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ron' Son has Paranormal Abilities RAW novel - Chapter (208)
남작 아들은 초상능력자-208화(208/252)
제208화
제8편 준비(7)
그곳은 유리 광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숲을 드나드는 자들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리그말 족을 위한 비석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바위가 솟아올랐다.
아르헬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단단한 바위에 루이드는 이름을 써 내려갔다.
살아남은 리그말 족들이 기억하는 이름과 루이드가 기억하는 이름과 폐허에 남은 기록에 의지해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자들에 관하여서도 써넣었다.
그리고 시체조차 찾지 못했을 자들에 관한 것도.
모든 이야기를 써 내려간 뒤, 루이드는 비석을 오리할콘으로 코팅했다.
그 어떤 바람을 맞더라도, 그 어떤 열기에도. 이 비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 *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이드가 소폴레리온으로 돌아오자마자 로빈 톰멀이 다가와 물었다.
“아샤라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루이드가 그리슨빌로 가서 리그말 족의 마을을 정리하고 장례를 치르는 등의 일을 모두 끝마치고 온 것은 거의 이 주나 걸렸다.
그런데 아샤라는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왤까. 뭔가……. 축복의 힘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었다.
아르헬의 축복의 힘은 한 번도 잘못된 적이 없었다.
그 힘으로 루이드와 아르헬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병을 치료했다.
루이드는 당장 아샤라의 방으로 올라갔다.
“아샤라.”
그의 부름에도 아샤라는 말이 없었다.
리그말 족의 일이 처리되고 나서 돌아오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왔냐고 웃어줄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냐고 묻는 이가 아샤라이기를 바랐다.
루이드는 천천히 아샤라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
괜히 침대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주섬주섬 만져보았다.
침대는 삐걱거리는 곳도 없고 침구는 더없이 포근했다.
루이드는 침대 옆 보조 의자에 앉아 그녀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통찰의 눈을 한 번 더 써볼까 하다가 말았다.
아르헬의 축복의 힘을 빌려도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혼자서 시도한다고 될 리가 없었다.
‘시스템의 스킬은 만능인데. 왜 안 듣는 거야. 아샤라, 응?’
약간의 후회가 몰려왔다.
애초에 아샤라에게 자신의 능력을 모두 오픈했다면……. 그래서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이드는 흠칫 놀랐다.
혈계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샤라를 믿는다는 사실에 다시 또 한 번.
“아샤라. 슬슬 일어나 주라. 네가 없으니까, 심심하네.”
루이드는 잔머리가 들러붙은 아샤라의 이마를 한 번 쓸어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는다고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루이드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아샤라의 방에서 나온 루이드는 클리아베이든과 마주쳤다.
그는 아르헬과 함께 방문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
루이드는 그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미안한 얼굴을 했다.
누구보다도 아샤라를 먼저 보고 싶었던 사람은 클리아베이든이었을텐데.
“괜찮아요.”
클리아베이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는 아르헬이 멘 가방을 들고 스르륵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샤라의 곁으로 다가가 가방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맡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루이드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집무실로 내려가 그리슨빌에서 일어났던 일을 수호단에게 모두 말했다.
레온 크레이브 공작에게도 국왕 카이린에게도 전달했다.
또 로빈 톰멀과 레미르 톰멀을 따로 불러 그들에게도 전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이그라에 돌아올지 모릅니다. 누가 표적인지도 정확히 모르고요.”
물론 루이드는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에게 말하는 서늘한 목소리를.
하지만 단데리온 후작이 그랬듯이, 이곳의 그 누구라도 페르디날에게 이용당할 수 있었다.
후작 가문쯤 되는 곳까지 당했던 일.
확실히 대비해야 했다.
“다른 귀족들에게도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전하께는 그리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어차피 그 일로 소폴레리온 하나를 받은 것뿐이니, 다른 귀족들이 들고일어날 일도 없고요.”
“그렇군요. 애초에 모든 것이 잘 된 셈이로군요.”
로빈은 그렇게 말한 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됐습니다.”
루이드는 너그럽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 톰멀 경께서도, 레미르 아가씨께서도 이제 슬슬 돌아가셔야겠습니다. 후작님께도 이 사실을 전하셔야죠.”
“……그래서 말인데요.”
묵묵히 듣고 있던 레미르 톰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밀라비아로 가보기로 했어요.”
“예?”
루이드는 놀라 하마터면 목소리가 나갈 뻔했다.
“그놈을 상대하려면 강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그게……. 그 말이 맞기는 하는데요.”
“마침 헤랏산 님의 수업이 끝났어요. 앞으로는 더 좋은 스승을 만나서 배우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요. 지금이 딱 밀라비아로 떠나는 것이 좋겠어요.”
레미르의 눈빛이 너무나 선명해서 루이드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후작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잖습니까?”
이런 시기에 아끼는 딸을 외국으로 보낸다니.
“아버지의 허락은 필요치 않아요.”
“하지만…….”
루이드의 시선이 로빈에게로 닿았다.
“내 동생을 볼 것도 없어요. 이건 내가 결정한 일이니까요. 아버지가 왜 지금껏 조용히 있으신 건지도 다 알아요.”
“음…….”
“나와 백작님을 혼인시키려고 그러시는 거죠.”
“예?”
루이드는 목소리에서 이번에야말로 음 이탈이 일어났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아버지께서 제가 이곳에 있는 걸 모를 리가 없고요.”
“다 알고 계셨군요.”
“네, 알아도 모른 척한다면 일은 늘 쉬워지니까요.”
레미르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빛냈다.
“전 백작님을 무척이나 연모하기는 하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오늘 밤에라도 당장 헤랏산 님과 이곳을 떠나겠어요.”
“예? 방금 엄청난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요?”
“헤랏산 님과도 사실 이미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요. 그분께서도, 슬슬 밀라비아로 돌아가 자신의 자리를 견고히 하시겠다고 했거든요.”
“하긴, 너무 오래도록 이곳에 있긴 했지만……. 아니, 그보다…….”
루이드는 당황했다.
순식간에 충격적인 고백을 받은 것 같은데, 고백한 당사자는 루이드의 반응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제 할 말만 하는 것이다.
“저기, 레미르 님.”
루이드가 일어서는 그녀를 불러세우려 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레미르는 루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백작님과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백작님께서도 원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하고요. 틀린 건가요?”
루이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와 결혼하면 루이드는 후작가의 사위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자리를 평생 탐내본 적은 없었지만.
그 외에도, 레미르 톰멀은 객관적으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그라의 귀족 영애들을 모아 놓아도 그녀만큼 아름다운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들을 보호할 줄 아는 상냥함을 지녔고, 또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영리하면서도 순수함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루이드를 연모한다고 말했다.
루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레미르의 눈에서 아주 잠시 슬픈 빛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알았어요. 아, 걱정하지는 마세요. 거절당했다고 해서 앙심을 품거나 포커드 가문을 적으로 돌리진 않을 테니까요.”
“거, 거절한 건…….”
“거절은 거절이죠.”
레미르가 싱긋 웃었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음, 조금 꼬장꼬장하게 굴 수도 있으시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 또한 제가 밀라비아로 가버린다면 해결될 일이니까요.”
그녀는 아주 재밌다는 듯 작게 킥킥거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루이드가 로빈에게 물었다.
로빈은 눈썹을 으쓱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로서는, 누님을 막을 수가 없거든요. 사실 백작님이 안 계실 때 저희끼리 이미 한 번 나온 이야기입니다.”
“하? 헤랏산 님도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
“예. 저는 국경까지 두 분을 호위한 뒤, 아버지께로 갈 겁니다. 그 괴한과 관련해서는 제가 직접 전하도록 하죠.”
“……으음, 그렇게 해 주십시오.”
루이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톰멀 가문의 두 사람과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는 곧장 헤랏산을 찾아갔다.
“밀라비아로 돌아가신다고요.”
“……! 백작님.”
헤랏산은 밝은 얼굴로 루이드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가야 하기에 가시는 거죠?”
따지고 보면 그녀는 훨씬 이전에 밀라비아로 돌아가야 했다.
루이드의 곁에 남아있던 것은 온전히 그녀의 선택.
“……물론입니다. 제가 그곳에 가서 할 일이 있어요.”
“정복이요?”
루이드의 말에 헤랏산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밀라비아로 함께 돌아가 정복해버리자는 말, 헤랏산이 루이드에게 했던 말이었다.
“음……. 글쎄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한데…….”
헤랏산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밀라비아에 함께 가기로 했었는데 말입니다.”
루이드가 미안한 얼굴을 하자 헤랏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샤라가 저렇게 되었는데, 루이드 님께 함께 밀라비아로 가자고 하는 짓은 안 해요. 저도 그 정도 철딱서니는 있다고요.”
“그거 놀랍네요.”
루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처음 만났던 헤랏산은 정말로 철이 없는 말괄량이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이전보다 듬직해진 것처럼 보였다.
“저도 철들 나이가 됐나 보죠.”
헤랏산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둥그런 눈을 몇 번 데굴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강해질게요. 백작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정말이에요.”
루이드는 복잡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밀라비아로 갈지도 모르고요. 이번에는 나라 단위로 커다랗게 일을 벌일지도 모르죠.”
그 역시 헤랏산의 말에 동의했다.
페르디날이 아브리키아스의 신력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면, 분명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가 됐으리라.
그날 밤 헤랏산과 레미르, 로빈이 소폴레리온을 떠나갔다.
레미르가 대외적으로는 루이드가 전혀 모르는 일로 해야 한다면서 마중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루이드는 높은 탑 위에서 저 멀리 달빛을 받으며 멀어지는 헤랏산과 톰멀 남매를 보았다.
그들이 든든한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도 들었다.
‘강해져야 한다. 언제든지 맞설 수 있도록…….’
페르디날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그 새끼……. 진짜 가만 안 둔다.’
루이드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방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쇠를 검으로 만들려면, 망치로 두드려야 하는 법.’
그의 푸른 눈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