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ron' Son has Paranormal Abilities RAW novel - Chapter (192)
남작 아들은 초상능력자-192화(192/252)
제192화
제17편 소폴레리온(8)
철걱!
마치 자물쇠가 잠기는 듯한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이드의 눈앞에 있던 비석은 그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낡고 거의 부서져 어떤 글자가 새겨지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것이, 마치 석공이 방금 새긴 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해졌다.
아니, 석공이 아니라 대장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석은 본래의 돌이 아닌, 빛나는 검은 금속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영롱한 검은색이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허, 허어억.”
“허어…….”
“배, 백작님…….”
병사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들에게는 비석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혼절할 만큼 힘든 일이었을 터.
“루, 루이드. 끝났어?”
아르헬의 물음에 루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온몸에서 힘이 모두 빠져나가, 시야가 탁했다.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루이드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백작님! 백작님 만세! 백작님이 우리를 구했다!”
“와아아아!!”
“대체 방금 이 모든 일이 뭐였는지 모르겠어!”
“중요한 건 백작님께서 모두 끝냈다는 거지!”
병사들이 창과 칼을 들어 흔들었다.
“정말이야, 루이드? 다 끝난 거야?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몬스터가 증식하는 일은…….”
아르헬이 루이드 곁으로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
루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졸도했다.
* * *
처얼썩, 처얼썩.
파도 소리와 짭짤한 바람.
눈을 뜨자.
바다.
바다가 보였다.
‘바다라, 환생한 뒤론 한 번도 본 적 없는걸.’
어쩌면 영원히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진흙탕투성이에 이도 제대로 닦을 수 없는 세계에서, 아무런 힘도 없었으니까.
그냥 받아들이고, 그냥 익숙해지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 생각이었다.
어차피 목숨만 부지하면 되겠다고.
기를 써도 바꿀 수 있는 일은 몇 없을 테니까.
이미 전생에서 너무 고생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도 무척 고생하고 있긴 하구나.’
그래도 어쩐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환생이라는 걸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저 멀리 누군가 보였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인간.
순간적으로 레미르 톰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루이드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당신.”
온통 새하얀 사내가 루이드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당신이 문을 닫았군.”
발끝까지 흘러내린 백발 사이로 설핏 웃는 듯한 입술이 보였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었고,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은…….”
루이드가 중얼거렸지만, 사내는 꼼짝하지 않았다. 마치 루이드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남자의 얼굴에는 눈구멍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불에 지진 것처럼 엉망이었다.
‘눈이 없어.’
루이드는 순간적으로 그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뱀이다. 그 일기 속에 쓰인.’
잠시 굳어있는 사이에 남자가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왔다.
그때야 루이드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가 생각했다.
이곳은 어딘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저 남자가 이야기 속의, 100년 전 탈옥했다던 뱀이라면. 왜 눈앞에 있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 많겠지.”
앞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는 남자는 어떻게 루이드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알려줄 수는 없겠어. 바다가 부르고 있으니까.”
100년이나 살아있었던 것일까.
“그대는 앞으로도 신적인 존재와 조우할 것이다. 땅에 처박힌 신을 죽이고, 도망친 신의 조각이 본래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렀으니. 아마도 하늘에 계신 분들에게 예뻐 보이겠지.”
그리고 그의 손이, 새하얗고 핏기가 하나도 없고 비늘이 덕지덕지 붙은 손이 루이드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닐 거야. 하늘에 계신 분들이건, 땅 뒷면에 있는 오래된 것들이건. 그리고 너를 지켜보고 있는 이곳에 있는 어린 것이건.”
쉬이익.
남자의 입 안에 있던 뱀의 혀가 날름거렸다.
루이드는 남자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뿌리쳐지지 않았다.
“어린 것은 하늘에 계신 분들의 미움을 받았어. 하지만 이 땅 위에서는 확실히 그 어린 것의 세상이지.”
온통 새하얀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혀가 쉬익, 쉭. 소리를 냈다.
놀란 루이드였지만, 어쩐지 그가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꿈결 같은 공간 때문일까.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일까.
“문을 닫은 자여. 속지 마라. 하늘에 계신 분들이건, 이 땅의 어린 것이건. 뒷면의 오래된 거들이건.”
남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마치 속에 있는 말을 수없이 갈무리하는 것처럼.
“인간을 위하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무슨…….”
루이드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남자는 말이 없이 잠깐 멈추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역시 들리지 않는 건가.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의식어도 사용할 수 없어. 스킬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어!’
루이드는 답답한 마음으로 하얀 사내의 팔을 움켜쥐었다.
하얀 사내가 놀란 듯 몸을 굳혔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했다. 나를 해방한 인간에 대한 보답이다.”
그리고는 부스스. 남자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 뭘 다 했다는 거야! 이봐!”
루이드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 때문에 소폴레리온에 몬스터가 창궐했고! 사람도 많이 죽었어! 보답이라고 볼 수 없잖아!”
하지만 루이드의 다그침이 남자가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도 뭐야! 알 수 없는 말만 잔뜩 늘어놨을 뿐이잖아! 하늘은 또 뭐고 어린 것이나 오래된 것들은 또 뭐냐고 대체!”
어느새 절반이나 사그라든 남자의 몸. 상반신이 거의 날아가 말을 할 수 있는 기관 자체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사라져버린 남자의 상반신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푸른 바다였다.
그리고 햇살이 수면 위에서 부서져 찬란했다.
“아오, 열받네. 진짜!!”
* * *
“루이드, 괜찮아?”
아르헬의 목소리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루이드는 이곳이 어딘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직은 낯설지만, 어느 정도 눈에 익은 천장.
소폴레리온의 방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전혀 기억을 못 해?”
“음……. 문은 확실히 닫혔고?”
“응.”
“일단 신체에 큰 문제는 없어요. 능력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이에요.”
뒤쪽에 물러나 있던 아샤라가 다가왔다.
그녀 역시 걱정이 태산 같은 얼굴이었다.
“대충 아르헬에게 들었어요.”
아샤라가 루이드의 머리에 물수건을 얹어주었다.
시원한 감각이 차분하게 기분을 가라앉혀 주었다.
“마정석은 어떻게 됐지?”
“루이드가 새로 만든 봉인의 기둥에 융합되어버렸어. 그 구조물이 문을 막고 있는 거야.”
루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헬의 설명을 듣다 보니,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뱀이라는, 죄인. 신의 조각이라는 자의 조각으로 만든 봉인의 기둥.
높은 곳에 새겨진 언어.
조금 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본 것들과 함께 기억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래, 모르는 말을 잔뜩 들었었지. 아마도 이브에게 물어볼 수 있을 거야.’
어찌 되었든, 소폴레리온의 위협이 되는 차원의 문을 막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마 문을 닫지 못했다면, 소폴레리온 뿐만의 재앙이 아니었을 거다.’
통찰의 눈을 통해서 본 공간으로 엿본 존재들.
루이드는 천천히 뒤죽박죽 섞였던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라는 존재. 카인도 흰 뱀도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 카인을 죽이고 얻은 타이틀은 신을 죽인 자.’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물론 신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성직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이그라에는 각종 신을 모시는 신전도 존재했다.
‘카인이라는 놈은, 사실 그냥 몬스터라는 느낌만 들었다. 그 흰 뱀이라는 자도. 신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어. 타락해서 떨어진 놈들이라 그런 걸까.’
땅에 떨어지지 않은 하늘의 것을 진짜로 맞닥뜨리게 된다면.
흰 뱀이 말했었다.
루이드가 그들의 눈에 들었을 것이라고.
하늘의 존재도 문제였지만, 땅 뒷면의 오래된 것들도 문제였다.
‘그래, 시스템에서였는지 이브의 말이었는지. 오래된 것들의 신경을 너무 끌지 말라는 게 있었지.’
그러고 보면 그 조언은 완전히 무시해버린 게 되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루이드는 그들의 눈에 확실히 띄었을 테니까.
“하아…….”
루이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은데. 난 조용히 살고 싶다고. 신이 있든지 말든지 상관없으니까.’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찾아가서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원래 하시던 대로 쭉 사시죠,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루이드. 많이 힘들어?”
아르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다들 걱정하고 있어. 그대로 기절해버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엠마는 울어버렸다니까?”
“응……. 괜찮아, 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이드는 온몸의 에너지가 텅 비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걸 깨어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달을 정도로 몸이 엉망이었다.
“미안해, 축복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어. 루이드에게 전혀 다가갈 수 없었거든. 그래서 루이드가 기절해버린 걸 거야.”
아르헬이 울먹거렸다.
루이드는 손을 들어 아르헬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뿐이었는데도, 손이 갈기갈기 잘리는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능력 이상의 에너지를 끌어 써서 몸이 축난 상황인 것.
“그랬구나. 어쨌든 다 잘 해결됐잖아.”
루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르헬을 토닥였다.
“그런데 정말 대단했어. 평소의 루이드보다 훨씬 강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야? 골렘의 말대로 됐어!”
아르헬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차원의 문 같은 걸 닫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이브가 돕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터였다.
이브를 부르는 게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아찔한 재앙이 펼쳐졌겠지.
‘난 정말 운이 좋아. 다행이야……. 지금 생각해도 그걸 어떻게 막아냈는지 모르겠으니까.’
그 순간에 루이드의 몸을 움직인 것은 이브의 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으, 애초에 왜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거냐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 흘러가고 있는 느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세계의 이면, 뭐 이런 건가.’
루이드의 눈에 아샤라의 얼굴이 들어왔다.
‘마법사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마법을 연구한다지.’
그렇다면 루이드가 본 것들, 알아낸 것들은 진리에 가까운 것일까.
어떨까.
루이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물론 능력의 모든 것까지 알려줄 수는 없지만…….
‘이제 슬슬 알려줘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곤 루이드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전생자라거나, 사실은 이 세계의 능력이 아닌 다른 차원의 힘을 사용한다거나.
그런 비밀을 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인데 말이다.
‘뭐, 순순히 말해주진 않을 거지만.’
미묘한 마음으로 눈썹을 까딱이고 있을 때, 문 너머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이작 그란트로군.’
문이 열리고 루이드의 예상대로 아이작 그란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님.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감격한 얼굴이었다.
“대단한 분이신 줄 알았지만, 소폴레리온의 몬스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다니.”
기적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는 잠시 격앙된 얼굴로 우뚝 서 있다가, 고개를 털었다.
“아,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
“루이드, 다쳤다는 말을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루이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형님.”
아이작 그란트의 뒤로 엘빈 포커드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