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47)
아기 요정은 악당-47화(47/200)
“지금까지 나한테 일 떠맡겼으니 혼자 할 때도 됐잖아? 내가 아무리 백작위를 물려받을 후계라지만, 본인은 백작이면서 말이지.”
“…….”
너무나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서 도저히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가방 안의 하타가 꼬물꼬물 몸을 움직였다.
하타 또한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속으로 동동거리던 체샤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쩌랑 계속 가치 다니는 고에요?”
“소성인 기도회가 시작될 때까지만.”
벨제온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무조건 붙잡히게 되어 있다. 백작의 눈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
그건 체샤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니 소성인 기도회까지 시간을 끄는 게 목표다. 내가 직접 함께 다니면, 붙잡히는 시간이 좀 더 늦춰지기도 할 테니.”
역시 완전히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상황 판단 및 여러 방향으로 계산을 해 보고 사고를 치는 것이었다.
확실히 누구를 붙이든 벨제온이 직접 나서서 체샤와 동행하는 것만 하진 못할 터였다.
심지어 벨제온이 빠지면, 바실리안 백작가의 업무가 밀리게 된다.
키에른도 쌓이는 업무를 완전히 무시하진 못할 테니, 여러모로 그의 운신 폭이 좁아지는 것이다.
‘끄응…….’
체샤가 세웠던 탈출 및 도주 계획이 와장창 무너지기는 했지만.
벨제온을 떼어낼 명분도 없거니와, 일단 아기인 채로 얼마간 살기는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어쩔 수 없다. 잠깐만 같이 다니자.’
결심을 마친 체샤는 벨제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끄러면 잘 부탁드려요.”
착 하고 내민 손을 벨제온은 곧장 붙잡지 않았다.
체샤가 약간의 민망함을 느낄 즈음이 되어서야 맞잡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체샤를 안아 들곤 삯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을 조용히 닫고, 마부석과 연결된 낡은 나무창을 탕탕 두드렸다.
숙면 중이던 마부는 그제야 겨우 눈을 뜨곤 말고삐를 쥐었다.
늙은 마부가 끌어서 그런지 삯마차의 속도는 느릿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빨리 도망쳐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한 속도였다.
그래도 벨제온이 어련히 생각이 있어 이런 마차를 구했겠거니 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따각따각.
말발굽이 잘 포장된 석재 도로에 부닥치는 소리가 조용한 새벽길에 퍼져 나갔다.
체샤는 이제 완전히 멀어진 바실리안 백작저를 바라보았다.
그간 나름 정들었던 공간이었다.
칙칙한 뱀의 성과 다르게 예쁘고 세련되게 꾸며진 타운하우스라서 더더욱.
나중에 또 제도에 올 일이 있을 테니, 그때 이렇게 먼발치에서나마 구경을…….
“…?”
새벽 감수성에 젖어 은은한 눈으로 타운하우스를 바라보던 체샤는 약간의 이상함을 느꼈다.
맞은편에 앉은 벨제온이 로브 안쪽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 탓이었다.
약간, 뭐랄까, 굉장히…….
기폭 장치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마법을 통해 원격으로 폭발물을 터뜨릴 수 있는, 그런 기폭 장치 말이다.
‘아니,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러나 말이 되는 생각이었음을, 벨제온은 곧바로 증명해 주었다.
그는 곧바로 버튼을 틱 하고 눌렀다.
잠깐의 정적 후.
콰콰쾅!
엄청난 폭발음이 고요한 새벽을 찢어발겼다.
체샤의 짧은 추억이 담겼던 타운하우스의 서관이 완전히 무너지고, 순식간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마부석의 마부도 기겁하며 날뛰는 말들을 어르고 달래려 애썼다.
폭발음에 놀란 말들은 경주마 부럽지 않은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느긋하던 마차 여행은 이제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수도 대탈출로 뒤바뀌었다.
단숨에 새벽의 악몽을 만들어낸 당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기폭 장치를 손으로 으스러뜨렸다.
벨제온이 부서진 조각을 마차 밖으로 내버리며 덤덤히 말했다.
“뒷수습 때문에 내일까진 추적이 힘들 거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체샤는 결심했다.
‘벨제온한테 절대 까불지 말아야지…….’
쌍둥이가 왜 벨제온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는지.
완벽히 이해한 순간이었다.
***
“마스터.”
자한이 날렵하게 다가왔다.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키에른은 한쪽으로 검을 늘어뜨린 채였다.
그의 발치에는 시꺼먼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렸다.
키에른이 동부 밖에서 마검을 쓰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대부분 마법으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다른 이를 보내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검을 써야 할 정도로 버거운 날이었다.
“하아…….”
키에른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끝도 없군.”
그는 발밑에서 찰박이는 인간이었던 살덩이를 피해 걸어 나갔다.
뒤따르는 자한의 채찍에서도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다.
아주 정확한 정보를 찔러 넣어서,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신나게 암살자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내부의 최측근이 정보를 팔아 치운 것이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꼭 찾아서 죽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려던 때였다.
검은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이가 허공에서 툭 튀어나왔다.
“마스터. 급보입니다.”
키에른은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뒤이은 말에 헛웃음을 삼켰다.
“저택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자한, 쌍둥이 데려와.”
곧장 명령을 내리고, 자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마법을 사용해 저택으로 이동했다.
야심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가 대낮처럼 훤했다.
바실리안 백작가의 저택이 불길에 휩싸인 탓이었다.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수도 치안대원들이 죄다 동원되어 불을 끄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스윽 훑어서 확인했다.
찾는 이를 발견하지 못한 키에른은 지체 없이 저택 안으로 향했다.
“엇, 어어! 백작님!”
내부로 들어가는 키에른을 만류하는 외침이 들려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열기로 이글거리는 복도를 뛰듯이 걸어가는 키에른의 입술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형 화재가 났음에도 인명 피해가 없다.
정확히 서관이 비는 시간에 맞춰서 불이 난 것이다.
불길이 번지는 사이, 저택 안 사람들은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기막히게 맞아떨어진 상황이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재로 인해 키에른은 완전히 발이 묶였다.
불이 난 탓에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모여들어 흑마법을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화재 뒷수습 때문에 이곳저곳에 불려 다녀야 할 터였다.
기가 막힌 솜씨였다.
오늘 끝없이 들이닥치던 암살자들에게 누가 정보를 흘렸을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벨제온이로군.’
과연 검은 숲을 다스릴 바실리안의 아이다웠다.
“날 너무 화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키에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체샤의 침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방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문이 거칠게 열렸다.
키에른은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체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직 화마가 들이닥치지 않은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주인을 잃어버린 고요한 침실에 키에른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불길이 다다를 때까지.
눈앞에 새빨간 불꽃이 들이닥친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느릿하게 웃음이 배어들었다.
붉은 눈 위로 번뜩 안광이 감돌며, 방 안의 그림자들이 불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이 꿈틀거리며 침실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납게 타오르던 불길은 어둠에 닿자마자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불타는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스산한 한기가 사방을 서느렇게 뒤덮었다.
하, 짧게 헛웃음 친 키에른이 싸늘하게 웃었다.
“내 딸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