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50)
아기 요정은 악당-50화(50/200)
세레아 프론 이브로이엘은 대담한 여걸로 유명했다.
공작가의 상징인 분홍색과 보라색이 섞인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웬만한 남자들보다 키가 큰 그녀는 체격도 단단했다.
목소리도 특이한 저음이어서, 이브로이엘 공작이 마법을 영창할 때면 주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사교계의 영애와 영식들은 무도회에서 이브로이엘 공작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너도나도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곤 했다.
공작 또한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독특한 분위기의 외모를 뽐내기 위해 공작새처럼 꾸미고 각종 무도회와 만찬회에 참가하는 일을 즐겼다.
이브로이엘 공작은 직접 연회를 여는 일에도 부지런했다.
그녀가 손수 공들여 기획하고 주최하는 이브로이엘 공작가의 연회는 팔렌 제국에서 유명했다.
사교계에 관심 있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초대장을 받길 원하는 독특하고 재밌는 연회였다.
심지어 외국 귀족들마저 공작의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 할 정도였다.
그토록 화려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리곤 했다.
겉보기에는 30대처럼 젊어 보이는 이브로이엘 공작, 세레아가…….
본래는 60살을 훌쩍 넘어선 나이라는 것을.
뛰어난 마법 실력 덕분에 신체의 노화가 멈춰 버렸으나, 세레아는 사실 현 황제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황실과 피가 이어져 있고, 강대한 힘까지 갖춘 그녀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딱 하나, 세레아가 치를 떠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놈 하나만큼은 지독해서 이를 박박 갈았다.
“후우…….”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세레아는 긴 숨을 내뱉었다.
와인 잔에 담긴 투명한 술에서 과일 향이 살살 올라왔다.
이국에서 건너왔다는 술을 느리게 한 모금 삼키고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길 반복했다.
반쯤 눈이 감긴 그녀는 한밤의 정취를 만끽하며 즐거워했다.
목욕을 끝내서 나른한 기분, 취향에 딱 들어맞는 맛 좋은 술, 열린 창문 너머로 들리는 고요한 풀벌레 소리, 그리고…….
“공작 각하.”
남자의 목소리.
세레아는 내리깔린 눈을 삐죽 치떴다.
성가시단 듯 눈동자를 굴리다, 창문 앞에 선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그녀는 손에 든 와인 잔을 집어던졌다.
아껴 먹던 이국의 술이 허공에 화려하게 촤아악 흩뿌려졌다.
“이 미친 새끼야악! 돈 다 갚았잖아아악!!”
안타깝게도 남자는 살짝 몸을 옆으로 틀어서 날아드는 와인 잔을 피해 버렸다.
비싼 와인 잔은 창밖으로 허망하게 휙 사라졌다.
추락하는 와인 잔에 잠시 시선을 준 그가 다시 세레아를 돌아보며 설핏 미소 지었다.
“돈 때문에 온 거 아닙니다.”
“그러면!”
질색팔색하는 세레아의 모습에 남자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가운 좀.”
그가 짧게 언급하자 세레아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헐벗은 절세 미녀들이 눈앞에서 떼거지로 살랑거려도 꿈쩍하지 않을 주제에.
심장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한 돌덩이로 만들어진 놈이면서, 괜히 내외하는 시늉을 해 댔다.
“어쭈, 이제 수줍은 흉내도 내기로 했어?”
“그럴 리가요. 기본적인 인간의 예의를 갖추는 겁니다.”
“인간? 인가아안? 네놈 스스로 인간이라는 말을 하다니! 뻔뻔스러운 놈!”
“각하.”
미성의 목소리가 펄펄 날뛰는 세레아를 단호히 잘라냈다.
방금까지 버럭버럭 고함지르던 세레아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쪽 눈매를 찡그리며 대꾸했다.
“…왜.”
“각하와의 담소는 언제나 즐겁지만, 송구하게도 지금은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아하, 너희 집에 불났다더라?”
대강 가운을 여민 세레아는 낄낄 웃으며 서랍장 위의 넓은 접시를 더듬었다.
접시에 소복하게 담긴 세이지 잎과 민트 잎을 집어다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고리대금업자 노릇 하러 온 거 아니면? 설마 불 꺼 달라고 온 건 아닐 테고.”
그깟 타운하우스, 하룻밤에 수십 채를 불태워도 끄떡없을 대부호가 눈앞의 이 남자였다.
고작 집에 불난 일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는데.
세레아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바실리안 백작, 키에른 바실리안.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기에는 참으로 좋은 남자였다.
언제 보아도 악마가 빚어낸 듯 아름답고 위험한 외모였다.
다른 사람들이 대량 생산해 시장에 내다 파는 조잡한 공산품이라면.
키에른은 걸출한 장인의 수공예품이자, 장인이 일생에서 단 한 번 만들어낼 마스터피스였다.
예술을 애호하는 그녀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보기 좋은 꽃에는 가시가 있는 법.
세레아는 그가 독을 품은 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뭔데, 대체.”
뾰족하게 날 선 말이 와인 잔처럼 날아갔다.
달빛을 등진 키에른이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스승님.”
“…….”
오래된 옛 호칭이었다.
굳어진 세레아에게 그가 나직이 청했다.
“도와주세요.”
간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런 거라니.
그것도 제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말로 들이밀면서.
“…교활한 독사 같은 것.”
한탄하듯 욕을 내뱉은 세레아는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키에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도와줄게. 대신 너희 집 셋째 보내.”
바실리안가의 예쁘장한 셋째 도련님을 생각하며 말했다.
“마법에 재능 있다고 했잖아. 보석으로 태어났으면 응당 갈고닦아 빛을 내야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본인이 원하지 않습니다. 배우길 원하면 곧장 각하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으휴…. 이래서 재능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그 귀한 마법 재능을 타고났는데도 가만히 썩히려 들었다.
하루하루 수련에 매진하더라도 아까울 시간에 말이다.
세레아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뭐가 문젠데?”
“막내딸을 잃어버렸습니다.”
“…막내딸?”
아들만 셋이잖아, 라는 말을 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최근 바실리안 백작이 고아원에서 아기를 하나 입양했다는 소식이었다.
사교계에서 은근히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였다.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왜 입양했냐고 묻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태껏 꾹 눌러 참는 중이었다.
이번 일 도와주는 대가로 왜 입양했는지나 물어볼걸.
세레아는 잠시 후회했으나, 겉으로는 점잖이 표정 관리를 하며 앉아 있었다.
“아시다시피 집에 불이 나서. 그 뒤처리 때문에 제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사람을 풀어 찾아볼 생각이긴 하지만…….”
키에른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마법을 써서 도와주신다면 더욱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대강 어찌 돌아가는 판국인지 알 듯했다.
키에른이 흑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제국에 몇 없었다.
이단 심문관의 방문을 받고 싶지 않다면, 외부에 알려선 안 될 기밀이었다.
저택에 난 화재 때문에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모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흑마법을 사용하다간 꼬리가 밟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레아는 불쌍한 제자를 위해 마법을 써 주기로 결심했다.
“본인이나 피가 이어진 자의 신체 일부가 있어야 하는데. 머리카락이라도 좀 챙겨 왔어?”
“…아, 그건 아니고.”
키에른이 손바닥 위를 손톱으로 천천히 그었다.
붉은 피가 솟아났다.
“제 피로 하겠습니다.”
세레아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침실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공병이 휘리릭 키에른의 손 아래로 날아가 떨어지는 핏물을 받아냈다.
“근데 입양아라며?”
“아들도 같이 잃어버린지라.”
“누구.”
“첫째 벨제온입니다.”
“…….”
바실리안가의 장남, 벨제온이라면 세레아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나이는 어리나, 천재적인 머리로 바실리안 백작의 업무마저 대행한다 들었다.
지금 당장 백작위를 물려받아도 손색없을 영특한 아이를 잃어버렸다니.
왠지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네 성질머리 못 이기고 도망간 거 아니고?”
키에른이 말없이 웃었다.
세레아는 윽 하고 진저리 치면서도 핏물이 담긴 병을 제 앞으로 끌고 왔다.
빠르게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복잡한 일에 끼기 싫으니, 저놈 해 달라는 거 빨리 해 주고 내쫓을 생각이었다.
보랏빛 선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신비로운 빛을 일렁거렸다.
피가 담긴 병이 마법진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파삭 깨졌다.
핏물이 회오리치며 완전히 흡수되고, 마법진이 내뿜는 빛이 강해진 순간.
“…!!”
세레아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를 찌르며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졌다.
조각조각 흩어지는 빛의 파편 속에서 세레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너, 벨제온 곁에 지금…. 누가 있는 거야?”
마법의 반작용 때문에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내 마법을 깨트렸어…….”
팔렌 대제국의 공작이자,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칭송받는 대마법사.
그런 세레아의 추적 마법을 단번에 부서뜨렸다.
파괴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마법을 부순 이가 세레아만큼 강한 존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