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60)
아기 요정은 악당-60화(60/200)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에른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얼어붙은 남자의 뺨을 쓸며, 꺼져 가는 목소리로 가냘프게 말했다.
“아무것도…….”
키에른은 꼼짝하지 못했다.
누군가 그에게 속박 마법이라도 걸어 버린 것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진 끝에, 날카로운 웃음이 터졌다.
칼날이 담겼다 해도 믿을 만큼 날 선 웃음이었다.
정신 나간 것처럼 웃던 키에른이 활짝 미소 지었다.
독을 품은 꽃처럼 어여쁜 미소였다.
“그럼 내 앞에서 죽어.”
그는 제 얼굴에 닿은 손을 움켜쥐었다.
살이 내려 바짝 마른 손가락을 그러쥐고 고함질렀다.
“죽어도 내 앞에서 죽으라고!”
피를 토해 내듯 외친 키에른은 몸을 떨었다.
벽난로와 화로의 열기로 땀이 흐를 만큼 뜨거운 방 안에서.
그는 홀로 한겨울 밤, 눈보라 몰아치는 설원에 내쫓긴 것처럼 덜덜 떨면서 말했다.
“제발…….”
잔뜩 작아진 목소리로 힘없는 애원을 뱉었다.
“제발 떠난다는 말만은 하지 마.”
카르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더는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참기 어려운 통증이 일어났다.
엄마가 떠나고 싶어 한다고?
우리를 버리고?
아버지도, 벨제온도, 이슈엘도, 전부 내버리고?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눈앞이 핑핑 돌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뭘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검은 숲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음침한 숲의 어둠 속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물의 울음에 간신히 제정신을 되찾은 카르하는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오싹한 소름이 끼쳐 와서,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참 씨근덕거리며 호흡을 고르던 카르하는 입술을 벌렸다.
“왜…….”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입술 사이에서 툭 떨어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물들의 음산한 소리만이 느릿하게 기어 올 뿐이었다.
카르하는 자신이 보았던 장면을 되짚었다.
어머니의 손에 얼굴을 엉망으로 문지르며 애걸하는 키에른은 한없이 나약해 보였다.
오만한 검은 숲의 지배자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신 나간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가, 빌었다가, 화를 냈다가, 애원하기를 반복하는 키에른을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지켜보는 시선은 담담했다.
키에른이 앞에서 날뛰는데도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유난히 감이 좋은 카르하였다.
논리나 이성으로 이해하기 전에,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눈이었다.
어머니는 마음을 굳혔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설혹 그녀 앞에서 바실리안가의 남자들이 하나씩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어머니는 결심을 바꾸지 않고, 바실리안을 떠나리라.
“우윽.”
눈앞이 핑글 돌았다.
흙바닥에 엎드려 왈칵 구토했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걸 다 게워 내고, 위액만 나올 때까지 죄다 토해 냈다.
격한 구토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다가, 문득 바닥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따 온 꽃이 떨어져 있었다.
질척한 토사물과 썩은 낙엽, 검은 흙에 함께 뒤엉켜 역겨운 꼴로.
꽃은 더 이상 향긋하지도, 싱그럽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 선물을 드릴 수 없겠구나.’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뒤이어서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어쩌면 어머니는 선물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강제로 주어진 애정에 웃는 시늉만 했을지도…….
사실 억측이었다.
선물을 받는 어머니에게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감각이 예민한 자신은 진작 눈치챘을 터였다.
하지만 카르하는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향한 일방적인 애정에 눈이 멀어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니까.
상대는 차가운 무채색의 현실에 살고 있는데, 혼자만 꽃분홍색 단꿈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
망가진 꽃을 멍하니 보던 카르하는 눈을 질끈 감고 뒤로 물러났다.
줄기가 꺾여 쓰러진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 날뛰는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떠야만 했다.
고요한 평화를 찾기에 검은 숲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그르렁,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카르하의 직감이 끊임없이 수많은 신호를 보냈다.
어디서,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접근하는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경고를 마구 쏟아 냈다.
카르하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짙어지는 마물의 냄새에 코가 아릴 정도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도했다.
양손에 검을 들고 어둠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건 고요한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검은 숲은 카르하에게 가장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장소였다.
카르하는 울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히죽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삐죽한 송곳니가 유난하게 빛났다.
작은 몸이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갔다.
***
죽은 백작 부인이 바실리안을 버렸다니.
체샤가 막연하게 상상했던 건 아름다운 비극이었다.
병들고 연약한 백작 부인이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사별하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그러나 방금 카르하의 말도 그렇고, 오늘 키에른이 보인 반응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면…….”
“왜 나를 버렸어?”
체샤의 말에 과거의 무엇을 떠올렸는지.
키에른은 가뜩이나 연약한 정신이 쿠키처럼 바삭 부서졌다.
그 덕분에 수많은 신성 기사와 신성 사제, 그리고 이단 심문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려 신전에서 화려하게 흑마법을 난사할 뻔했다.
“아무튼 뭐, 그렇다고요.”
바실리안 백작저를 터뜨린 벨제온 못지않게, 말로 폭탄을 터뜨린 카르하는 별말 안 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동생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시다.”
시원스럽게 결론까지 제멋대로 내려 버렸다.
얼결에 입 다물고 있던 벨제온이 느릿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이단 심문관이.”
“그건 아버지가 흑마법사인 거만 들켜도 슥삭인데요?”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벨제온의 말문이 막힌 사이, 이슈엘이 카르하의 말을 받아 이었다.
“만약에 바실리안 가문이 멸문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동생만큼은 우리가 책임지고 밖으로 내보내면 되잖아요.”
이슈엘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벨제온을 설득해 나갔다.
“형님,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치려고요. 아까 보셨죠? 이러다 아버지 진짜 미쳐 버릴 거예요. 지금도 정상 아닌데.”
“맞아요. 어차피 아버지가 절대로 못 살린다니까요? 그리고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사람도 아니니까 훨씬 더 어렵잖아요. 무조건 실패예요, 이거. 직감이 온다고요.”
쌍둥이가 둘이서 열심히 와글거렸다.
협공하여 설득하는 말을 듣던 체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
체샤가 한쪽 손을 반짝 들었다.
재잘대던 쌍둥이가 입을 다물었다.
“모가 사람… 아니애요?”
귀에 툭 걸렸던 말을 짚으니, 삼 형제의 얼굴에 일제히 당황한 빛이 스쳤다.
“…아.”
말실수한 카르하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아기는 모르지, 참.”
다른 두 형제가 노려보는 시선에 눈동자만 데굴거리다가, 갑자기 뻔뻔스럽게 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아기도 이제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바실리안 하기로 했잖아.”
절대 하기로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궁금하니까 일단 반박하지 않고, 뭐라고 말하는지 기다려 보았다.
벨제온이 한숨 쉬며 턱 끝을 까닥였다.
그냥 말해 주라는 뜻이었다.
“사실 우리 어머니.”
카르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비밀을 털어놓았다.
“요정이야.”
“…?”
체샤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 직전.
콰쾅!
거대한 굉음이 신전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