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91)
아기 요정은 악당-91화(91/200)
키에른과 하일론이 다투는 걸 볼 때까지는 무난한 여행이었다.
체샤는 마차 안에서 하타의 앞발과 꼬리, 귀 따위를 만지며 놀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뒤섞이며 단숨에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콱 조여들면서 빠르게 뛰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을 보고 나서야 체샤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슬픔과 분노도 뒤섞인 이것은 체샤의 감정이 아니었다.
감정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밀려오는 감정들의 뿌리를 추적해 나갔다.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뾰족한 느낌과 함께 눈을 반짝 치떴다.
‘요정?’
미쳐 가는 요정이 쏟아 내는 절규가 체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만난 동족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 아무 반응도 못 하던 찰나였다.
“…!”
거대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체샤는 무릎 위의 하타를 밀어내며 발딱 일어났다.
체샤 옆에서 평화로이 독서 중이던 이슈엘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행동이 이상해 보이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앞뒤 재면서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체샤는 마차 창문을 열어젖혔다.
들창인지라 짧은 팔 대신 머리로 창문틀을 받치고서 소리쳤다.
“모두 피해요!”
그러나 체샤의 외침은 풀잎 한 장 차이로 늦어 버렸다.
시야가 뒤바뀌었다.
요정의 환역이 펼쳐진 것이다.
“…!”
방금까지 마차 안에 있었던 체샤의 몸이 허공에서 추락했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며 사방을 살폈다.
다른 요정을 만난 것도.
그리고 다른 요정의 환역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다.
‘뭐야, 이거…….’
체샤는 당황스레 눈을 깜빡였다.
체샤의 환역은 기괴했다.
망가지고 부서진 장난감으로 가득한 체스판, 식인 꽃과 가시덤불 등등.
그럼에도 체샤의 환역은 생동감으로 가득했다.
모든 것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환역에 갇힌 자들을 짓궂게 괴롭히려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붉고 검은 빛이 소용돌이처럼 뒤엉켜 어지럽게 꿈틀거리는 하늘 아래, 검은 땅에 푸석푸석 돋아난 메마른 풀.
거뭇한 강물은 경쾌함이라곤 하나 없이 느릿느릿 흘렀다.
언뜻 보면 강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듯했다.
저 멀리 내다보이는 숲은 가시나무와 가시덤불로만 이루어졌는데, 연신 음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인 것 같기도,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인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환역은 요정의 무의식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정신의 영역.
체샤는 이 음산한 환역의 주인이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요정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체샤!”
땅으로 떨어지던 체샤는 키에른을 발견했다.
먼저 떨어진 그는 체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체샤는 키에른의 품 안으로 쏙 떨어졌다.
키에른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얼마간 체샤를 끌어안고 진정하는 시간을 가진 그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한 번만 더 떨어지면 아빠 심장도 떨어지겠어요, 체샤.”
이번 추락은 체샤의 의지가 아니었다.
약간의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체샤는 힘없이 키에른을 불렀다.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키에른이 놀라서 체샤를 살폈다.
체샤는 키에른의 품에 추우욱 늘어졌다.
불안정한 상태의 요정이 느끼는 온갖 감정들이 전해져 와서 괴로웠다.
환역에 갇히니 더욱 직접적으로 감정이 쏟아졌다.
제 것이 아닌 감정들에 시달리며, 체샤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나가고 시포요…….”
체샤의 상태가 심상찮음을 파악한 키에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따뜻한 손이 등을 부드럽게 덮어 왔다.
그는 체샤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조곤조곤하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빠가 금방 나가게 해 줄게요.”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리 말했다.
하지만 키에른이라면 자신이 말한 대로 이뤄 내리란 걸 알고 있어서, 체샤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체샤를 도닥이며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기괴하고 음울한 풍경을 하나씩 눈에 담은 그가 중얼거렸다.
“대체 뭐 하는 곳인지…….”
“요정의 환역입니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흰색 섬광이 번뜩였다.
검은 가시나무와 가시덤불이 조각조각 흩어지며 하일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에른은 ‘하필이면 저놈이랑 같이 이런 곳에 갇히다니 짜증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일론은 가장 먼저 체샤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다친 곳은 없지만, 시들어 가는 풀때기처럼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곤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체샤가 이상합니다. 환역이고 나발이고, 여기서 빨리 나가야겠습니다.”
“…정상적인 환역은 아닌 듯합니다. 요정이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환역에서 나갈 수 있을 텐데…….”
체샤의 환역을 여러 번 드나들었던 하일론이었다.
그는 이곳이 비정상적인 환역임을 곧바로 깨닫고, 천천히 주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쫓기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뭘 믿고 우리한테?”
키에른이 지극히 타당한 질문을 던졌다.
하일론의 푸른 눈이 흘긋 체샤에게 닿았다.
정답은 체샤였다.
‘동족의 기운을 느꼈을 테니까.’
체샤와 함께 환역에 갇힌 이는 하일론과 키에른.
둘 다 체샤와 오랜 기간 접촉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또한 일행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었다.
요정의 기운이 짙게 묻었으면서도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을 환역에 끌어들인 듯했다.
체샤가 리체시아의 딸이라 생각하는 하일론은 이런 부분들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설명하진 않았다.
간단히 결론만 말해 줄 뿐이었다.
“요정이 우리를 선택했으니, 나가고 싶으면 요구를 들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날 방법입니다.”
요정은 환역에 사람들을 가둬 두고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풀이나 나무 따위로 변해서 숨어 있는 듯했다.
그녀는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바쁠 터였다.
건방진 요정 때문에 심기가 뒤틀린 키에른은 점점 눈빛이 사나워지고 있었다.
“요구…….”
짧게 헛웃음 치며 중얼거린 그의 붉은 눈이 불길한 빛으로 일렁이던 때였다.
쿠궁, 거대한 진동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마른 땅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갈라진 틈에서 가시나무가 치솟았다.
가시나무에 뒤엉킨 남자들이 우웩, 검은 물을 토해 내며 시끄럽게 버둥거렸다.
“아이, 시부럴, 재수가 없으려니!”
“거의 다 잡았는데……!”
걸쭉하게 욕설을 쏟는 그들은 노예 사냥꾼이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과거 체샤를 쫓아다녔던 이들처럼 실력이 굉장히 뛰어난 사냥꾼들.
요정을 비롯한 환상종과 신분이 귀한 사람들만 골라서 노예로 팔아 버리는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요정에 눈이 시뻘겋게 뒤집힌 상태였다.
단검으로 퍽퍽 가시나무를 끊어 내며 탈출하던 그들은 체샤와 키에른, 하일론을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만 환역에 갇힌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노예 사냥꾼들을 눈앞에서 맞닥뜨린 체샤는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괴로워…….’
누군가 머릿속에서 계속 비명을 질러 대는 것 같았다.
요정이 느끼는 증오, 분노, 두려움, 고통, 혐오,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
숨 막히는 감정에 체샤마저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특히 체샤도 노예 사냥꾼들에게는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틀린 게 아니잖아.’
눈앞이 가물거렸다.
심장에서 뜨끈한 피가 퐁퐁 솟아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그녀를 이해해. 얼마나 무섭고 아픈지.’
미쳐 가는 요정의 감정과 과거의 기억이 뒤섞였다.
도망치는 다리에 화살을 맞히고, 고꾸라져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 비웃던 자들.
바닥을 기며 도망치는 제 머리채를 붙잡고 낄낄대던 웃음.
불타는 고아원. 비명 지르는 친구들. 아이들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선생님.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어린 요정.
‘죽이고 싶었어.’
그 순간 제게 힘이 있었다면, 죄다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분홍색 눈동자 위로 언뜻 붉은빛이 스쳤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들끓기 시작했다.
점차 점차 차오르는 그것은 기어코 경계선을 넘었다.
터져 나오는 감정이 체샤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체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으나 듣지 못했다.
발아래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체샤 아래에 둥글게 피어난 꽃은 이내 물감이 터지듯 확 번져 나갔다.
화려한 꽃이 죽음의 땅을 뒤덮으며, 빛으로 만들어진 나비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어둠에 잠겨 있던 땅이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꽃과 나비로 뒤덮였다.
체샤의 눈동자가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기 직전이었다.
낮은 한숨과 함께 커다란 손이 눈 위를 사뿐히 덮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체샤의 눈을 손으로 가린 키에른이 나직이 달랬다.
“쩨샤는 가만히 있어요. 아기는 힘든 일 하는 거 아니야.”
그가 옅은 피 냄새가 맴도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건 아빠가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