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55)
아기 요정은 악당-55화(55/200)
하일론의 대답은 간단했다.
“꽃 보러 산책.”
어디 가서 육아 서적이라도 읽은 건가.
하는 짓이 무슨 명령어가 입력된 기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식사 후에는 산책, 이런 식으로 말이다.
‘산책…. 좋긴 한데.’
싱싱한 풀과 나무, 꽃은 언제나 체샤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하일론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뭔가에 관심을 두고 감정을 품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하일론이 딱히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지라 의심스러웠다.
더욱 불안해진 체샤는 반항해 보았다.
“쩌 그런 고 안 조아해요.”
“아까 좌판에서 꽃을 사고 있던데.”
“…….”
체샤는 입을 다물었다.
이단 심문관이라서 그런지 아주 숨 쉬듯이 취조를 해 댔다.
입을 꼭 다문 체샤를 본 하일론이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그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곤 느릿하게 말했다.
“날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네 호위 기사라 하지 않았나.”
그거 임시직이잖아…….
호위 기사 끝나면 이단 심문관으로 되돌아가실 분이었다.
왜 자꾸 호위 기사를 들먹이며 어린아이를 꼬여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영원히 지켜 줄 것처럼 말하기는.’
체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머리로는 절대 아닌 걸 알면서도.
막상 나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마음에 쌓아 놓은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일론이 체샤를 데려간 곳은 신전 안쪽.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중정이었다.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만큼, 신전은 굉장히 부유했다.
하여 중정도 근사하게 꾸며 놓았다.
신전의 정원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데에 초점을 두어서, 화려한 황궁 정원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정원을 살피던 체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래서 키에른이 남의 집 정원을 무단 침입했던 거군.’
저도 가끔은 정원에 무단 침입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체샤는 기분 좋게 꽃향기를 후와압 들이마셨다.
하일론이 체샤의 품에서 강아지를 꺼내 땅에 내려 주었다.
뛰어 놀라는 나름의 호의와 배려였지만, 가짜 강아지인 하타에게는 성질만 돋우는 일이었다.
하타는 아르렁거리며 먕먕 짖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하일론은 이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린 후였다.
효과적인 위협에 실패한 하타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이내 매서운 경계 태세로 눈을 번뜩이며 아장아장 따라왔다.
저러면 본인이 무서워 보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귀여운 하타를 보며 웃는데,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고요한 정원을 채웠다.
“…….”
하일론이 바람에 길게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은실처럼 얽혀 들었다.
백합처럼 성스러운 미인이었다.
그러나 신전의 순결한 풍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는 제 주위의 모든 것에 아무런 감흥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하일론은 늘 매사에 무감했다.
어쩌면 저 고요하고 잔잔한 푸른 호수를 뒤흔들어 놓고 싶어서…….
그래서 하일론을 많이 괴롭혔던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의 몸에 새겨 놓은 꽃이 생각났다.
아마 그때가 하일론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반응을 내보인 순간이었으리라.
‘싫다는 애 억지로 붙들고 새겨 넣긴 했지.’
꿈틀거리는 몸을 가시덤불로 잡아 놓고, 그의 육신에 천천히 꽃문양을 그려 넣었다.
표식이 새겨지는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뒤늦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그날 요녀의 표식이 새겨진 치욕 덕분에 하일론은 죽지 않았다.
분노를 양분으로 삼아서 결국 살아남았다.
‘잘된 거 아닌가?’
혼자서 납득하는데, 시선을 느낀 하일론이 느리게 체샤를 바라보았다.
빛을 가득 받아 맑고 푸른 눈동자에 체샤가 가득 담겼다.
문득 하일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닮았는데….”
그의 시선이 체샤의 얼굴을 따라 덧그렸다.
자조 섞인 혼잣말이 흩어졌다.
“아니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지.”
체샤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에 묻은 하얀 꽃잎을 떼어 주었다.
그때 중정의 회랑을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일론 님!”
외알 안경을 쓴 마른 체격의 사내였다.
그는 하일론의 부관인 다렌으로, 체샤도 오랫동안 보아 온 자였다.
체샤는 그의 외알 안경을 유심히 보았다.
안경 아래에 흉터 자국이 언뜻 보였다.
‘아직도 안 지웠네.’
신성력으로 저런 작은 흉터 정도야 치유받을 수 있을 텐데.
특히 다렌 정도 되는 위치면 얼마든지.
그럼에도 저 남자는 꿋꿋하게 흉터를 달고 다녔다.
신성 기사로서 육체의 흠결을 내보일 수 없으니, 흉터를 가릴 외알 안경만 하나 착용할 뿐이었다.
하일론 앞으로 걸어온 다렌이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바실리안의 도련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합니다.”
벨제온을 언급하는 말에 체샤는 놀라서 쳐다보았다.
혹시나 그사이에 무슨 취조라도 했나 싶어서였다.
다렌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체샤에게 해명했다.
“다른 건 아니고, 아기님의 친부모에 대해 알고 있는지 여쭤보았습니다.”
아기님이라는 오묘한 호칭에 잠시 머리가 아팠다.
다렌이 온순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머를요……?”
“아기님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이라고 추측하는 중이라서요.”
아마 아기님까지 챙길 여력이 없어서 고아원에 숨겨 둔 모양이라고, 다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희가 아기님의 친어머니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데, 절대 딸을 버리고 도망갈 분은 아닙니다. 자기 사람은 정말 끔찍하게 챙기거든요. 그 개 수인 챙기는 거만 봐도…….”
어찌나 확신에 차서 말하는지 약간 민망할 정도였다.
하일론도 그렇고, 왜 이렇게 저를 신뢰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조건 아기님을 찾으러 올 겁니다.”
다렌이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수 있도록 아기님의 친어머니를 도와주는 게 목표이고요.”
체샤는 헛웃음을 삼켰다.
사람이 너무 똑똑하면 이게 문제였다.
갖가지 사건들을 조사하며 이단을 찾아내던 뛰어난 실력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몇 가지 작은 단서만을 가지고 금세 상황을 추리해낸 것이다.
‘그 상황이 애초부터 없다는 게 문제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미 둘 다 단단히 확신하는 상태인 것 같아서, 오해를 풀기엔 쉽지 않을 듯했다.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당분간 요녀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하타의 약도 완성되지 않았고, 아기 체샤가 금방 사라져 버리면 키에른에게 의심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 리체시아로 되돌아와서 몇 번 꽃이랑 가시덤불로 때려 주고, 단죄의 사슬에 좀 묶여주고 하다 보면 알아서 오해가 풀리겠거니 싶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라도 찾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다렌이 체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흥미롭게 말했다.
“궁금해 죽겠습니다. 대체 어떤 남자이기에 요녀가…….”
생각 없이 수다스럽게 떠들던 다렌이 갑자기 말을 뚝 멈췄다.
스으윽 입을 다문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하일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아, 그으…. 생각해 보니 벨제온 도련님하고 덜 끝낸 이야기가 있어서. 마저 하고 오겠습니다.”
다렌은 아주 신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무얼 보았기에 꽁지 빠지게 도망간 것일까.
잽싸게 내빼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체샤는 힐금 하일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언뜻 보기에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했다.
하지만…….
“여러 방면으로 찾는 중이니, 너도 친아버지에 관해 기억나면 말하도록.”
새파란 눈은 이미 처형자의 그것이었다.
얇은 입술 사이로 서느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엇이든 좋으니까.”
체샤는 반사적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존재하지 않는 체샤의 친아버지는 앞으로도 잘 숨어 있는 게 좋을 듯했다.
그래도 일단 하일론 덕분에 신전까지 들어왔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수 있으리라고, 체샤는 기대했다.
하지만 키에른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며칠 뒤, 늦은 밤.
바실리안 백작이 신전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