켜쥐고서 키에른을 지켜보았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혔다.
서재의 창문으로 달빛이 길게 드리워졌다.
키에른은 몸에 잘 맞는 프록코트를 걸치고, 안에는 짙은 녹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말끔한 차림새는 당장 어디 무도회장에 있어도 손색없을 만큼 근사했다.
실제로 무도회장에서 머물다 온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서 희미한 향수 냄새와 더불어 짙은 술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진짜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체샤가 의아해하는 사이, 키에른은 한쪽 가죽 장갑을 이로 가볍게 물어 벗겨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붉은 눈이 은색 회중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째깍, 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번졌다.
무심한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 키에른은 이내 회중시계를 다시 집어넣고, 루딘 백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루딘 백작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방금까지 체샤의 환역에 갇혀 있었던 이였다.
그 때문에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듯했다.
그는 어디 모자란 사람처럼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
키에른이 장갑을 벗은 손으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가 울리자, 루딘 백작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늦게 푸드득 몸을 떨며 정신없이 사방을 살폈다.
루딘 백작은 자신이 요녀의 환역이 아닌 서재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눈앞에 늘씬한 미남자를 보고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바, 바실리안 백작?”
루딘 백작은 비척비척 몸을 바로 했다.
소파에 사지를 늘어뜨리고 추하게 벌벌대던 제 꼴을 깨달은 것이다.
키에른은 루딘 백작이 옷매무새를 다듬고, 손수건을 꺼내 비 오듯 흘린 땀을 닦아내고, 헛기침하여 거만한 얼굴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루딘 백작이 입을 열었다.
“아니…. 이 늦은 밤중에 무슨 일이오? 여기까진 또 어떻게 들어왔고.”
키에른이 피식 웃었다.
매끄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은 그가 루딘 백작과 가만히 시선을 맞추었다.
어둠 속에서 새빨간 눈동자 위로 요사한 광채가 감돌았다.
기묘함을 느낀 루딘 백작이 헛숨을 들이켜는 찰나.
“크억……!”
그는 곧장 개처럼 네발로 엎드렸다.
그러더니 퍽 하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어찌나 힘껏 처박았는지,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고개 박은 루딘 백작은 온몸을 파득파득 경련했다.
그러나 비명 한번 시원하게 내지르지 못했다.
마치 육체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것처럼.
매끈한 구둣발이 루딘 백작의 뒤통수를 지긋하게 짓눌렀다.
매끄러운 목소리가 깃털처럼 떨어졌다.
“루딘 백작.”
머리통을 짓밟은 키에른은 나긋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사죄를 드리러 왔습니다.”
루딘 백작은 순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지.
왜 제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멍청하게 굳어 있던 그가 히익 숨을 들이켰다.
“이, 이 사특한……!”
루딘 백작이 꺽꺽거리면서 소리쳤다.
“흑마법사라니! 대제국의 귀족으로서 수치스럽지도 않소! 신께서 네놈을 징벌할 것이다!”
침을 줄줄 흘려 가며 버럭대니, 키에른은 가볍게 쯧쯧 혀를 찼다.
당연히 키에른은 친절히 대꾸해 줄 이가 아니었다.
그는 머리통에서 발을 치우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부터 루딘 백작은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처박는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뻑, 뻑, 깨지는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루딘 백작이 충분히 반성하다 못해 울며불며 끅끅거릴 즈음에야 멈췄다.
키에른은 나른하게 물었다.
“이제 사죄받으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약간의 교육을 통해, 루딘 백작은 확실하게 깨달은 듯했다.
지금 자신의 목숨이 키에른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루딘 백작이 비굴하게 말했다.
“저기, 뭐, 뭔가 오해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오해했다는 겁니까?”
키에른은 노래하듯 하나씩 늘어놓았다.
“내가 없는 사이 멋대로 고용한 가정교사를 바꾸고 집에 기어들어 온 것?”
“그, 그건.”
“아니면 내 아이에게 고아원 출신이라 모욕하고, 어미 없이 자랐다 멸시한 것?”
“백작, 그것은.”
“그것도 아니면… 바실리안 백작에게 직접 찾아와 사죄하라 말한 것?”
루딘 백작은 숨을 헐떡였다.
피와 침이 섞여서 턱 밑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엉망인 꼴을 보며 키에른이 샐쭉 웃어 보였다.
“이 중에서 무엇이 오해입니까, 백작.”
루딘 백작은 더 이상 건방지게 굴지 못했다.
그는 매우 공손하다 못해 비굴하게 애원했다.
“제, 제발, 목숨만…. 바실리안 백작, 생각해 보십시오. 저를 죽이면 백작도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목숨만 살려 주면, 이, 입도 벙긋하지 않고…….”
소파 뒤에 숨어 있던 체샤는 마음의 소리로 외쳤다.
‘그냥 죽여!’
요녀 리체시아가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곤란했다.
죽음이야말로 완벽한 증거 인멸이니.
오늘 루딘 백작도 환역으로 요리조리 실컷 괴롭혀 주다가 애완식물에게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키에른이 찾아오는 바람에 환역을 부숴 버렸다.
‘물론 키에른이라면 분명히 죽이겠지만.’
잔인한 성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붉은 눈은 체샤마저 등골이 섬찟할 정도였다.
악의와 살의로 선뜩하게 번뜩이는 눈빛은 뒷세계에서 만났던 그 어떤 존재보다도 흉포했다.
다만 우아함으로 한 꺼풀 덮어 놓았을 뿐.
“글쎄요. 살려주기엔 별로 내키질 않아서.”
키에른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리고, 목울대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젖히고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은 서재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였다.
불을 밝히지 않았지만, 샹들리에의 크리스털들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 영롱한 자태를 키에른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흐음.”
쇠사슬로 튼튼하게 고정된 샹들리에는 성인 남자 하나의 무게쯤은 너끈히 견딜 듯했다.
“저걸로 할까. 어떻습니까.”
키에른은 한가로이 의견을 구했다.
루딘 백작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그가 입술을 벙긋거렸으나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손이 붙잡고 뒤흔들 듯, 루딘 백작은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고 싶었겠지만, 그가 원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며 키에른이 낮게 웃었다.
“백작도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얼른 시작할까요. 슬슬 피곤해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반쯤 내리깐 눈으로 웃는 이의 목소리가 나른했다.
“집에 어린 딸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라.”
어린 딸내미는 소파 뒤에서 키에른이 하는 짓을 지켜보는 중이지만 말이다.
체샤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동안, 루딘 백작은 제가 죽을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샹들리에 아래로 책상을 밀어서 거기에 의자를 올렸다.
의자 위에서 샹들리에에 밧줄을 걸고, 고리를 만들어 제 목에 걸 때까지.
키에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아 앉은 채, 백작이 하는 꼴을 구경할 뿐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키에른은 느긋하게 명령했다.
“웃으십시오, 백작.”
명이 떨어지자 루딘 백작의 입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피에로 인형처럼 입술이 찢어져라 웃으며, 백작은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었다.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체샤는 루딘 백작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끄아앙!’
키에른이 흑마법 휘두르며 인성 파괴된 짓을 하는 걸 구경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다.
볼일을 끝낸 그가 귀가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체샤의 방에 올 때면 항상 공통점이 있었다.
언제나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무조건 찾아올 텐데!’
체샤는 재빠르게 서재를 빠져나가선, 다시 바실리안 백작저로 이동했다.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팔딱이는 심장을 꾹 누르며 침대에 누워 있기를 잠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키에른이 등장했다.
“아빠……?”
체샤는 막 깨어난 척 부스스 눈을 떴다.
이불에 문질러져 삐죽 솟은 머리카락을 보고 키에른이 웃었다.
그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 삐죽한 머리카락을 눌러 주었다.
“아빠 때문에 깼어요? 미안해.”
마주친 붉은 눈은 느슨했다.
아까 루딘 백작을 몰아세워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던, 잔인한 악의로 번뜩이던 눈빛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키에른이 낮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체샤를 냉큼 집었다.
검은 그림자가 사방을 휘감았다.
그림자가 사라졌을 땐, 키에른의 침실이었다.
키에른은 체샤를 안은 채 잠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갑자기 피식 웃더니, 체샤의 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쩨샤아아아.”
“…….”
뭔가 조금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았다.
원래는 체샤의 침실에 들어오더라도 거의 기척 없이 들어왔는데.
오늘은 온통 부스럭대며 등장하더니 체샤를 대놓고 깨워 댔다.
‘그리고 쩨샤가 뭐야, 쩨샤가.’
의아해하던 체샤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에게서 나는 독한 술 냄새 때문이었다.
아까 루딘 백작저에서도 술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안겨 있으니 더욱 진하게 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치솟았다.
‘설마…….’
취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