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3)
아기 요정은 악당-3화(3/200)
신성 제국 힐데르드는 성왕의 가호 아래, 신성 사제와 신성 기사를 거느린 도시국가였다.
대륙 모든 국가의 법에서 벗어난 치외법권을 인정받은 국가이기도 했다.
신의 이름 아래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왕을 성황이 아닌 성왕이라 호칭하는 이유도 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뜻이었다.
힐데르드는 대륙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도맡았다.
신에게서 벗어난 이단을 처단하기 위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가장 특출난 신성 기사만이 선발된다는 ‘이단 심문관’은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할 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대륙의 모든 귀족, 심지어 황족마저도 이단 심문관 앞에서는 언행을 주의했다.
굳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체샤는 이단 심문관들과 원수 사이였다.
미쳐 버린 요정의 딸로서, 어긋난 힘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이단의 상징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얌전히 살아도 모자랄 판에 갖가지 사건 사고를 저지르니, 신성 제국으로선 눈엣가시였다.
체샤는 항상 저를 집요하게 뒤쫓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새파란 눈을 불태우며, 언제나 똑바로 직시해 오던 남자.
그가 얼음처럼 서느런 목소리로 속삭이던 말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날 어디까지 망가뜨릴 생각이지, 요녀?”
새하얀 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어른거렸다.
체샤는 콧등을 찡그리며 손바닥으로 귀를 부비적부비적 문질렀다.
‘슬슬 찾아 댈 때긴 하지.’
고아원에 박혀 있느라 한 달이나 조용했다.
평소 같았으면 사고를 쳐도 두어 개는 저질렀을 시간이니, 리체시아가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하며 찾아 나섰으리라.
‘그렇다고 검문까지 할 일은 아닌데 말이야.’
아무래도 리체시아가 한 달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숨어 버린 탓이 큰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짜식.’
바실리안 백작가만 해결하면 바로 거하게 사고 쳐 줄 생각이었다.
신성 기사와 사제들을 괴롭힐 상상을 하니 벌써 즐거웠다.
체샤가 잠시 음흉하게 웃던 때였다.
“요녀 리체시아라.”
키에른이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근래 잠잠했나.”
뒷세계는 신성 제국과는 다른 의미로 치외법권인 중립 지대였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들이 모인 곳.
무질서한 혼돈으로 이뤄진 뒷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깥세상에도 영향을 주곤 했다.
하여 요녀 리체시아는 대륙에서도 이름이 꽤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실리안 백작의 혼잣말에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되게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하잖아?’
체샤가 묘한 의아함을 곱씹는 사이, 신성 기사가 정중히 요청해 왔다.
“실례지만 신분패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키에른은 상큼하게 웃으며 답했다.
“싫은데?”
“…….”
꼼질대던 체샤도, 검문하던 신성 기사도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느긋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신성 기사들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에른은 체샤를 양손으로 붙들고선 허공에 번쩍 들어 보였다.
“귀엽지? 내 딸이네.”
어이없는 행동에 누군가 바람 빠진 헛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들은 키에른이 반달처럼 사륵 눈웃음 지었다.
“그런데 내가 딸을 입양했다는 사실이 아직은 비밀이었으면 하거든.”
붉은 눈동자 위로 기묘한 빛이 감돌았다.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들 잊어 줬으면 좋겠어.”
뱀이 귓속으로 파고들 듯, 간지러우면서도 깊숙한 속삭임이었다.
검을 뽑아 들려던 신성 기사들의 눈빛이 일제히 흐려졌다.
마치 아까 고아원에서 보았던 원장과 아이들처럼.
체샤는 과거 자신이 이런 장면을 어디서 보았는지,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냈다.
그리고 곧바로 기겁했다.
‘바실리안 백작이 흑마법사라고?!’
기절할 듯이 놀라는 사이, 키에른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사방으로 치솟았다.
완전한 암흑이 체샤를 에워쌌다.
시야를 뒤덮은 그림자가 걷혔을 때.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방금까진 분명 그저 평범한 길이었다.
하지만 이제 체샤의 눈앞에는 새까만 성이 치솟아 있었다.
회백색 석재 외벽에 검은색 지붕을 얹은 성 곳곳에는 깃발이 흩날렸다.
검을 휘감은 은색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뒤엉킨 우로보로스 문양이 그려진 검은색 깃발이었다.
음산한 느낌이 물씬 흘러넘치는 성은 견고했다.
외부인의 침입도, 내부인의 탈출도 허용하지 않을 듯이.
거대한 성문 앞에는 새까만 제복을 입은 기사 수십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키에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싱긋 웃었다.
그가 화사한 웃음과 함께 체샤에게 말했다.
“뱀의 성에 온 걸 환영해, 내 딸.”
***
“헉, 허억……!”
남자는 정신없이 달렸다.
뾰족한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이 팔다리를 엉망으로 할퀴었으나,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귀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슬 소리 때문이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결코 멀어지지 않는 소리는 남자의 정신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미친 듯이 내달리던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커흑!”
새하얀 사슬이 남자의 발목을 잡아챘다.
썩은 나뭇잎과 젖은 흙 위에 엎어진 남자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흰 사슬은 남자를 속박하여 허공에 들어올렸다.
남자는 제 몸을 휘감은 사슬을 잡아 뜯으며 발버둥 쳤다.
침을 줄줄 흘리던 남자가 새된 소리를 냈다.
“힉…….”
파르스름할 정도로 흰 제복을 입은 이가 단정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쪽 어깨에 걸친 푸른 망토가 바람을 따라 휘날렸다.
느릿하게 가까워지는 단죄자를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흑, 허억, 제, 제발 용서를……!”
처절한 애원은 제대로 끝맺어지지 못했다.
남자는 새하얀 빛의 파편으로 부스러졌다.
목표물을 섬멸한 사슬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주인에게로 되돌아갔다.
사방을 가득 채웠던 사슬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흩날리는 빛의 파편 사이에 서 있던 이단 심문관은 흘긋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일론 님!”
뒤늦게 쫓아온 신성 기사들이 하일론을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일론은 냉랭히 말했다.
“정리하도록.”
“예!”
신성 기사들은 남자가 죽은 곳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빛이 시체와 핏물을 제거해 나갔다.
잠시 그들의 정화 작업을 지켜보던 하일론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따라붙은 부관에게 짧게 질문했다.
“요녀는?”
“아직입니다. 검문까지 벌였음에도 들어오는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
하일론의 반듯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제 눈치를 살피는 부관을 신성 기사들 쪽으로 보내고, 하일론은 홀로 걸음을 옮겼다.
스산한 어둠이 감도는 숲을 걸으며 손목의 팔찌를 어루만졌다.
단순한 생김새의 흰색 팔찌는 신성 제국 힐데르드의 성유물, ‘단죄의 사슬’이었다.
오직 하일론만이 다룰 수 있는 사슬의 힘은 단순했다.
추적, 속박, 그리고 섬멸.
단죄의 사슬은 하일론의 손에 들어온 이래, 어떤 목표물도 놓치지 않았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곤.
“…….”
하일론은 입술을 짓씹었다.
목덜미 부근에 뜨끈한 열기가 일어난 탓이었다.
빳빳한 제복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곳.
곧게 뻗은 쇄골 위에는 붉은색 꽃문양이 찍혀 있었다.
정결한 육체에 어울리지 않는, 요사스럽다 못해 야릇하게까지 느껴지는 문양.
요녀 리체시아가 남긴 표식이었다.
그녀의 사냥감이라는 뜻으로 남긴 표식은 이따금 열기를 피워 제 존재감을 알리곤 했다.
신성 제국의 이단 심문관으로서, 그녀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넌 내 사냥감이야, 하일론.”
탐스러운 장미꽃처럼 반짝이던 붉은 눈동자.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요염하게 웃어 보인 리체시아는 낙인을 찍었다.
“그러니 함부로 죽지 마.”
그래서 죽지 못했다.
죽어야 할 순간에도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하일론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또 무슨 짓거리를 저지르려는 속셈인지 모르겠으나, 어떻게든 찾아낼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지하 감옥에 처박아서…….
오롯이 제 눈앞에만 존재하도록 만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