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29)
아기 요정은 악당-29화(29/200)
하지만 다음 날, 리체시아는 도망치지 못했다.
열이 펄펄 끓어오른 탓이었다.
완전히 앓아누운 리체시아는 꼼짝없이 소년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소년은 옆에 붙어서 수발을 들어주었다.
땀을 닦아 주고, 쓴맛이 나는 물약과 수프를 먹여 주었다.
하루를 꼬박 앓은 끝에, 겨우 열이 내렸다.
“…….”
다시 밤이었다.
눈을 뜬 리체시아는 얼룩진 나무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소년은 창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환한 달빛을 고스란히 맞으며, 자신의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다소 현실감 없는 광경이었다.
마른 천으로 검을 닦던 소년이 시선을 느끼곤 손을 멈췄다.
그가 리체시아를 쳐다보았다.
푸른 눈이 고요했다.
리체시아는 물끄러미 소년을 마주 보며 물었다.
“왜 구해 줬어?”
“이유가 필요한 일인가?”
신성 기사를 목표하는 소년이니, 이런 일이 당연한 것일까.
리체시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가 없는 친절이 낯설었다.
이렇게 마음을 안심시켜 놓곤, 갑자기 무언가를 요구해 올지도 몰랐다.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리체시아를 바라보며,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일론.”
“…?”
“내 이름. 구해 줬으니 이름 정도는 알아 줬으면 좋겠는데.”
리체시아는 잠시 얼떨떨하게 있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기.”
믿고 안 믿고 여부를 떠나서.
어쨌든 소년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최소한 감사 인사는 하는 게 옳을 터였다.
“고마워.”
무표정하던 하일론의 입술에 언뜻 웃음이 스쳤다.
설핏 희미한 곡선을 그리는 모양에 왜인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리체시아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이름도 알려 줄지 고민하던 차였다.
하일론이 검을 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문을 열지 않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
날카로워진 눈을 확인한 리체시아는 숨을 멈췄다.
사냥꾼들이 제 흔적을 추적해 온 것이 분명했다.
긴장감에 속이 죄여 들었다.
‘이런 몸 상태로는 도망쳐 봤자 금방 잡힐 텐데.’
겨우 살아남았건만 또다시 원점이었다.
두려움으로 가늘게 몸을 떨던 때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리체시아의 생각을 갈라놓았다.
“지금 찾아온 이들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나?”
담담히 대답을 기다리는 소년은 한 손에 검을 늘어뜨린 채였다.
리체시아는 당황한 눈으로 하일론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사냥꾼들하고 싸우겠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노예 사냥꾼들이야.”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잡아다 팔아넘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짐승만도 못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요정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냥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고아원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리체시아는 원장님과 친구들이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다.
아무런 죄 없는 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던 놈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환청처럼 들렸다.
하일론도 똑같은 꼴이 될 터였다.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닌, 어린 견습 기사이니 사냥꾼들로서는 거리낄 것도 없으리라.
“지금이라도 날 버리고 도망치면.”
그러면 괜찮을 거라고 하기 전에, 하일론은 말을 중간에서 잘라냈다.
“내가 왜?”
리체시아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노예 사냥꾼 몰라? 한둘도 아니고 수십 명은 되는 무리야.”
“이제는 아니지.”
“뭐?”
“반 정도는 어제 죽였으니까.”
남은 놈들이 조금 끈질기긴 한데, 라고 덧붙이며 성가시다는 듯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그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노예 사냥꾼들을 죽였다고……?”
어린 소년들, 특히 검술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기사 지망생들이 종종 치기 어린 허세를 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본래 검을 처음 쥐었을 때 가장 우쭐한 법이니.
그러나 하일론은 딱히 그럴 성격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허세 부리는 소년들 특유의 과장됨은 전혀 없었다.
상관에게 보고를 올리듯, 그저 무심하고 단조로울 뿐이었다.
설마 진짜인가?
하지만 믿기지 않았다.
요정의 힘을 가진 리체시아조차도 상대하지 못한 노예 사냥꾼들인데.
고작 견습 기사인 소년이 어떻게…….
리체시아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으니, 소년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마디가 분명하면서도 곧게 뻗은 손가락이 검자루를 어루만졌다.
“…거짓말 아닌데.”
덧붙이는 말에 리체시아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헛웃음에 가깝기는 했으나, 분명한 웃음이었다.
허공 어딘가에 공연히 시선을 두고 있던 하일론이 웃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마치 난생처음 꽃을 구경하는 소년 같은 눈이었다.
리체시아는 천천히 웃음을 그쳤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열렬한 시선을 받아 본 게 한두 번도 아니건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뺨이 홧홧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져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날 도와주는 거야?”
“아니.”
딱 잘라 답한 소년은 리체시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도 얻은 게 있어.”
대체 무엇을 얻었다는 것일까.
최소한 지금까진 잃은 것뿐인 듯한데.
어쩌면 이제는 목숨까지 잃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다녀올게.”
그저 조용히 검을 들고 사라질 뿐이었다.
리체시아는 얼마간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일론이 정말 사냥꾼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잠깐 발목 붙잡아 놓을 실력 정도는 되는 듯하니, 그사이에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신성 기사가 될 사람이니까.’
더 깊이 엮여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요정이라는 사실을 들켜서 살해당하기 전에, 지금 떠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 달아나야 하는데, 리체시아는 하일론이 서 있던 창가에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얼마간 은빛 달을 바라보며 무의미한 시간을 흘렸다.
그러다 겨우 마음을 굳히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리체시아가 떠난 자리에는 꽃향기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
하일론의 도움을 얻어 살아난 이후.
체샤는 요정의 힘을 완벽히 다루게 되었다.
환역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우친 이후부턴 노예 사냥꾼들 따위는 우스운 장난감이었다.
미쳐 버린 요정의 딸답게 기괴한 분위기를 가진 환역은 리체시아의 상징이 되었다.
꽃처럼 아름다우나 잔혹한 요정은 점점 더 널리 알려졌고, 악명을 떨친 끝에 요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멋대로 도끼를 휘두르고 살아가면서도 가끔 궁금했다.
그날 밤 소년은 죽지 않았을지.
정식으로 신성 기사의 서품을 받았을지.
자신이 요정이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을지.
만약 알게 되었다면, 살려 준 일을 후회하고 있을지.
그를 두고 혼자 도망친 제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
지금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지.
궁금증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죽기 전에 한 번만 소년을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다시 만나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걸 알면서도.
‘역시나 좋은 꼴 보지 못했지만.’
그와 재회했던 순간을 떠올리던 체샤는 쓰게 웃었다.
과거의 뾰족한 조각이 아주 약간 따가웠다.
체샤는 얼른 씁쓸한 미소를 지워냈다.
앳된 흔적 따윈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이제는 완전한 남자로 자라난 하일론을 바라보며 태연히 답했다.
“그러게. 보름달이네.”
하일론은 여전히 체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한참 동안 체샤를 바라보았다.
금빛 속눈썹, 작고 도톰한 입술, 보기 좋은 분홍빛이 감도는 뺨까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살핀 끝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사라졌던 거지, 요녀.”
아직 과거의 여운에 잠겨 있던 탓에, 순간 그가 예전의 일을 묻는 줄 알았다.
어린 소년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던 일을.
하지만 체샤는 금방 착각을 바로잡았다.
하일론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묻고 있었다.
‘근데 이런 걸 물어본다고?’
하타까지 납치했길래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자는 줄 알았는데.
그동안 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지를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어이없었다.
비뚠 마음에 애 낳느라 바빴다고 말해 버릴까 잠깐 고민하던 찰나였다.
“…!”
체샤는 아주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금방 재채기를 할 것처럼 간질간질한 느낌은…….
물약을 먹고 몸이 변화할 때 느껴지던 감각이었다.
‘설마, 혹시,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분명한 전조 증상이었다.
체샤는 당황한 눈으로 하타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하타도 체샤의 상태를 알아차리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나 지금…. 아기로 변할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