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95)
아기 요정은 악당-95화(95/200)
키에른은 눈앞의 요정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신성한 힘을 품은 단죄의 사슬이 방 안에 얼기설기 뻗어 있었다.
사슬에 묶인 요정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축 늘어진 상태였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흰 사슬 위로 숲을 닮은 진녹색 머리카락이 기다랗게 흐트러졌다.
키에른은 사슬에 걸린 요정의 머리카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검은 숲에서 제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도 저렇게 긴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있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바실리안 백작이 검은 숲에서 우연히 부인을 만나 첫눈에 반한 것처럼 떠들어 대곤 했다.
하지만 백작 부부의 첫 만남은 사람들의 낭만적인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을 타고난 키에른이 누군가를 처음부터 마음에 담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처음 그녀를 만난 순간.
어떤 마음의 흔들림이 있었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던 곳에서 그녀를 만났으니.
마물의 번들거리는 눈빛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검은 숲이었다.
키에른은 그곳에 존재할 수 없는 색을 보았다.
태양처럼 찬란한 금빛이었다.
순간 환각을 본다고 생각했다.
검은 숲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환각에 빠지거나 환청을 듣는 경우가 잦으니 말이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는 검은 풀과 나뭇잎, 그리고 가시덤불이 뒤엉킨 위에 제 머리카락을 흩뜨린 채 그림처럼 잠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금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숲에서 환히 빛났다.
검은 숲을 오가는 사람들은 오직 정해진 길로만 통행했다.
숲이 내뿜는 어두운 기운이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지라, 감히 객기를 부리는 자들도 없었다.
모두 얌전하게 정해진 질서를 지켰다.
그 질서를 어기면 죽게 되리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런데 검은 숲의 중심부에서 바실리안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것도 검 하나 제대로 쥐어본 적 없을 듯한, 가느다란 체구의 여자를.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서 잠시 여자를 관찰했다.
어쩌면 새로운 마물종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검은 숲이 이미 수백 년을 이어져 왔으니, 이쯤 해서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난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더욱 수상했다.
마물이 들끓는 검은 숲의 중심부에 인간 여자가 하늘거리는 옷차림새로 쓰러져 있는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키에른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었다.
자박.
발아래에서 마른 나뭇잎이 부스러졌다.
소리가 나자 여자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깊이 잠들었던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키에른은 저도 모르게 숨소리마저 죽이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들어 올리는 눈꺼풀 아래 꽃분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은 여자는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백치와 같은 멍한 얼굴이었다.
키에른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다리를 굽혀 앞에 마주 앉으니, 그제야 여자는 키에른을 쳐다봐 주었다.
텅 빈 눈동자에 키에른이 담겼다.
흐릿하던 초점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완전히 또렷해진 순간,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지?”
새가 지저귀는 듯한 맑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답했다.
“검은 숲입니다.”
“검은 숲……?”
“위험한 곳인데 어찌하여 이런 곳에 들어오셨습니까.”
키에른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녀의 목을 날려 버릴 마법을 준비하며.
여자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머리가 아픈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속삭였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키에른은 옆으로 손을 뻗어 내저었다.
붉은빛이 쏘아 나가 주위에 스멀스멀 모여들던 마물들을 베어 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검은 핏물이 흩뿌려졌다.
“이곳은 인간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붉은 마법이 마물을 학살했다.
그 광경을 여자가 충분히 지켜볼 수 있도록, 키에른은 평소보다 느리고 잔인하게 마법을 다루었다.
사방에 진득한 핏물이 흘러넘칠 즈음에 다시 입술을 열었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키에른은 손가락으로 여자의 목 위를 가볍게 그었다.
가로로 길게 그으며 샐쭉한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나쁜 짓을 하게 될 테니까요.”
의도가 분명한 협박이었다.
이만하면 겁먹고 움츠러들 것이라 예상했는데.
여자는 오히려 와락 인상을 썼다.
그녀가 키에른을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허튼소리 그만하고 솔직히 말해. 네가 나 납치해서 여기다 집어넣은 거 아냐?”
“…….”
난데없이 납치범으로 의심받게 된 키에른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사이 여자는 검은 숲을 둘러보며 윽, 하고 진저리 쳤다.
“난 이런 곳 싫어! 내 발로 이렇게 기분 나쁜 곳에 왔을 리가 없어. 절대로.”
죽은 마물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핏물을 보더니,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 하얘졌다.
“아, 못 참겠어. 여기 너무 기분 나빠…….”
여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키에른도 얼결에 그녀를 따라서 일어나던 때였다.
가느다란 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금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무너지는 그녀를 받아 안았다.
제아무리 키에른이라도 그때는 조금 놀랐다.
덥석 안기는 몸에서 화려한 꽃향기가 물씬 흘러나왔기에.
검은 숲의 피비린내 속에서도 선명한 꽃향기였다.
“다리가 왜 안 움직이지.”
키에른에게 안긴 여자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키에른을 붙들고서 한 쪽씩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똑바로 서질 못하고,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연신 휘청거리기만 했다.
한참 혼자서 끙끙거리던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키에른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나 꽃이랑 풀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
그동안 본의 아니게 지지대 역할을 해 주었던 키에른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키에른의 눈빛에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어쩌지 하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힘이 약해서 못 옮겨 주는 거야……?”
“…못 하는 게 아니라.”
키에른은 말하다 말고 입술을 다물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태도로 보아선 여자는 기억을 잃어버린 듯했다.
여러모로 의심스러우니, 뱀의 성으로 데려가서 심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이곳에서는 명료한 판단이 힘들었다.
검은 숲에 오래 있었던지라 제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느낌이었다.
여기서 나가야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하리라.
키에른은 팔뚝에 매달린 여자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꽃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겠습니다.”
뱀의 성에 꽃이 있었던가.
잡초 정도는 있을지도…….
성의 없는 생각을 하며 여자를 훌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안아 든 손길에 여자가 놀라며 키에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말랑한 몸을 받쳐 안고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어쩌면 바실리안 백작과 뒷세계의 마스터를 노리는 놈들이 여자를 만들어서 제게 보냈을지도 모르겠다고.
미인계를 쓰는 수법은 흔하지만, 검은 숲에 떨어트려 놓은 건 꽤나 신선했다.
어찌되었던 뱀의 성으로 데려가 제대로 심문하면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여자를 성으로 데려갔던 것이 첫 만남이었다.
“…….”
그때 조금 더 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키에른은 그녀를 협박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과거를 후회해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옅게 피어올랐던 조소를 지워냈다.
키에른은 눈앞의 요정을 바라보며 딱, 손가락을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선명한 소리가 단죄의 사슬에 묶인 요정의 의식을 일깨웠다.
“…!”
요정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키에른은 옅게 흔들리는 요정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요정에게 다가갔다.
붉은 눈동자 위로 요사한 빛이 감돌았다.
그녀에게 정신조종을 걸려는 순간이었다.
요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신성력이 버거운 듯, 잠시 숨을 몰아쉰 요정이 힘겨운 목소리로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째서 인간이 여왕님을 데리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