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64)
아기 요정은 악당-64화(64/200)
하일론을 아주 잘 파악한 발언이었다.
‘뭐지, 이거.’
키에른과 하일론이 직접 부닥친 적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런데도 어째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깊었다.
확실히 키에른이 저런 짓까지 하지 않았다면.
하일론은 곧장 신성 제국의 이단 심문실로 키에른을 끌고 갔을 터였다.
푸른 눈이 고요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 조종으로 묶인 기사와 사제들을 확인한 하일론이 다시금 키에른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들어는 보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두려움도, 놀라움도,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건조하기만 한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필요하다면 하일론은 이곳의 인질들을 전부 제물로 바치더라도 키에른을 단죄할 것이다.
물론 웬만하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겠지만…….
하일론의 말에 키에른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새빨간 눈이 한동안 하일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아쉽다는 듯 속삭였다.
“아, 역시. 하일론 경한테는 통하지 않는군요.”
“…….”
이단 심문관한테 정신 조작을 걸어 보려고 시도하다니.
키에른은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체샤의 마음을 이브로이엘 공작이 대신 말해 주었다.
“미친놈.”
그녀는 체면 차리는 일을 완전히 포기했다.
적당히 건물 무너진 잔해에 걸터앉아서 상황이나 구경하는 중이었다.
삐딱하게 앉은 이브로이엘 공작이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이단 심문관님, 저 새끼 좀 빨리 잡아가게나.”
키에른이 이단으로 잡혀가면, 그를 도와준 이브로이엘 공작도 당연히 함께 심문을 당해야 한다.
다 알면서도 잡아가라고 하는 걸 보니, 공작도 어지간히 열받은 모양이었다.
넘실거리는 검은 그림자와 사슬이 뒤엉킨 속에서 키에른은 느긋하게 말했다.
“거래를 청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제안하든 하일론에게는 소용이 없으리라 여겼지만.
키에른은 정확하게 하일론을 낚을 만한 미끼를 던졌다.
“요녀 리체시아에 관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
하일론의 눈 위로 언뜻 동요가 스쳤다.
그러나 키에른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아, 물론, 제 목숨값으론 좀 부족하겠죠. 그래서 하나 더 얹어 드릴까 합니다.”
키에른은 샐쭉 웃었다.
“신성 제국이 요정을 가지고 끔찍한 실험을 저질렀다는데.”
그는 하일론에게 독이 든 술잔을 건넸다.
“혹시 관심 있습니까?”
***
체샤의 추측이 옳았다.
하일론은 신성 제국의 요정 실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키에른이 건넨 거래를 받아들였고, 잠깐의 휴전을 약속했다.
정보의 가치에 따라서 키에른이 이단 심문실로 끌려갈지.
아니면 새로운 거래를 하게 될지 결정되리라.
그러나 하일론은 알고 있었다.
바실리안 백작이 제 목숨값은 확실히 챙겨 오리라는 사실을.
저울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정확하게 말이다.
단죄의 사슬에서 풀려난 키에른은 흑마법사와 이단 심문관을 목격한 신성 기사와 사제들의 기억을 통째로 뒤바꾸어 놓았다.
이브로이엘 공작과 하일론이 충돌했고, 그 탓에 신전이 부서졌다는 것까지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신성력을 품은 자들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이 들어갈 터였다.
그럼에도 키에른은 수십 명의 정신과 기억을 능숙하게 조작해 냈다.
과연 괜히 죽은 자를 되살려 보겠다고 나서는 게 아니었다.
조작을 끝마친 키에른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힘을 사용하는 내내 섬뜩한 빛으로 번들거리던 붉은 눈도 고요해졌다.
키에른의 흑마법을 지켜본 하일론은 느릿하게 손목의 팔찌를 매만졌다.
키에른은 그 모습을 보고선 픽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친한 척 생글거리며 하일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만간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제가 신전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태도만 봐선 아주 절친한 친우와 다를 바 없었다.
사근사근하게 굴던 키에른이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더니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신전은 다 부서졌지요.”
다 무너진 폐허를 뒤로하고, 키에른은 싱긋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신전 밖에서 만나야겠습니다.”
신전 파괴에 지대한 몫이 있는 범인 주제에 아주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딸아이도 더는 이곳에서 머무르기 어려워 보이는데, 우선 제가 데려가는 것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체샤까지 호로록 데려가려고 들었다.
체샤는 매우 의심스러운 눈으로 키에른을 흘겨보았다.
‘이거…. 가만 보니까 일부러 신전 부서뜨린 거 아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신전을 부순 건 하일론과 이브로이엘 공작이지만.
키에른이라면 일부러 신전을 파괴하도록 상황을 유도하고도 남았다.
하일론도 체샤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키에른을 보는 그의 눈빛이 천하의 쓰레기를 보듯 했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다시피 한 하일론이 이 정도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다니.
여러모로 키에른은 대단한 남자였다.
“아이는 계속 제 보호 아래에 둘 것입니다.”
하일론은 키에른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 냈다.
“인질로 붙잡는 겁니까?”
“보호라고 말했습니다, 백작.”
조금 괜찮게 흘러가나 싶던 상황이 다시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싸워 댈 분위기였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체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쩌는…….”
키에른과 하일론이 동시에 체샤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반대인 두 남자에게 말했다.
“요기에 남아 있을래요.”
키에른은 모른 척 능글맞게 넘기려 들었다.
“어디, 아빠 품에?”
체샤는 말없이 그를 가만히 보았다.
시선의 맞닿음이 길어졌다.
그의 뺨에 작은 손을 얹었다.
조막만 한 손에 키에른은 꼼짝하지 못했다.
체샤는 그에게 천천히 속삭였다.
“쩨샤 바실리안 하는 거…. 아직 잘 모르개써요.”
“…….”
키에른은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체샤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매끄럽던 붉은 눈 위로 천천히 균열이 일어났다.
‘아잇, 나도 사정이 있다고!’
일단은 바실리안 백작 부인이 요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백작가를 조사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체샤에게도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워낙 상황이 복잡하니 더욱 신중해야 할 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평화롭게 바실리안 가문을 떠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에.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하일론이 체샤를 빼앗아 안았다.
키에른은 저항 없이 체샤를 놓아주었다.
“거래하는 날, 아이를 데려가겠습니다.”
그러니 그때 다시 아이와 이야기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일론으로서는 굉장히 선심 쓴 말을 해 주었다.
키에른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텅 빈 손을 얼마간 내려다보다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기다리겠습니다.”
***
대충 상황이 해결되는 눈치였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키에른을 보며, 세레아는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독사 같은 것…….”
간교하게 굴며 제 마음대로 사람들을 움직이다가, 기어코 딸한테 한 방 먹고 꼼짝 못 하는 꼴이라니.
체샤 바실리안을 대녀로 삼겠다 공표한 만큼, 세레아는 이 가출 소동이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지 몹시 궁금했다.
먼지 묻은 옷을 탁탁 털어 내던 때였다.
그녀는 제 앞에 다가온 작은 소년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각하.”
“…이슈엘?”
바실리안가의 셋째였다.
세레아가 마법을 가르치고 싶어 여태 눈독 들여 왔던, 바실리안가의 숨겨진 원석.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도련님은 무엇이 그리 분한지, 눈시울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그러느냐. 누가 너를 괴롭히기라도 했어? 키에른이냐?”
둥개둥개 달래 주니, 이슈엘이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움켜쥔 손이 바르르 경련했다.
“제가 저를 괴롭게 합니다.”
“…….”
소년의 입에서 나오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놀란 세레아에게 이슈엘이 붉게 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말했다.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