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44)
아기 요정은 악당-44화(44/200)
수백 년 전 신성 제국 힐데르드에서 요정 실험을 한 기록.
아마도 신성 제국에서 기밀로 다뤄진 자료였을 터였다.
키에른이 어떻게 이 자료들을 신성 제국에서 빼돌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발각되면 대륙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하여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검은 숲에 감춰 놓았으리라.
나무에 마법으로 새겨 이중으로 숨기기까지 해서 말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신성 제국 힐데르드가 위선자 같은 행동을 종종 한다지만.
결국 빛과 정의, 질서와 선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들이었다.
이단의 존재인 요정을 처단했으면 처단했지, 붙잡아 실험할 이들은 결코 아니었다.
성유물이었던 ‘요정 여왕의 왕관’을 신성 제국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만약 요정으로 실험할 놈들이었으면 이미 그 왕관도 조각조각 떼어서 실험했을 터였다.
요녀도 죽이라 명하는 대신, 생포해 오라고 명령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단 심문관을 비롯한 신성 기사와 신성 사제들은 언제나 체샤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니 이건 신성 제국 내부에도 알려지지 않은 기밀일 거야.’
체샤의 추측을 강하게 뒷받침해 주는 이가 있었다.
바로 하일론이었다.
그는 결벽적인 면이 강했다.
딱히 절대선을 추구하진 않으나, 굳이 불필요한 악으로 제 손을 더럽히려고도 하지 않는 이였다.
여태껏 그가 손에 묻힌 악은 요녀 리체시아뿐일 정도이니.
신성 제국이 요정을 가지고 잔인하게 실험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볼 이가 아니었다.
하일론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이뤄낼 힘도, 권력도, 직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일론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아마도 수백 년 전의 실험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최소 추기경 혹은 성왕.
그 정도 급의 인물이 비밀리에 실험을 주도하고 있으리라.
이런 상황이라면 체샤가 그동안 요정 실험과 관련한 정보를 찾기가 지독하게 힘들었던 이유도 얼추 설명되었다.
‘심지어 신성 제국은 의심조차 해 본 적 없었으니까.’
문득 체샤는 역겨움을 느꼈다.
요정은 전부 단단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가진 힘이 모두 정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환역 또한 요정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환상이니.
하여 웬만한 일로는 ‘미쳐 버리는’ 일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체샤를 낳아 준 요정은 미쳐 버렸다.
아마 그녀 또한 여기 적힌 실험과 비슷한 짓들을 당했으리라.
신을 믿는다는 자들에 의해.
풀잎 하나, 꽃 한 송이 마음대로 만지지 못하고 딱딱한 공간에 갇혀서.
짐승처럼 피를 뽑히고 온갖 고통스러운 짓을…….
“…….”
체샤는 작은 이를 꽉 맞물었다.
한가로이 검은 숲을 떠돌던 나비들이 주인의 감정에 반응하여 일제히 모여들었다.
흔들리는 꽃밭 위를 나비 떼가 빠르게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듯 날아다니는 광경은 위협적이었다.
“리체시아 님!”
하타가 허둥지둥 꽃밭을 가로질러 왔다.
작은 강아지는 떨리는 눈으로 체샤를 바라보았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체샤는 지금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말을 건넸다.
“나 괜차나.”
“하지만…….”
“정말루. 쪼금 놀랐을 뿌니야.”
혹여나 꽃을 상하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비를 거둬들였다.
“…후우.”
모든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가장 처음 체샤가 바실리안 백작 가문에 뛰어들게 만든, 제국 3대 귀족 가문이 요정을 대상으로 잔인하게 실험했다는 소문.
이건 아마 키에른이 요정 실험과 관련한 정보를 모으면서, 소문이 잘못 퍼져 나간 듯했다.
‘키에른은 오히려 나랑 비슷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요정 실험에 대해 조사하고 다니는 체샤와 비슷한 입장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가 원하는 요정 여왕의 왕관과 관련이 있는 듯하지만 알 수 없었다.
이건 키에른에게 직접 물어서 답을 얻기 전까진, 결코 알아내지 못할 문제였다.
“그러면 이젠 신성 제국을 조사해 봐야 하는 걸까요?”
하타는 고민에 잠긴 체샤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물론 체샤가 가려는 길이 지옥 불구덩이라도 하타는 기꺼이 따라올 터였다.
그러나 그 불길에 체샤가 다칠까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었다.
체샤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앞이 막막해졌다.
소성인 기도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신성 제국에 끌려간다고 난리를 쳤는데.
제 발로 신성 제국에 들어가 조사하게 생긴 것이다.
요녀인 자신이 어떻게 신성 제국 내부에 들어가고, 삼엄한 경비를 피해 자료를 얻어낼 것인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성인 기도회에 참가하기엔…….’
그 전에 키에른한테 요녀라는 사실이 들켜서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체샤는 입을 열었다.
“일단 또라가자.”
복잡한 상황이지만, 한 가지는 명확해졌다.
바실리안 백작가에선 더 이상 얻어낼 게 없다.
정말로 떠나야 할 때였다.
***
그날 밤.
체샤는 하타를 품에 안고 벨제온을 찾아갔다.
물론 아기의 몸으로 직접 걸어서 벨제온의 집무실까지 가기엔 큰 무리가 있었다.
하여 사용인에게 부탁해서 벨제온이 있는 곳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체샤에게 부탁받은 사용인은 또 엉뚱한 소리를 했다.
오늘 하루 종일 손을 씻지 않을 거라는 둥, 체샤 아가씨를 품에 안는 일이 제게 벌어지다니 꿈만 같다는 둥.
‘여기 사용인들은 내가 안아 달라고 할 때마다 이상한 말을 한다니까.’
하지만 목적만 달성하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체샤는 그가 마음대로 떠들게 내버려 두었다.
“체샤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집무실을 노크하고 방문을 알리자, 안에서 잠깐의 침묵 끝에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체샤는 사용인에게 내려 달라고 해서 종종종 달려갔다.
짧은 다리로 바지런하게 뛰어가니 책상에서 서류를 보던 벨제온이 놀라서 일어났다.
“안뇽하새요.”
체샤는 그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할 이야기가 이쏘요.”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탁 펼쳐서 강조해 주었다.
“뚜리서만요.”
“둘이서만?”
벨제온은 당황하는 듯했으나, 체샤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었다.
그는 집무실 안에서 저를 보조해 주던 비서를 내보내고, 근처에 사용인들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했다.
“무슨 일이지.”
벨제온이 냉정하게 물었다.
그가 진짜로 제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을 떼놓으려 그런다는 걸 알기에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이제 떠날 사이니까.
체샤는 그냥 자신의 용건만 말해 주었다.
“쩌 언제 나가야 하나요?”
체샤가 먼저 이런 말을 꺼내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걸까.
벨제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침묵하던 그가 이내 느릿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가 체샤와 눈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틀 뒤 새벽에 나가야 한다.”
연회 전에 나가야 한다고 답하는 벨제온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이미 계획은 다 세워 뒀고, 체샤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새벽에 갑자기 내보낼 생각이었던 듯했다.
하긴, 어린 아기한테 미리 말해 봤자 뭐 하겠는가.
설득도 안 되고, 나가기 싫다고 하면 괜히 시끄러워지기만 할 테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들고 나가도 좋다.”
벨제온은 돈이나 보석 같은 것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체샤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체샤는 그에게 하타를 내보이며 말했다.
“강아지 데리구 갈래요.”
“…그뿐인가?”
“네!”
벨제온이 굳은 얼굴로 강아지와 체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내 벨제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는 더 많은 걸 요구해도 된다.”
그가 체샤를 강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욕심을 부려서 바실리안 백작가에 한 재산 내어 달라고 해도 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