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97)
아기 요정은 악당-97화(97/200)
예상대로 요정에게 걸린 흑마법을 풀어냈으나.
체샤는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흘금 키에른을 살폈다.
역시나 얼굴이 살벌했다.
“…하.”
그가 짧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죽였어야 했는데, 라는 속삭임이 숨겨진 웃음이었다.
키에른은 당장 살인낼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체샤의 시선을 느끼곤 곧장 미소 지었다.
“체샤아.”
이름을 길게 늘여 발음한 그는 꿀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뭐 한 거예요?”
아까 키에른이 그러했듯, 체샤도 모르는 척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파 보여서 치료해 조써요.”
“으응, 그랬구나.”
키에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다시 정신 조종을 걸어 봤자 의미가 없으니, 뭘 어찌할지 고민 중인 것이었다.
물끄러미 요정을 응시하는 시선이 뱀의 눈처럼 섬뜩했다.
눈빛만 보면 이미 요정을 갈가리 찢어 놓고도 남았다.
‘뭘 숨기려고 정신 조종까지 걸어선.’
요정은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점점 의식을 차릴수록, 그녀의 연두색 눈동자에는 절망이 어렸다.
요정은 두려운 눈으로 키에른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긴 체샤를 보며 좌절했다.
“어찌하여 여왕님께서 이런 자에게…….”
체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나더러 여왕님이라고 부른 건가?’
잘못 들은 건가 어리둥절하던 차에, 요정이 키에른을 노려보며 피맺힌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악독한 놈. 네놈이 여왕님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구나.”
요정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체샤에게 애원해 왔다.
“제발 저와 함께 왕국으로 가 주셔요. 모두가 여왕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눈물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왕좌가 비어 있었으니.”
여왕? 왕좌?
체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대륙의 역사에서 요정 여왕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딱 하나뿐이었다.
수백 년 전, 신성 제국의 성왕에게 여왕이 자신의 왕관을 바쳤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죄다 인간들이 멋대로 상상하여 지어낸 동화, 전설, 야사 따위였다.
하여 체샤는 막연히 성왕에게 왕관을 바친 이후, 여왕 또한 다른 요정들과 함께 환역으로 만든 왕국에 숨어 버렸겠거니 했는데.
뜬금없이 자신을 여왕이라 부르다니 당황스러웠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체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깜빡이던 때였다.
“요정이 이상한 헛소리를 하네…….”
많이 아파서 저러는 모양이라고, 키에른이 체샤를 고쳐 안으며 속삭였다.
“듣지 마, 체샤.”
아까부터 눈이 그렁그렁하던 요정이 기어코 눈물을 떨어트렸다.
“저를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니, 구게 아니라…….”
설움 가득한 말에 체샤는 더더욱 어찌할 줄 모르고 손만 파닥거렸다.
그녀는 고요히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부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길.”
키에른이 피식 비웃었다.
성질 더러운 남자가 요정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체샤는 그의 팔뚝을 꼭 붙들었다.
그리고 요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
수백 년 전 인간들에게 요정 여왕이 붙잡혔다.
요정들은 여왕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요정이 다치고, 사라지고, 붙잡히고, 소멸했다.
노력을 포기한 것은 여왕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요정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그 중심은 바로 여왕이었다.
여왕과 요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녀들은 여왕의 죽음을 느끼고 비탄에 젖어 눈물 흘렸다.
슬픔을 추스를 새는 없었다.
새로운 여왕이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요정들은 그녀만이라도 지켜내고 싶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새로운 여왕의 탄생이 분명하게 느껴졌음에도,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갖은 노력에도 결국 여왕을 찾지 못한 요정들은 인간을 피해 숨었다.
환역으로 만든 왕국 속에서, 요정들은 여왕 없이 살아갔다.
여왕의 부재로 인해 점차 힘이 약해지던 찰나.
인간 세상에 이상한 것들이 나타났다.
인간도 요정도 아닌 것이었다.
그것들의 기운은 점차 강해져서, 인간 세상을 떠나 환역에 숨어 있던 요정들에게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세계가 흔들리는 사태는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요정들은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왕국 밖으로 나와서 조사를 시작했다.
그녀 또한 인간 세상에서 조사를 진행하던 요정이었다.
한창 조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의식이 뚝 잘렸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낯선 길바닥 위였다.
백지처럼 아무런 기억조차 없이, 어딘가에 묶여 있다 간신히 도망친 것처럼 손목과 발목에 상처를 단 채.
기억을 죄다 잃어버렸으니 처음엔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했다.
인간계를 헤매다가 나쁜 이들의 표적이 되었고, 몹쓸 짓을 당하기 직전에 요정의 힘을 사용하면서 기억이 일부 되돌아왔다.
한번 되살아난 기억은 빠르게 되돌아왔으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정신은 손상되어 있었다.
미쳐 가는 게 느껴졌지만, 도저히 스스로 회복할 수 없었다.
그저 점차 정신이 붕괴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요정이란 사실이 알려지며 본격적으로 노예 사냥꾼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의식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이성을 잃고, 온전히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떠한 이끌림을 느끼고 체샤를 향해 쫓아온 것이다.
환역을 펼친 건 그녀가 품은 최후의 힘이었다.
“여왕님을 만난 건 운명입니다.”
요정은 환희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모든 어긋나고 비뚤어진 것들이 바로 잡히리란 희망에 그녀의 눈이 빛났다.
“저와 왕국으로 돌아가셔요.”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 뇌가 마비된 기분이었다.
체샤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기뻐하는 그녀에게 침착하게 지적했다.
자신의 엄마가 요정 여왕이라기엔, 선대 여왕은 수백 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왕의 피가 어디선가 이어졌을 겁니다. 왕국으로 돌아가면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있을 테니….”
요정은 가만히 체샤를 바라보며 미소 했다.
“논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느끼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연결되어있다는 직감을.”
어떻게든 체샤를 설득하려 애쓰는 요정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체샤는 요정의 간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아직은 안 대.”
“어찌하여…….”
“해야 할 일이 남아 이쏘.”
단호한 대답에 인간과 요정의 희비가 엇갈렸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체샤는 키에른에게 요정 여왕의 왕관을 건네줘야 했다.
‘그리고 내가 진짜로 여왕이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뿅 하고 왕국 가서 여왕 노릇 하는 것도 웃기잖아.’
체샤는 그런 우아한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체샤의 본성은 요녀 리체시아였기에.
체샤는 좋아서 생글생글 웃느라 바쁜 키에른의 팔뚝을 손으로 도닥여 주었다.
이제 그가 싫어할 말을 할 차례이기 때문이었다.
“하디만 언젠가 꼭 갈 테니까.”
다시금 희비가 엇갈리고, 이번에는 요정이 더없이 기쁜 얼굴을 하였다.
어차피 아기로 고정되어 버린 몸을 해결하기 위해 가야 하는 곳이었다.
‘물론 찾아가더라도, 영원히 요정 왕국에 머무르진 않겠지만.’
굳이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삼켰다.
아까부터 키에른 발밑의 그림자가 심상찮았다.
자꾸 꿈틀거리며 길어지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사납게 날뛸 기세였다.
아직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애꿎은 요정이 소멸하기 전에 빨리 풀어주고 멀리 보내야 할 듯했다.
‘몇 년 전부터 왕국에서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니, 엄마에 대해선 모를 테고.’
구체적인 것들은 이후 요정 왕국을 찾아가서 물으면 될 것이다.
생각을 마친 체샤는 힘을 끌어올렸다.
바닥에서 피어난 덩굴 꽃이 단죄의 사슬을 휘감았다.
신성력이 담긴 성유물은 꽃에 휘감겨 하얀 빛을 내뿜었다.
그러나 주인인 하일론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상, 체샤의 힘을 버텨 낼 리가 없었다.
챙, 맑은 소리와 함께 사슬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흩어지는 사슬 조각 사이로, 체샤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굳게 맹세했다.
“꼭 갈게. 약속이야.”
자유로워진 요정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방 안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요정의 발치에서 조그만 꽃이 피어났다.
체샤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들꽃이 가득한 초원처럼 평화로웠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감싸 쥔 손에 빛이 감돌았다.
요정은 조심스럽게 자신이 만들어 낸 꽃을 내밀었다.
샛노란 해바라기 꽃이었다.
“기다리겠습니다.”
해바라기 한 송이를 품에 안겨 준 그녀는 체샤의 손등에 숭배를 담은 입맞춤을 남겼다.
체샤는 눈을 동글하게 떴다.
손등 위에서 나비 문양이 빛났다.
문양은 짧게 반짝이곤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누군가 손대지 못하도록 하려는 듯이.
“왕국으로 찾아올 수 있는 증표입니다.”
요정은 살짝 키에른을 곁눈질하고서 속삭였다.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요. 부디 이별의 시간은 짧고, 재회의 순간은 영원하길.”
요정의 몸이 작은 꽃과 나비에 휘감겼다.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저 남자를 조심하세요.”
요정은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그는 검은 독사처럼 교활하고 흉악한 자이니…….”
그녀는 모습을 감춰 버렸다.
남은 건 꽃향기뿐이었다.
키에른은 그때껏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더니, 체샤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작은 손등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