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98)
아기 요정은 악당-98화(98/200)
키에른은 한참 동안 체샤의 손등을 보았다.
물론 사라진 문양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엄지로 가볍게 손등 위를 문질렀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다시 안 나타나지…….”
계속 문지르는 손길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어코 체샤의 살갗이 빨개지자, 그제야 정신 차리고 손을 떼어 냈다.
키에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눈꺼풀 아래로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의 빛이 오묘해서 체샤는 긴장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겁이 나긴 했다.
요정을 멋대로 풀어 줬다.
심지어 체샤가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수단까지 마련해 준 요정을.
과거 잠깐 바실리안가에서 도망쳤다가 일어났던 대참사들이 주르륵 떠오르니 눈앞이 암담해졌다.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음을 직감한 체샤는 먼저 나서서 키에른을 달랬다.
“쩌 여왕 안 해요.”
다행히 키에른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가 체샤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남들 앞에선 요정의 힘을 쓰면 안 돼요. 절대로.”
예쁘고 귀한 건 모두가 탐내기 마련이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경고했다.
체샤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아 낸 후에야 키에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의미는 아니었다.
키에른은 체샤의 뺨에 입술을 붙이고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걱정이야. 체샤는 약한 것들한테 항상 마음이 여리니까.”
체샤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음이 여리다니, 무슨 소리야!’
하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흐리게 미소 짓는 키에른이 너무나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체샤…….”
비 오는 날처럼 음울한 목소리가 먹구름같이 드리워졌다.
“아빠도 불쌍하게 생각해 줘요. 알았지?”
***
“…….”
하일론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
단죄의 사슬이 부서지는 감각이 느껴진 탓이었다.
“하일론 님?”
신성 기사가 조심스럽게 하일론을 불렀다.
하일론은 말없이 고개만 까닥였다.
신성 기사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고, 다시금 신성력으로 이단의 흔적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신성 기사들과 함께 요정이 나타났던 곳을 확인하며 정화하던 중이었다.
부관인 다렌이 낯빛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하일론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환역의 상태로 보건대, 이단에 가까워진 요정이었다.
생포했으니 신성 제국으로 끌고 가 심문 과정을 거치는 게 정석적인 절차였다.
그런데 단죄의 사슬로 묶어 놓았던 요정이 풀려난 것이다.
바실리안 백작이 한 짓일 리는 없었다.
요정을 죽였으면 죽였지, 사슬을 끊고 자유로이 놓아주진 않았을 테니까.
조그만 아이가 피워 냈던 꽃의 향연이 떠올랐다.
비틀린 환역 가득히 흩날리던 꽃잎들…….
아이가 펼친 기적을 회상한 하일론은 짧게 내뱉었다.
“즉결 처형하겠다.”
“…예?”
다렌이 ‘기껏 생포한 요정을 죽이겠다니 정신 나가셨습니까?’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차마 말로 하진 못하고 헛웃음만 터뜨린 그가 이를 악물었다.
“성왕께도 이미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분명히 ‘교육’당하실 겁니다…….”
다렌의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그와 달리, 하일론은 대수롭잖게 흘려보냈다.
요정을 풀어 준 아이를 감싸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형해 소멸시켰다고 변명하는 것이 제일 간단한 방법이었다.
아이가 무사할 수 있다면.
교육 같은 대가 정도는 얼마든지 치를 수 있었다.
문제는 요정에게서 얻어 냈어야 할 정보였다.
바실리안 백작에게 심문을 맡겨 두었으니, 필요한 정보는 전부 캐냈을 것이다.
요정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말이다.
다만 얻어낸 정보를 하일론과 투명하게 공유할지가 문제일 뿐.
한 배에 탔으나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일론은 빠르게 정화 작업을 마무리하고, 아이가 잠들어 있을 여관으로 먼저 귀환했다.
그러나 아이를 찾아가진 않았다.
대신 바실리안 백작을 찾아갔다.
백작은 꼴이 가관이었다.
“…어어, 이게 누구야.”
술에 취한 목소리가 느릿느릿 늘어졌다.
“이단 심문관이네.”
고작 등불 하나 켜 놓은 방은 어둑했다.
달빛에 의지해 희미하게 내부를 밝힐 뿐이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빈 술병의 개수를 눈으로 스윽 헤아리던 하일론은 바실리안 백작을 응시했다.
손에 술병을 쥔 채로 소파에 늘어진 키에른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가 옆에 있던 빈 술잔을 가져와 대강 술을 따랐다.
적포도주가 말간 유리잔에 쏟아지듯 엉망으로 담겼다.
잔을 든 손에도 포도주가 튀었다.
키에른은 다른 손으로 술잔을 내밀며, 손등에 묻은 포도주를 핥아 먹었다.
“너도 한잔할래?”
최소한으로 갖추던 공대마저 내버린 이가 건넨 술잔을 받아드는 대신,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받지 않을 줄 알았다는 듯, 키에른은 웃으며 제가 술잔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선명했다.
키에른이 빈 잔을 바닥에 던졌다.
카펫 위에 떨어진 유리잔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굴러갔다.
“진짜 죽이고 싶었는데…. 체샤 앞에서는 나쁜 짓도 못 하겠어…….”
그가 살심을 품은 대상이 요정이라는 것쯤은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난 요정이 싫어.”
키에른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의 가슴팍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체샤는 정말 리체시아의 딸인 건가…. 예전에 내가, 그녀가, 그러니까 리체시아가 내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했었거든? 닮았으니까. 근데 나이가 안 맞잖아.”
술 취한 사람 특유의 횡설수설이 이어졌다.
“그래도 잘해 주긴 했어. 나 아니었으면 진즉 뒷세계에서 죽었을걸. 지금이야 혼자서도 잘 살아남겠지만, 처음엔 안 그랬으니까.”
표정 없는 얼굴로 술주정을 들어 주던 하일론은 이어진 말에 눈매를 좁혔다.
“여왕이래.”
“무슨 뜻인지 설명하십시오.”
“요정들의 여왕이라고, 왕국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그러는데.”
“…아이가 요정 여왕이라는 겁니까.”
“으응. 리체시아는 그런 거 아니었지 않나?”
“제가 알기론 아닙니다.”
“하하, 역시.”
하지만 여왕의 힘이 대를 건너뛰어 이어진, 격세 유전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리체시아가 유난히 강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말이다.
바실리안 백작이 내뱉은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이어 붙이며 추론하던 때였다.
갑자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린 백작이 욕설을 뱉었다.
무뢰한이나 할 법한 상스러운 욕설을 입에 담은 그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번째야. 두 번째라고…….”
하일론은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등불과 달빛이 드리운 그림자의 모양새는 일그러지지 않고 매끈했다.
“신성력도 그런가? 요정한테 나쁜 짓 할 때는 위력이 줄어?”
“그렇습니다.”
수많은 신성 기사와 신성 사제들이 요녀 리체시아를 붙잡지 못한 이유는 그녀에겐 신성력이 온전히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성의 증명이라 일컬어지는 하일론 또한 요녀를 상대할 때는 평소보다 많은 신성력을 사용해야 했다.
우습게도 신성력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순간은 분명했다.
요정에게 무언가 강제하거나, 상해를 입히려는 순간.
신성력은 그 위력을 일부분 잃어버렸다.
마치 요정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마법도 똑같아. 제대로 먹히질 않아.”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숙련된 노예 사냥꾼들은 요정을 잡을 땐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요정의 정신을 적당히 망가뜨려서 힘을 약화시키고, 육체에 물리적인 상처를 입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말은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직접 해 봤거든. 마지막 순간에, 내 부인한테…….”
죽어 가는 부인에게 강제나 위협을 가하는 마법을 쓸 일이 있나?
이단 심문관으로서의 직감이 예리하게 백작의 말을 집어냈다.
평소와 다르게 한없이 나약해진 백작은 해선 안 될 말까지 줄줄 뱉어 내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파고들면 쓸 만한 뭔가를 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바실리안 백작에게 캐묻는 말을 던지기 전.
이어진 그의 질문에 사고가 멈췄다.
“이봐, 이단 심문관.”
백작이 요사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리체시아가 어느 날 갑자기 자네를 버리고, 요정 왕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