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28)
아기 요정은 악당-28화(28/200)
“하아, 하아…….”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시야가 흐렸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온통 뿌옇기만 했다.
요정으로 갓 발현한 리체시아는 어리고 미숙하기만 했다.
제대로 힘을 다룰 줄 모르는 요정은 실로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자,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었다.
사냥꾼들은 리체시아를 손쉽게 포위했다.
여태까진 운이 좋아 살아났으나, 이번에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정말 죽을 거라고.
끝까지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차올랐다.
왜?
어째서?
왜 하필 나야?
요정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피가 섞인 눈물은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리체시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발에 단단한 돌부리가 차였다.
“아악!”
비틀거리며 내달리던 몸이 결국 무너졌다.
리체시아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미 부상으로 가득한 몸이 땅에 부닥쳤다.
숨이 턱 막히는 격통이 일었다.
고통스러워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려 애쓰며 생각했다.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하지만 손가락을 조금 움찔거린 게 고작이었다.
더 이상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맥이 탁 풀렸다.
단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다.
리체시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진짜 죽는구나.
최후의 순간이 빈민가 뒷골목이라니.
참으로 비루했다.
핏물이 천천히 번져 나가며 지저분한 흙길을 적셨다.
사방에 진동하는 피 냄새 속에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때였다.
“…….”
리체시아는 입술을 벌렸다.
눈앞에 불쑥 나타난 새하얀 손 때문이었다.
희고 깨끗한 손은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예뻤다.
이렇게 예쁜 손을 가진 사람은 누굴까.
죽어 가는 와중에도 그게 궁금해서 힘겹게 시선을 들어올렸다.
흐린 시야에 푸른빛이 보였다.
바다와 하늘을 닮은 눈이었다.
깨끗한 푸른 눈을 보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냥꾼에게 죽는 것보단, 이 사람에게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적어도 시체는 모욕당하지 않을 테니.
마지막 죽을힘을 그러모아 손을 뻗었다.
하얀 손가락 끝을 간신히 붙잡고서 애원했다.
“나 죽여 줘…….”
그 말을 끝으로 리체시아는 의식을 잃었다.
***
내내 기절해 있지만은 않았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중간중간 의식을 차리긴 했다.
또렷하게 정신이 돌아온 건 아니었다.
그냥 눈만 뜬 거라서 온갖 헛소리는 다 지껄인 듯했다.
살려 달라고 빌기도 하고, 엄마를 찾았던 것도 같았다.
토막토막 부스러진 기억의 파편이 부끄러운 행동을 했음을 알려 주었다.
정말로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한밤중이었다.
“…!”
리체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움켜쥔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에 흠칫 놀랐다가, 덜덜 떨면서 안을 들춰 보았다.
그리고 무너지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몸은 멀쩡했다.
적어도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사냥꾼들이 잘라 갔을 줄 알았는데…….
상처 입은 몸에는 붕대도 말끔하게 감겨 있었다.
씁쓰레한 약초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으로 보아 치료도 제대로 해 준 듯했다.
얼떨떨하게 몸 상태를 확인하다가 슬쩍 발목을 확인해 봤다.
다행스럽게도 족쇄나 쇠사슬 같은 건 채워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리체시아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오롯이 선의로만 이뤄진 행위라 믿기에는 여태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쓸 만한 무기가 있나 둘러보다가, 침대 옆에 떨어진 포크를 하나 주웠다.
끼이익.
낡은 나무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리체시아는 곧장 포크를 움켜쥐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노려보았다가, 손에서 살짝 힘이 빠졌다.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은 소년이었다.
아마도 열여섯인 리체시아와 비슷하거나 더 어린 듯했다.
소년은 이목구비가 놀랍도록 단정했다.
귀한 은색의 머리카락과 맑고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는 소년의 분위기를 더욱 정갈하게 만들어 주었다.
겨울 첫눈처럼 아름다운 소년의 손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마른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는 경계심 가득한 리체시아를 보더니 대야와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함부로 다가오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보름이라서.”
그는 창문을 턱짓했다.
“달구경하기 좋은데.”
자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이나 내뱉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어이없이 쳐다보자, 소년은 잠깐 머뭇거리다 말했다.
“배고플 테니까, 먹을 것부터 가져오도록 하지.”
그는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리체시아는 포크를 툭 떨어트렸다.
금방 깨어났는데 무리한 탓인지 손이 잘게 떨렸다.
리체시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바짝 긴장했던지라 아직도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가만히 숨을 고르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
정말로 크고 예쁜 달이 밤하늘 가득 떠올라 있었다.
둥글고 아름다운 보름달이었다.
우아한 은빛을 머금은 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년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달만 바라보았다.
얼마 후 되돌아온 소년은 수프와 빵 한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리체시아의 무릎 위에 놓아주었다.
리체시아는 음식 그릇을 빤히 바라보았다.
묽은 수프와 작은 밀빵.
오랫동안 굶주린 배가 아플 정도로 쓰렸다.
당장이라도 입 안에 털어 넣고 싶었지만 선뜻 먹을 수가 없었다.
약을 탄 음식에 당해서 큰일 날 뻔했던 기억이 손을 꽁꽁 묶어 버렸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소년은 리체시아가 왜 망설이는지 곧장 눈치챘다.
소년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수프 그릇을 집었다.
그리고 리체시아와 눈을 마주한 채로 그릇을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목울대가 선명하게 움직였다.
수프를 한 입 먹은 소년은 빵도 귀퉁이를 뜯어서 제 입에 넣었다.
소년이 완전히 씹어 삼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리체시아는 숟가락을 들었다.
따끈한 온기를 품은 수프를 떠먹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찌 참아 볼 새도 없이 터진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고장 난 것처럼 울어 버렸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오랜만에 마음 놓고 먹는 음식에 대한 감상이 뒤섞인 탓이었다.
“…….”
소년은 말없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체시아는 훌쩍거리면서 수프를 먹고, 빵을 뜯어 먹었다.
빵 부스러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그릇을 비우고 나니 포만감에 졸음이 밀려왔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 듯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소년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는데.”
소년은 쟁반을 가져가며 말했다.
“나는 신성 제국의 견습 기사다. 나쁜 짓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소년의 발언에 리체시아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신성 제국의 견습 기사라니.
평범한 이들이라면 그 신분에 마음을 놓고 신뢰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단의 존재인 리체시아는 가장 피해야 하는 상대 중 하나였다.
천만다행으로 소년은 리체시아가 어긋난 힘을 가진 요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알았다면 구해 주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바로 검부터 휘둘렀을 테니 말이다.
‘어쩐지 생긴 거부터 성기사 같더라니.’
그래도 아직 들키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은 도망쳐 봤자 몇 걸음도 못 가서 잡힐 것이었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리고 너무 졸려…….’
참을 수 없이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이미 반쯤 의식이 날아간 상태였다.
느리게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이 손을 뻗어 왔다.
멍하니 그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리체시아를 눕혀 주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 주는 손길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소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숨 자.”
마치 마법처럼,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절하듯 곧장 잠에 빠져 버렸다.
내일 눈뜨자마자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