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by Fairy is a Villain RAW novel - Chapter (99)
아기 요정은 악당-99화(99/200)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물음이었다.
리체시아는 어긋난 힘을 지닌 요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다른 요정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가정은 해 보지 않았다.
평화주의자인 요정들 사이에서 도끼 휘두르고 식인 꽃을 키우는 요정이라니.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이지 않은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여겨 왔으나, 그녀의 딸이 만약 정말로 요정들의 여왕으로 태어났다면.
어쩌면 리체시아 또한 왕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간을 피해 세워진 왕국이니, 자신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
하일론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키에른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치 하일론이 내놓을 대답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속삭였다.
“우리 비슷하잖아. 그렇지?”
한없이 다르지만, 키에른과 하일론의 본질은 맞닿아 있었다.
서로를 싫어하는 것도 사실 동족 혐오에 가까웠으니.
“나는 체샤를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내 힘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단 말이지.”
키에른이 몸을 조금 일으키더니 손을 뻗어 탁자 위를 더듬었다.
그가 새 술잔을 쥐고서 술을 부었다.
아슬아슬하게 넘치기 직전까지 붓고서 잔을 내밀었다.
“필요할 때 서로 도와주는 걸로 할까.”
하일론은 짧은 조소를 삼켰다.
어째서 제게도 순순히 정보를 나눠 주나 싶었는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니, 하일론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흑마법이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신성력은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설혹 아이에게 미움을 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저 혼자 미움받진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일론은 그가 내민 술잔을 보았다.
깨끗한 유리잔 안에서 찰랑이는 적포도주는 어둠 속에서 언뜻 핏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함께 죄악을 저지르자 유혹하는 뱀의 속삭임에 더없이 어울리는 술이었다.
바실리안 백작의 간교함이 두려운 건, 그 음험함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속내가 훤히 보여서, 저를 지옥에 끌어들이는 중임을 죄다 파악했음에도.
그럼에도 뱀의 초대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결코 뿌리치지 못할 제안을 하며 교묘하게 혓바닥을 휘둘렀으니.
술잔을 응시하던 하일론은 눈매를 미미하게 찌푸리며 말했다.
“신에게 육체를 바친 자는 금주입니다.”
키에른이 소리 내어 웃으며 낄낄거렸다.
“뭐 어때. 금욕은 하지 않을 거면서. 술 정도쯤이야.”
“…….”
저자를 성검으로 베어 버리지 않을 인내심이 제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일론은 그가 내민 술잔을 낚아챘다.
그러나 마시는 대신 신성력으로 잔에 담긴 포도주를 태워 없애 버렸다.
하얗게 일어나는 빛과 함께 술은 사라졌다.
바실리안 백작에게 텅 빈 잔을 돌려주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협조하겠습니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
“좋은 생각이야, 이단 심문관.”
검은 뱀은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앞으로도 더욱 친밀하게 지내자고.”
***
신성 제국 힐데르드는 사실 제국이란 칭호를 붙일 만한 영토를 소유하진 않았다.
기껏해야 소도시 정도의 규모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의 이름 아래 세워진 나라였다.
어떤 이들도 감히 힐데르드를 소국이라 칭하지 못했다.
대륙 곳곳에 세워진 신전은 모두 힐데르드의 영토였으니.
신을 향한 대륙인들의 믿음이 곧 신성 제국의 힘이었다.
실로 성왕은 대륙의 어떤 군주보다도 강대한 권력을 지녔다.
신성 제국은 특이하게도 국경선 전체에 장벽을 둘렀다.
흰 석재로 쌓은 벽 너머로 웅장한 대신전의 일부가 보였으나 그게 전부였다.
입국하지 않는 이상, 외부에서 제국을 들여다볼 방법은 없었다.
신성 제국에 속한 사제와 기사가 아닌 일반인은 일 년에 세 번만 정식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신년, 축성일, 그리고 대기도회였다.
공식적인 개방일이 3회로 정해져 있고, 이에 더해 이따금 비정기적으로 특별 개방이 진행되었다.
이번 소성인 기도회는 전례 없는 특별 개방이라 할 수 있었다.
소성인 기도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의 마차가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전부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었다.
하얀 벽이 조그맣게 보이는 긴 줄의 끝에 바실리안가의 마차도 자리했다.
“으…….”
마차가 멈추는 진동에 키에른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체샤는 흘긋 그를 쳐다보았다.
간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잤는지, 키에른은 출발부터 마차에 틀어박혀 체샤를 끌어안고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술을 잔뜩 퍼마신 게 분명했다.
키에른을 대신해 이슈엘이 말을 타러 나갔다.
그리고 키에른 옆에서 하타도 몸을 말고 히유히유, 조그만 숨소리를 내며 자는 중이었다.
평온한 마차 안의 상황과 달리.
신성 제국에 성큼 가까워진 체샤는 절망했다.
‘으아아!’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각오를 했다지만.
‘정말로 신성 제국에 입국하는구나.’
앞으로 신전에서 기도하고, 신 찬양하고, 설교 듣고 할 생각을 하니 벌써 도망가고 싶었다.
특히 신성 제국에 사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더더욱…….
체샤가 괴롭혀 준 신성 기사와 사제들을 줄 세우면 제국 한 바퀴는 휘감을 터였다.
‘나 요녀 닮았다고 일부러 안 뽑아 주는 건 아니겠지.’
왕관 꼭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과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뒤죽박죽 섞여 어지럽던 때였다.
하일론의 부관, 다렌이 마차 근처로 다가왔다.
그는 요정 사태 이후 먼저 귀국해야 한다며 사라져 버린 하일론을 대신해, 신성 기사들을 이끄는 중이었다.
다렌은 체샤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그리고 똑똑, 마차 창문을 두드렸다.
키에른이 스르륵 눈을 떴다.
그는 크게 하품하더니 체샤의 이마에 쪽 하고 뽀뽀했다.
느릿느릿 손을 뻗어 마차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
잠에 잔뜩 취한 게으른 목소리였다.
“입국 관련하여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키에른은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가, 다렌의 뒤편에 선 벨제온에게 턱짓했다.
와서 아기 보라는 뜻이었다.
벨제온은 군말 없이 키에른에게서 체샤를 받아 안았다.
가까이서 보니 벨제온도 조금 피로한 눈치였다.
그는 체샤를 품에 안고서 낮게 속삭였다.
“잠깐 오라버니하고 있자, 막내야.”
무뚝뚝한 목소리가 제법 다정해서 체샤는 방긋 웃어 주었다.
그래도 마차의 줄이 길어서 다행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놓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혼자서 심호흡하던 때였다.
“우?”
갑자기 바실리안가의 마차가 줄에서 벗어났다.
체샤는 눈이 동그래졌다.
완전히 옆으로 나와 버리더니, 길게 늘어선 마차 행렬을 지나 곧장 전진했다.
‘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건데!’
바르작거리니 벨제온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창가에 몸을 붙여 앉았다.
거침없이 나아간 마차는 입국 심사를 진행하는 신성 기사들 앞에 멈춰 섰다.
다렌과 키에른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들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키에른이 약간 나른한 기운이 감도는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신성 기사들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이런 요사한 걸 신성 제국에 들여도 되나, 뭐 그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짧은 대화 후.
바실리안의 마차가 출입문 안으로 들어섰다.
신분패를 확인하는 등, 최소한의 입국 심사조차 없었다.
어떤 절차도 거치지 않고서 곧장 신성 제국으로 입국하게 된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엄청난 특별 대우였다.
벨제온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단 심문관이라는 건가.”
마침 다렌이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뾱 내민 체샤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곧 편히 쉬실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체샤는 원망하는 마음을 담아 물었다.
“왜 이로케 일찍 드러가요……?”
다렌이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몹시 당연하단 듯이 대꾸했다.
“체샤 아가씨께서는 하일론 님을 호위 기사로 두셨으니까요.”
그는 아직도 출입문 너머로 길게 늘어선 마차들을 흘긋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앞으로 더한 일들만 있을 테니.”
과연 더한 일들만 있으리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조금…….
‘너무 더한 거 같은데.’
체샤는 얼떨떨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신성 제국의 성왕.
시아노르 힐데르드가 직접 바실리안가를 마중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