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30)
아기 요정은 악당-30화(30/200)
체샤는 그만 얼굴이 하얘졌다.
파란만장한 요녀 인생.
온갖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으나, 이런 위기는 처음이었다.
하일론 앞에서 아기인 척 웅앵웅앵 했던 기억이 눈앞으로 물결처럼 주르륵 흘러갔다.
정체를 들켜서 무슨 문제가 생기고 어쩌고를 떠나서.
하일론에게 들켜 버리면…….
죽기 직전에도 벌떡 일어나서 으아악 하고 머리를 잡아 뜯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절대 안 돼!’
체샤는 그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불행히도 머리 굴리는 속도보다 몸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으아악 안 돼애애!’
살갗 위로 은은한 분홍빛이 감돌려는 찰나.
체샤는 일단 다짜고짜 힘을 일으켰다.
폭죽 터지듯 꽃과 나비가 튀어나오는 동시에 환역이 펼쳐졌다.
요정의 힘이 일순 단죄의 사슬을 끊어 놓았다.
사슬에서 풀려난 하타가 커다란 꽃 위로 풀썩 떨어졌다.
하타의 안전을 확인하기도 전에, 체샤는 곧바로 하일론부터 꽃 더미 속에 가두었다.
난데없이 와르르 쏟아진 꽃 속에 갇히게 된 하일론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짜 큰일 날 뻔했다…….’
하일론의 시야가 가려진 잠깐 사이, 체샤는 후다닥 아기에서 어른의 몸으로 변했다.
환역 안에서는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눈물 나게 감사했다.
귀와 꼬리가 삐죽 설 정도로 놀랐던 하타도 체샤가 무사히 모습을 바꾼 걸 보고 흐아아 안도하며 꽃 위에 엎어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기로 돌아간 거지?’
제대로 된 물약을 먹은 게 아니었던 걸까.
하타에게 물어봐야 뭐가 어찌 된 일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듯했다.
숨을 고르는 사이, 성검으로 꽃을 자르고 나온 하일론이 제복에 묻은 꽃잎을 털어냈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딱히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아기 모습이 걸릴까 봐 그런 거였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처지인 체샤는 눈동자만 굴렸다.
하일론에게서 단죄의 사슬이 뻗어져 나왔다.
새하얀 사슬은 환역의 모든 것을 구속했다.
찢어진 인형과 망가진 장난감들, 거대한 체스 말까지.
환역 전체를 사슬로 둘러싼 하일론이 무심히 선언했다.
“오늘은 도망칠 수 없을 거다, 요녀.”
꽃 위에서 풀쩍 뛰어내린 하타가 얼른 체샤의 곁으로 달려왔다.
하타는 체샤의 뒤에 숨어서 왕왕 짖었다.
“리체시아 님 괴롭히지 마!”
마치 주인을 등에 업은 소형견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일론은 말없이 눈매를 찌푸렸다.
그는 체샤에게 달라붙은 하타를 지긋하게 응시했다.
그러자 하타는 보란 듯이 더욱 체샤에게 찰싹 붙어선 아르렁거렸다.
“하양 머리 주제에! 하타는 리체시아 님이 제일 아끼는 강아지야!”
체샤는 손을 뻗어 하타를 도닥여 주었다.
그만하라는 뜻을 담은 손짓에 하타가 흥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체샤도 하일론을 비난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처지가 많이 곤란했다.
‘환역이 걷히면 아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단 말이지.’
어떻게든 이 안에서 해결을 봐야 했다.
“저기, 하일론.”
“…….”
“일단 오늘은 내가 사정이 좀 있거든. 우리 좋게 헤어지면 어떨까?”
서걱.
하일론은 대답 대신 그의 발치를 기어오르는 가시덤불을 성검으로 베어냈다.
끼에엑 비명을 지른 가시덤불이 잔뜩 기죽어선 구석으로 사라졌다.
체샤는 가엾은 애완식물에게 눈인사를 보내 주곤, 다시 하일론을 바라보았다.
‘역시 대화로 해결은 불가능하겠고.’
어쩔 수 없이 아껴 놨던 패를 꺼내 들었다.
“루베우스의 창, 돌려줄게.”
체샤의 말에 등 뒤에 선 하타가 움찔 놀랐다.
루베우스의 창은 신성 제국의 성유물.
과거 요녀 리체시아가 훔쳐 간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훔친 게 아니라 주운 거였다.
그냥 저를 죽이러 온 신성 기사단장을 처리했는데, 그가 갖고 있던 창이 마침 성유물이길래 가져갔을 뿐이었다.
성유물이 이단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성왕은 극도로 분노했다.
그는 길길이 날뛰며 당장 성유물을 되찾아 오라고 명령했다.
요녀 리체시아의 현상 수배금이 하늘로 치솟은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정의 환역에 넣어 둔 물건을 인간이 꺼내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체샤는 가끔 성유물을 꺼내선, 신성 기사들을 놀리는 용도로 알차게 활용했다.
아무튼 루베우스의 창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물건이지만…….
이번 사태를 마무리하고 무사히 하타를 빼내기 위해선 얼마든지 내버릴 의향이 있었다.
“이거 들고 뒷세계에서 떠나. 참고로 네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 봐, 부관한테도 미리 말해 놨어.”
하일론과 성유물로 거래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나비에 담아서 보내 놓았다.
“거래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유물 부수겠다는 말도 같이.”
성왕이 루베우스의 창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미 뒷세계에 신성 기사들을 끌고 들어오는 엄청난 대사건을 저질렀는데.
여기서 성유물을 파손하는 짓까지 벌인다면 아무리 하일론이라도 많이 난처해질 터였다.
그가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했는데…….
뭔가 하일론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는 무언가를 유심하게 생각하는 듯한 눈을 하고서 체샤를 바라보았다.
체샤는 괜스레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리려다 참았다.
‘평소랑 달라서 그런가?’
원래대로 요녀 리체시아답게 굴었다면.
하일론과 창고 다 부숴 먹고, 환역도 조각조각 깨트려 가며 끝장을 볼 때까지 싸워 댔을 터였다.
대화로 해결을 시도하고, 성유물 바칠 테니 끝내자고 하는 태도는…….
‘완전히 낯설긴 하지.’
역시나 하일론이 짤막하게 평가를 내려 주었다.
“답지 않은 짓을 하는군.”
“음…. 요새 약간 힘들어서.”
아기 노릇 하느라 많이 힘들긴 했다.
순간 하일론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쫓기고 있나.”
“응?”
“그래서 도망치고 숨는 건가.”
뭔가 체샤가 보이지 않는 동안, 혼자서 단단히 오해를 쌓아올린 듯했다.
말문이 막힌 체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무언을 긍정이라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주인의 동요를 따라 사슬이 잘게 진동했다.
잘그락잘그락, 사슬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누가 감히 너를 쫓지.”
하일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 앉았다.
푸른 눈 위로 서슬퍼런 빛이 감돌았다.
“널 잡아 가둘 이는 나뿐이다, 요녀.”
서느런 경고에 체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가 헛수고하며 저를 찾아 헤맬 일이 불쌍해서 충고해주었다.
“당분간 나 찾지마.”
그리고 하일론은 기어코 그 질문을 던져버렸다.
“네 아이와 관련있는 건가?”
“…….”
진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아직도 믿고 있었다.
체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진짜로 집에 돌아가야 했다.
해명을 해주기엔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여기까지 하자, 하일론.”
체샤는 환역의 꽃을 모두 터뜨렸다.
꽃잎이 확 휘날리며 거미줄처럼 사방에 뻗어 있던 사슬이 산산이 끊어졌다.
바스러진 사슬과 꽃잎이 사방에 흩날렸다.
일방적인 통보에 하일론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그가 격한 목소리로 이름을 외쳤다.
“리체시아!”
환역이 부서졌다.
하일론이 손을 내뻗었으나, 환상의 조각들이 그의 눈을 가렸다.
체샤는 그에게 루베우스의 창을 내던졌다.
그리고 하일론이 다시 아기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곧장 하타의 모자 가게로 이동했다.
“흐아앙, 리체시아 니임…….”
모자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하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하타 때문에, 루, 루베우스의 창을…. 끄흑, 하타 나쁜 강아지예요…….”
하타는 커다란 귀를 온통 늘어뜨리고 훌쩍거렸다.
“괜차나. 그거 쓸모두 없어.”
너그럽게 달래 주니, 하타는 칭얼거리며 체샤에게 파고들었다.
체샤는 하타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아기 몸으로 받아 주려니 조금 버거웠다.
한껏 팔을 벌리고 안아 주던 체샤는 결국 콩,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궁.”
체샤가 뒤로 주저앉자 하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구슬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얼른 닦아낸 하타가 눈을 크게 뜨고 체샤를 바라보았다.
“어…….”
그는 체샤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올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왜 아기로 다시 변했어요?”
“나두 몰라.”
“이상한 물약 먹었어요? 어른 되는 물약에 하타가 이름표 달아 놨는데. 아기 요정님을 위한 약이라고…….”
“그거 마셧눈대 이로케 되쏘.”
“어엇…. 왜 그러지?”
하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하타, 물약 똑바로 만들었는데……?”
하타의 말에 체샤도 크게 당황했다.
‘미완성이 아니었어?’
제대로 완성된 물약을 마셨는데, 아기 몸으로 되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