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ron' Son has Paranormal Abilities RAW novel - Chapter (228)
남작 아들은 초상능력자-228화(228/252)
제228화
제3편 가야 할 길(2)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헤랏산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루이드는 정말로 그녀가 단단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는 무턱대고 결혼하자며 매달리던 철부지가 아니었다.
“사실 혈계 능력자인 것을, 제 어머니께서는 무척이나 싫어하세요.”
그녀는 따뜻한 찻잔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루이드는 언뜻 헤랏산의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밀라비아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해 읽은 기억이 있었다.
혈계 능력자가 난동을 부려 왕족 가문 중 하나를 거의 멸해버린 일이 있었다.
50년도 되지 않은 근래의 사건이니, 헤랏산의 어머니가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일로 상황이 좀 바뀌었나요?”
루이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헤랏산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좀 긴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안타깝군요.”
루이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갑자기 오른 국왕의 자리가 버거울 터인데,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 사이가 소원하다니.
그녀가 무척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드 역시 전생에서는 가족 때문에 얼마나 설움을 많이 겪었는가.
이미 지난 일들이 되었고, 지금의 가족들을 통해 치유 받았다. 하지만 그 고통을 알기에 더욱 걱정되는 것이었다.
헤랏산이 이 커다란 왕궁에서 얼마나 쓸쓸할까.
“괜찮습니다. 이제 더는 제가 저를 싫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지금은 국왕으로서 밀라비아를 이끌어가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어머니와는 차차 풀어나가면 될 일이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녀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만 없었어도 밀라비아에 남아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모습을 아샤라 님께도 보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요.”
마치 루이드의 생각을 읽은 듯 헤랏산이 말했다.
“그녀가 깨어나면, 반드시 이곳에 다시 들러 주세요.”
“물론입니다.”
“아, 맞아. 그리고 또 만나볼 사람이 있지요.”
루이드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가 금방 헤랏산의 말을 알아들었다.
“레미르 아가씨.”
어느새 헤랏산의 뒤로 다가온 레미르 톰멀의 얼굴이 보였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녀는 더없이 건강해 보였다.
밀라비아의 좋은 햇살을 많이 받은 모양인지 피부도 보기 좋을 만큼 구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훈련을 아주 열심히 하셨나 본데요.”
루이드의 말뜻을 알아챈 레미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많이 탔죠?”
“네, 좀 타셨네요.”
“이그라와는 그리 떨어진 나라도 아닌데, 날씨가 매우 달라요. 이곳에는 햇볕이 늘 강렬하더라고요.”
“밀라비아 서쪽 사막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서 그래요.”
헤랏산이 끼어들었다.
“레미르님은 헤랏산 님의 왕족 결투를 보셨겠군요?”
루이드의 말에 레미르가 밝은 얼굴이 되어 테이블로 단숨에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 말도 마세요! 엄청났다고요!”
그녀는 흥분한 채, 헤랏산이 어떻게 16명이나 되는 국왕 후보와 겨루었는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한바탕 레미르의 수다가 이어졌고, 뒤를 이어 헤랏산이 그녀가 얼마나 무술 훈련에 진심인지에 관하여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제가 붙여준 스승은 밀라비아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실력 있는 자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글쎄, 레미르 아가씨더러 자기 아들과 결혼해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이그라 후작의 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거든요.”
“세상에. 하여튼, 레미르 님은 정말 타고났다니까요. 천재예요!”
루이드도 그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리고 루이드는 밀라비아의 국왕이 된 헤랏산에게 말했다.
“페르디날이 돌아온 것 같아요.”
“그때 밀라비아와 이그라 사이를 틀어놓으려고 했던 괴한 말이죠.”
헤랏산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밀라비아의 왕위를 잇는 동안, 그에 관하여서도 조사를 좀 했답니다.”
헤랏산이 벽에 있는 선반으로 다가가더니, 열쇠를 꽂아 서랍을 열었다.
“정도를 그리 많이 찾지는 못했지만요. 그가 저지르고 다닌 것이라 짐작되는 만행들입니다. 저도 국왕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접근할 수 있었던 자료예요.”
“……그렇군요.”
루이드는 헤랏산이 모은 자료들을 읽어 내려갔다.
파편처럼 흩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거나 정확하지 않은 기록들이 대부분이었다.
공통된 것들은 괴한, 그림자 속의 사나이,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어둠 속에서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내용이었다.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소문들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었지만, 페르디날의 실체를 아는 루이드는 이 모든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끔찍하네요.”
“사실 새롭게 그를 추적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요.”
헤랏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때, 루이드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문서 중에 헤랏산이 낙서처럼 갈겨 써 놓은 문장이었다.
흙과 바위의 왕.
“이건 뭐죠?”
루이드가 내민 글귀를 본 헤랏산이 얼굴을 붉혔다.
“아, 그건…… 사실 페르디날이라는 이름에 관해서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찾아봤거든요. 그런데 쓸만한 것은 없었고. 음, 사실 쓸모있는 정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헤랏산은 당황한 듯 웅얼거렸다.
“밀라비아의 오래된 전설 중 하나예요. 흙과 바위의 왕 펜드널.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인 그가 세상의 왕이 되어 모든 것을 통치하게 될 거라는 거요.”
“이게 페르디날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앗, 아니……. 사실은 흙과 바위의 왕이라는 말에서. 루이드 님이 생각나서요. 아주 옛날 사람들은 금속을 잘 몰랐을 테니, 땅속에서 금속을 뽑아내는 루이드 님을 보면서 그런 별명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고. 하하하.”
헤랏산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단정하게 묶여있던 빨간 머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루이드는 그런 헤랏산의 말에서 무엇인가 겹치는 기억이 있었다.
‘뭐더라…….’
흐릿한 기억 속에서 클리아베이든의 불꽃이 떠올랐다.
‘아.’
그가 해준 이야기. 몇백 년 전 클리아베이든이 어릴 때 만난 혈계 능력자의 이야기.
‘그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나와 같이 금속을 다루는 사람이었다고 했어. 땅속에서 금속을 뽑아내서……. 그가 설마 페르디날일까?’
밀라비아의 전설 속에 나오는 펜드널이라는 이름도.
‘아브리키아스가 페르디날을 거두고 배신당했던 일이 천 년 전. 시간상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천년이나 살아오며 이 세계를 떠돈 페르디날.
어둠 속에 숨어 온 세상을 쥐락펴락하려고 했던 그.
‘하지만 클리아베이든에게 들은 혈계 능력자는…… 자기의 능력을 없애고자 했다. 내가 아는 페르디날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이 모든 일이 정말로 연결되어있다면…….
루이드는 또다시 셜린 세반의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이브의 뜻.
운명.
루이드는 머리를 저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니. 그런 건 없어.’
그리고는 헤랏산이 모아준 자료를 모두 읽어보고 아공간 큐브에 챙겨 넣었다.
“그럼 이제 세반 공작이 알려준 곳으로 가신다는 거죠?”
레미르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녀에게는 세반 남매의 이야기를 깊이 할 수 없었다.
셜린 세반의 정체는 세반 왕가를 위협하는 단서가 될 수 있었기 때문.
어쨌거나 그녀는 이그라의 강력한 귀족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그저 셜린 세반이 페르디날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고, 또 마법적 지식이 깊어 아샤라를 깨울 단서를 찾았다는 식으로 둘러댄 것이었다.
그건 헤랏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이리 반갑게 맞아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겠습니다.”
“전하라니……. 하하, 그 말을 백작님께도 듣다니. 참 이상한 기분이네요.”
헤랏산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가 곧 씩씩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데려가 주실 수 있겠어요?”
레미르의 말에 루이드와 헤랏산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라비아의 검술에 통달한 것은 아니지만, 저도 슬슬 세상을 더욱 넓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사실 완전하게 밀라비아의 검술을 전수 할 생각은 없어요.”
“그, 그런…….”
헤랏산은 특히나 아쉬운 얼굴이었다.
“어차피 제가 밀라비아의 왕실 검술에 통달한다고 해도 헤랏산 님께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죄송하달까…….”
레미르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밀라비아 왕실의 검술은 분명 귀한 것이었고, 아무에게나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대는 내 친우이니 당연히 아무런 대가 없이 검술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헤랏산은 완고하게 말했지만, 루이드 역시 레미르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이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레미르 아가씨의 말대로 이쯤에서 배움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헤랏산은 뾰로통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둘이 아주 친해졌군.’
루이드는 두 여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것이 헤랏산이 왕위를 쟁취하는 험난한 과정에서 레미르는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했으니까.
‘두 사람 모두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어도 두 여인과 친구 사이라는 점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레미르 님의 말뜻은 잘 알겠지만,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앞서 세반 공작의 말에 도착했던 곳 역시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어요.”
루이드의 말에도 레미르의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시험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제야 루이드는 톰멀 후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후작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로빈 톰멀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루이드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레미르가 민망한 얼굴로 볼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께는 편지를 보냈답니다. 물론 답은 오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이미 많이 고민하셨겠죠. 후작님과 아가씨의 일이니,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요. 아가씨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기를 바랍니다.”
그간 루이드가 레미르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분명 후작 가문에서는 경을 칠 큰일이라고는 해도, 레미르 개인을 볼 때 어떤가.
그녀는 병들어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인생을 다시 얻은 셈이었다.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얼마나 감사할까. 어디든 갈 수 있는 두 다리와 힘차게 뛰는 심장이 얼마나 간절할까.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 모든 것을 잃기 싫을 것이다.
어쩌면 톰멀 후작도 그것을 알기에, 그만큼 딸을 사랑하기에 이런 미친 짓에 동조해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억지 구실을 대면서까지 말이지. 사실은 나를 갖다 댄 것도 다 구실일지도 모르겠어.’
루이드는 생각보다 온화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톰멀 후작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하하하. 정말이지. 백작님처럼 편한 분은 없다니까요. 후작령에 있을 땐 너무 갑갑했어요. 모두 제게 이래라저래라할 뿐이었으니까요.”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뺨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백작님께선 허락해주시는 건가요?”
“대신 제게 짐이 되시면 안 됩니다.”
루이드는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 그럼 허락하신 거죠!”
레미르가 어린아이처럼 벌떡 일어나 깡충 뛰었다.
헤랏산은 여전히 아쉬운 얼굴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따라나서고 싶지만…….”
“전하께서는 밀라비아를 위해 하실 일이 많겠지요.”
루이드는 따뜻한 응원을 담은 눈빛으로 헤랏산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그래요. 앞으로도 난 루이드 님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거니까요.”
“지금도 충분하지만 말입니다.”
그리웠던 얼굴들과의 재회는 달콤한 것이었다. 루이드와 일행들은 밤이 늦도록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 날에는 밀라비아의 꿀을 채취하는 로벤의 군락지를 구경했고 왕궁과 왕도의 중요한 곳들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딱 하룻밤을 더 보낸 뒤, 밀라비아의 왕도를 떠날 채비를 했다.
“정말 아쉽지만, 우리에겐 다음이 있으니까요.”
헤랏산은 변신한 아르헬의 등에 오른 모두를 바라보며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손바닥에 그려진 꽃무늬를 보여주며 예를 표했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르헬은 커다란 날갯짓으로 단숨에 높이 날아올랐다.
멀어지는 밀라비아의 왕궁과 헤랏산을 보며 루이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곳에 아샤라와 다시 한번 꼭 방문할 것이라 다짐했다.
“다들 꽉 잡아, 완전 빨리 날아갈 거니까!”
아르헬이 깔깔거리며 순식간에 왕궁의 상공을 벗어났다.
아르헬과 루이드 일행이 사라진 왕궁에 남은 헤랏산은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전하. 대비께서 찾으십니다.”
헤랏산은 잠깐 멈칫했다가, 곧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에겐 이제 어떤 두려움도 이겨내는 힘이 느껴졌다.
“그래.”
헤랏산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가야 할 곳을 향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