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ron' Son has Paranormal Abilities RAW novel - Chapter (198)
남작 아들은 초상능력자-198화(198/252)
제198화
제23편 소메네아의 두 면모(4)
“제 전대 영주와의 조약이겠죠?”
살얼음이 낀 것 같은 분위기의 알현실 바닥으로 루이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라고?”
“그렇잖습니까.”
루이드는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분위기를 풀기 위함인지, 아니면 더 긴장감을 팽팽하게 만드는 것인지. 나란히 서 있는 대신들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소폴레리온의 전대 영주, 단데리온 가문과의 조약이지요.”
“그러나.”
“응? 그러나요?”
“이미 소폴레리온과 소메네아 사이의 깊은 협정이고, 그 땅과 함께 넘겨받은 책임과 권리요.”
“권리라.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루이드가 일라이에게 묻자, 그의 옅은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에게 질문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건…….”
“백작. 보다시피, 전하께서는 국정을 보살피시기에 너무 어리십니다. 하여 제게 국무대신의 자리를 내려 주셨으므로, 지금은 나와 대화하면 될 일입니다.”
일라이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타메리오 공작이 말을 가로챘다.
일라이는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외국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섭정인 타메리오 공을 욕보이는 것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인내하고 있었다.
“그 조약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더군요.”
루이드의 말에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타메리오 공작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소폴레리온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약.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 조약.”
루이드의 음성이 또박또박하게 떨어져 내렸다.
“첫째, 소폴레리온은 5인 이상이 탈 수 있는 배를 만들지 말 것.”
“둘째, 소폴레리온은 소메네아를 통하지 않은 그 어떤 해상 무역도 하지 않을 것.”
“셋째, 소폴레리온과 소메네아의 교역은 항상 소메네아 측에서 먼저 제시한 가격, 방법을 준수할 것.”
“넷째.”
루이드는 조약을 하나씩 읊어갔다.
알현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솔직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이 조약 정도가 아니라 일방적인 괴롭힘이 아닌가 생각할 터였다.
그런데도 이 조약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조약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단데리온 가문에서는 그 조약을 우리와 맺었겠지?”
“저는 못 합니다.”
“허! 그대는 모른다. 소폴레리온이 우리에게 어떤 빚을 졌는지.”
“압니다.”
루이드의 말에 분위기는 다시 다시 냉랭해졌다.
“빚. 소메네아의 신전과 신물을 부순 일 아닙니까.”
“그걸 알고도 이런 말을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그대도 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는 것이 딱 그 정도까지인가.”
타메리오 공작은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토해냈다.
“신전과 신물을 부숴 저주를 덮어쓴 것은 소폴레리온과 단데리온의 핏줄들이다. 그들의 땅을 관리하는 성주 놈들도 마찬가지고. 그 저주를 피할 방법이 그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고.”
그의 눈에는 형형한 분노가 비쳤다.
“한데, 지금 와서 우리가 불합리한 조약을 강제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루이드의 얼굴을 여전히 웃는 낯빛이었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도 루이드는 일라이 타메리오를 향해 물었다.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데리안 타메리오 공작의 인내심이 드디어 바닥난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휙 움직여 루이드를 가리키자, 루이드 주위로 병사들이 둘러쌌다.
“흠, 이렇게 나오셔도 괜찮으신 걸까. 아…… 뭐, 어찌 됐든 상관없는 건가. 결말은 비슷할 것 같으니까.”
루이드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타메리오 공작은 결정을 내렸다.
“소메네아 왕실을 모독한 그를 구금하라!”
“예!”
처억. 병사들이 창을 루이드에게 겨눴다.
“이, 이런 일이!”
“허억.”
소메네아의 대신들은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웅성거릴 뿐이었다.
“……?”
“응?”
“엇……. 모, 몸이.”
소메네아의 병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덜그럭거렸다.
그들은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다들 뭣들 하는 거냐!”
스릉.
타메리오 공작의 곁에 있던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 역시 루이드에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무슨…….”
“브라운 경?”
“이런 장면이 너무 자주 반복된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독자였으면 분명 질렸다고 말할 게 분명해.”
루이드가 툴툴거렸다.
그리고 검지와 엄지를 비틀어 딱! 소리를 냈다.
끼이익.
닫혀있던 알현실의 입구가 열리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이드의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 어어어!”
“으어어!”
소메네아의 대신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루이드의 기사들은 대신들이 도망가거나 소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압박했다.
“어, 어떻게?!”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포커드 백작……. 설마!”
“우리 소메네아를 침공하려는?!”
“그런 것 아니니, 너무 놀라지 마시고요.”
루이드가 뒤를 돌아보며 가볍게 말했다.
소메네아의 대신들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감히 이런 일을 벌이다니!”
데리안 타메리오 공작 역시 검을 빼 들려 했다.
하지만 루이드는 그가 검을 뽑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단 진정하세요.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니까요.”
루이드는 알현실의 분위기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아샤라. 그 앨 데려와.”
그녀를 부르는 말에 루이드의 기사들이 들어왔던 알현실의 입구로 아샤라와 해적선의 소녀가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던 데리안 타메리오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어, 어떻게…….”
“무슨…….”
소녀가 걸어오는 순간.
작은 발걸음이 붉은 융단이 깔린 대리석 바닥을 걸어오는 그 순간순간마다.
일라이 타메리오는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잃어버렸던 반쪽 심장이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일라이 타메리오마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국의 왕이라는 사실도 잊고(물론 섭정왕 때문에 거의 종이 인형 같은 처지였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데리안 타메리오가 다급한 목소리로 일라이를 말리려 했다.
궁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었지만, 공작의 손이 일라이를 붙잡긴 했다.
하지만 일라이는 그의 팔을 뿌리쳤다.
왕좌가 있는 높은 단의 계단을 내려가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루이드는 아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라이는 루이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아샤라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서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소녀에게 꽂혀 있었다.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게다가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라이는 분명 그녀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라이는 곧장 소녀에게로 내달았다.
그런 일라이의 뒤를 데리안 타메리오 공작이 쫓았지만, 그는 일라이를 붙잡지 못했다.
이미 일라이의 손이 소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꽉 쥔 두 사람의 손으로부터 물이 뿜어져 나왔다
* * *
데리안 타메리오 공작은 알현실 입구로 들어오는 소녀를 보는 순간, 자신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인가 생각했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이리라, 그것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소메네아 왕국을 모독하는 타국의 귀족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실리아.’
거의 10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아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소녀의 얼굴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소메네아의 국왕, 진정한 타메리오의 혈통인 일라이와 똑같았다.
닮았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틀에 찍어 낸 것처럼 똑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조그만 여자애가 살아 돌아왔을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데리안 타메리오는 배신자였다.
하지만 스스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데리안 타메리오는 진정한 타메리오가 아니었다.
타메리오라면 바다뱀 신의 가호를 받아 물을 다루는 초능력이 발현되어야 했다.
그는 타메리오 중에서 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부정한 아이라고.
어그러진 아이라고.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죄를 누구에게 물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데리안은 결론을 내렸다.
능력을 가진 타메리오를 모두 없애자.
그렇다면 자신이 어그러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데리안은 아무도 모르게, 하나씩, 천천히.
타메리오들을 없앴다.
그건 그에게도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는 조금 비틀린 사람이었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살배기 쌍둥이 조카가, 둘을 떼어놓는 것만으로도 타메리오의 능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둘 중에서 하나만 죽이면 된다.
무척이나 기뻤다.
어쩌면 신께서도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기야 이제 시대가 많이 지나지 않았는가.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오는 초능력이라니.
분명 그건 기분 나쁜 일이었다.
정상적인 게 아니라고.
소름이 끼치는 일이라고.
그만두는 게 좋다고.
데리안 타메리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늙은 것을 죽이는 것보다 어린 것을 죽이는 일은 힘들었다.
데리안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데리안은 조카 중, 믿을 수 있는 부하에게 여자아이를 처리하게 시켰다.
그리고 그 후론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일라이 타메리오는 이어져 내려오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평범한 아이가 되었다.
자신은 섭정을 통해 소메네아를 손에 넣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모든 일이 단숨에 악몽이 되었다.
땅에 처박히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저것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것인가. 저것이 어떻게!’
데리안 타메리오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모든 것은 저놈 때문이다.
이그라에서 온, 소폴레리온의 새로운 영주.
아무것도 모르는 놈.
소메네아에게 진 빚이 무엇인지. 저주가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놈.
건방진 놈.
데리안은 알 수 있었다.
소메네아의 바다뱀 신은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죽을 것이다!
* * *
촤아아악!
물보라가 일었다.
소메네아 왕궁의 알현실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이크. 다 젖었네.”
루이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보호막을 만들지 그랬어요.”
루이드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아샤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히죽 웃었다.
“물놀이했다고 생각하지 뭐.”
루이드는 눈앞의 쌍둥이 남매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물길이 잦아들어 둘의 모습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작은 샘이 터진 것 같이.
아름다운 빛깔의 바닥이 흐르는 물줄기에 반짝거렸다.
이 모든 것이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일라이와 실리아는 지금 일어난 일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마주 보고 있었다.
오직 이 세상에서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 것처럼.
잃어버린 신체의 두 조각이 만난 것처럼.
루이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루이드는 다 알았다.
타메리오 왕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해적선 위에서 실리아를 처음 본 순간 다 알아냈다.
통찰의 눈으로 실리아가 가지고 있던 피리와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알아낸 그 모든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해적들의 손에 자란 실리아가 그 말을 믿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과거 실리아를 빼돌린 남자가 해적선에 함께 타고 있었다.데리안 타메리오가 믿었던 사람. 소메네아 왕국의 왕실 검사 우르돈의 하인.
“일라이. 나의 반쪽. 내 오빠.”
실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빠. 보고 싶었어. 그리고, 보고 싶어.”
슬픔이 물줄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