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ron' Son has Paranormal Abilities RAW novel - Chapter (31)
남작 아들은 초상능력자-31화(31/252)
제31화
제6편 파고, 파고(1)
카이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크라우스 제국.
텔도라그의 서쪽 끝에 있는 대제국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그라 왕국은 볼품없는 소국.
“흐음, 흠.”
귀족들이 헛기침했다.
“우린 제국의 속국이 아니오.”
카이린의 말에 귀족들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내세울 것이 마땅히 없는 작은 왕국 이그라.
이런 약국이 크라우스의 속국이 아닐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제국과 거리가 가장 먼 국가라서 때문일지도 몰랐다.
크라우스 제국은 텔도라그 대륙 서부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왕성한 정복 전쟁은, 선대 황제가 죽은 이후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그라가 제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것은 ‘아직’인지도 몰랐다.
대륙의 중심 국가.
때문에, 숫자 표기법을 비롯한 대륙의 많은 문화가 크라우스 제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많았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톰멀 후작이 앞에 놓인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루이드의 아라비아 숫자 표기법에 대해 적힌 종이었다.
“……저는 전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다른 분들께서도 이 표기법을 수렴하여 전하의 뜻에 힘을 모아주시면 좋겠군요.”
“후, 후작님.”
귀족들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톰멀 후작 또한 당연히 반대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톰멀 후작은 이그라의 가장 큰 땅을 지닌 대영주였고, 왕실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왕가인 세반 가문과는 오래전부터 꽤 껄끄러운 사이였다.
톰멀 후작까지 카이린의 편을 들자 귀족들은 그제서야 서로의 눈치를 보며 종이를 챙겼다.
카이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대들이 마음을 모아주니 참으로 고맙군.”
카이린에게는 커다란 산 하나를 넘은 것과 같았다.
‘이놈의 귀족들, 내가 하려는 일이라면 일단 반대하고 보는 작자들이니. 그래, 놈들에겐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카이린이 톰멀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호수 바닥 같은 그 눈과 마주치자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힘을 보태주다니.’
카이린은 톰멀 후작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힘들 것이라 예상했었다.
후작은 그런 카이린의 생각을 훤히 읽은 것처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카이린이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이그라의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대귀족 회의가 끝났다.
이그라 왕국의 모든 영지에서 아라비아 표기법을 사용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의 이름은 루이드 표기법이었다.
* * *
“아버지. 왜 그리하셨습니까?”
젊은 남자의 부름에 톰멀 후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이?”
“……저는 아버지께서 세반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반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의아하다는 표정의 남자.
밝은 갈색의 고수머리를 가진 남자의 이름은 로빈 톰멀.
페릭 톰멀 후작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하.”
톰멀 후작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느냐?”
“…….”
“아직 어리구나. 로빈. 나는 세반 가문이 하는 일에 뭐든 반대하는 것이 아니란다.”
후작의 눈은 날카로웠지만, 로빈을 탓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톰멀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이번에 전하께서 제안한 일들은 확실히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 거절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 전하께서 즉위한 뒤 시행한 것 중 가장 쓸만한 일이 아니더냐.”
자칫 불경할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톰멀 후작은 느긋하게 말했다.
왕궁의 복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하지만 저는 크라우스 제국이 걱정됩니다. 다른 귀족들도 그럴 겁니다.”
로빈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텔도라그 대륙에 속한 나라라면 어떤 곳이든 크라우스 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정예군은 아이들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써 먹히는 단골 메뉴였다.
크라우스의 귀신 부대가 말 안 듣는 아이에게 찾아와 산 채로 가죽을…….
로빈 역시 유년 시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확실히 그렇지. 하지만 그쪽은 아직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더구나.”
“네?”
“거기도 꽤 시끄러운 모양이야.”
톰멀 후작은 꽤 즐거운 얼굴이었다.
“제국의 사정까지 꾀고 계십니까?”
“쯧쯧, 로빈. 톰멀 가문을 지키려면 이그라 왕국만을 보아선 안 된다. 대륙을 두루 살펴야 해.”
“죄송합니다.”
“누구나 서툴 때가 있는 법이지. 허나 너도 곧 성년, 슬슬 아비를 기쁘게 해 주렴.”
로빈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로빈은 그의 아버지인 톰멀 후작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다섯이나 되는 형제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그밖에 없었다.
다행히 로빈은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 톰멀의 형제 중 로빈보다 검술로 강한 자가 없었다.
오늘도 후작의 호위차 왕궁에 입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후작이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일 뿐이었다.
톰멀 후작의 곁은 늘 기사 밸레이 서머즈가 지켰다.
이 역시 크라우스의 귀신 부대 이야기처럼 이그라의 모두가 아는 이야기.
밸레이 서머즈. 톰멀의 자랑스러운 검.
로빈의 검술 선생이기도 했다.
“제국이나 세반 가문보다도 나는 그 포커드 가문의 막내 공자가 신경 쓰이는구나.”
“새로운 표기법을 만든 작자이지요.”
“너와 그리 나이 차가 나지 않는다지.”
톰멀 후작이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곧 그와 만나게 될 터이니, 대비를 잘해두도록 해라.”
“예?”
“아무리 부족한 아들이라고는 하나, 톰멀의 이름이 부끄러움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으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로빈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은 새치가 듬성듬성 나 있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이미 루이드 포커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가 입궁해 카이린 세반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오늘의 일까지, 이미 후작이 예상하던 바였다.
‘확실히 놀라운 자다.’
새로운 표기법은 후작이 보기에도 효과적이었다.
지금까지 영지에 발생하던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유용했다.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른 귀족들이 신경 쓰는 크라우스 제국도 지금 당장은 눈치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새로운 황제와 귀족들 사이에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아 보였다.
대륙에 크라우스 제국의 손길이 약해진 사이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힘을 키워야 했다.
‘아직 하룻강아지인 카이린 세반이 왕국을 잘 이끌진 모르겠으나.’
과거 크라우스는 강력한 황제를 중심으로 귀족들이 단합되었었고, 무시무시한 정복 전쟁을 해나갔었다.
하지만 그들의 태양이 졌다.
피와 전쟁의 태양.
죽음의 길을 가로질러 크라우스를 부강케 한 태양.
그 태양이 지고 조용한 달이 솟아올랐다.
귀신 부대를 이끌던 황제의 뒤를 이은 새로운 황제는, 선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크라우스의 귀족들은 전쟁에 소극적인 황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견고한 제국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이는 크라우스 제국을 뒤흔들었다.
이곳저곳에서 작은 소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제국을 이끌 별에 합당한가.
‘어찌 보면 그것 또한 선대 황제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지.’
톰멀 후작의 눈에는 제국이 대륙의 구석에 있는 약소국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어린 공자의 능력이다.’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뿐 아니라, 벌써 나라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왕국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후작에게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문젯거리.
‘문젯거리가 될지, 호재가 될지…….’
톰멀 후작의 눈에 빛이 어렸다.
* * *
“대박이군.”
루이드는 누운 채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뽈뽈뽈.
인간의 모습을 한 콘콘이 날개만 드러내 날아다니고 있었다.
머리엔 온통 리본이 달렸고, 레이스 잠옷이 하늘거렸다.
“뭐가 대박인데요?”
루이드의 팔을 짚고 스캔하던 아샤라가 물었다.
“데이슨이 그러는데, 이그라의 표기법이 전부 바뀌고 있다는군.”
“이곳 남작령에서 쓰는 그 표기법으로요? 잘됐네요. 그거 정말 편하더라고요. 처음에야 머리 아팠지만, 저도 금방 배웠고요.”
“응, 이젠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다 될 거야.”
“뭐가요?”
“뭐긴 뭐야. 사람들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거 말이야. 내 표기법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대신, 상하수도와 농업용 수로의 기술을 넘겼거든.”
“그런 귀한걸요?”
아샤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차피 알아내려고 하면 알아낼 수 있는 거야. 시간 문제라고. 게다가 우리 남작령을 제외하고 다 망해버리면 아무 소용 없잖아?”
루이드가 눈을 깜빡였다.
“잘나가는 건 좋지만, 함께 사는 사람들의 수준도 같이 끌어올려야 해. 그게 결과적으로 강해지는 길이거든.”
아샤라는 잠시 루이드를 멀뚱히 보았다.
“루이드 님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에요.”
“뭐?”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같다가도 누구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것 같고.”
“남들을 위해서 살다니, 무슨 그런 말을. 정말 그랬다면 더 일찍 기술을 풀었겠지.”
“또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못된 척.”
“난 내가 못됐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나 엄청 착해~.”
아샤라는 에벨리를 떠올렸다.
그곳의 마법사들은 뭐든지 나누려고 하는 법이 없었다.
귀중한 발명, 대단한 연구, 놀라운 지식.
그저 자기들끼리만 설전을 벌이기 바빴다.
그 모든 것들은 에벨리의 문턱을 넘어 흐르지 않도록 관리되었다.
그래서 아샤라는 처음 에벨리에서 나왔을 때 무척 놀랐다.
만약 에벨리의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을 모두 공유했다면, 이보다 훨씬 발전한 세계가 되었을 터였다.
그런데 아샤라 눈앞의 남자는…….
“왜? 멋있냐?”
루이드가 아샤라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참나, 누가 멋있대요?”
아샤라가 루이드의 팔을 일부러 팍 내려놓았다.
루이드가 킬킬 웃었다.
순조롭다.
이제 루이드의 잘 먹고 잘살기 계획은 거의 다 이루어졌다.
‘내 삶이 판타지 소설이었다면, 슬슬 완결을 향해 가고 있는 거 아닐까.’
아샤라가 짐을 챙겼다.
“오늘 성과는 좀 있었나?”
“……에휴, 글쎄요. 루이드 님은 읽히는 게 없어요.”
“꾸준히 하다 보면 뭔가 나올지도 몰라. 포기하지 말라고.”
“뭔가 얄밉네요. 루이드 님은 뭐든 금방 이뤄버리는 사람이잖아요.”
아샤라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똑똑.
아샤라가 문을 열려고 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재무관님!”
행정관 말칸이었다.
그는 굉장히 다급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지?”
“급히 보셔야겠습니다. 수치가…… 심상치 않아서요.”
말칸이 건넨 것은 수로에 대한 관리 대장이었다.
“흐음, 마를 대로 말라버렸군.”
루이드는 담담히 말했다.
가뭄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남작령은 수로를 이용해 풍부한 수원에서 물을 끌어다 쓰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마실 물과 농사에 지을 물이 부족하지 않았다.
이제 그 물조차 부족해진 시점이 온 것이다.
“이전에 재무관님이 일러주셨던 수치만큼 내려왔습니다. 계속해서 이대로라면, 앞으로는…….”
“괜찮아.”
“네?”
행정관의 얼굴이 걱정으로 뒤덮였다.
“괜찮아, 내가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루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똑똑.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재무관님, 루가데올 상단에서 데이슨이 왔습니다.”
“딱 맞춰왔네.”
“리듀!”
방을 뱅글뱅글 돌던 콘콘이 루이드의 품에 쏙 안겼다.
“자, 산책할까. 콘콘.”
“꺄! 저아! 리듀!”
루이드의 품에서 콘콘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행정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이드를 따라 나갔다.
아샤라도 그 뒤를 쫓았다.
탈드란 마을 출신 행정관인 말칸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리 루이드 님이시라지만, 이렇게 땅이 말라버렸는데 어찌하신단 말인가. 그 넓은 수원도 말라가고 있는데.’
이미 남작령 전체에서 포커드의 막내 공자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매년 풍작을 일으키고, 영지 이곳저곳에 깨끗한 물이 흐르게 하고.
땅속에서 금속과 보석을 캐 올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평민들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위기 앞에서 인간은 쉽게 불안해했다.
수많은 신화 속에서 여러 번 신의 말을 저버린 인간들처럼.
믿음은 한없이 연약했다.
루이드가 행사하는 모든 것을 봐온 말칸 마저 그랬다.
그런 말칸의 마음을 눈치챈 루이드지만, 그는 전혀 초조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 일은 이미 가뭄의 초기부터 생각하던 것.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루이드와 콘콘, 아샤라, 말칸이 들어섰다.
안에는 데이슨과 낯선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무관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나.”
루이드는 데이슨에게 인사를 건넨 뒤, 그의 곁에선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말간 얼굴을 가진, 훤칠한 키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치렁치렁한 고수머리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내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재무관님. 저는 멀티플 정령사. 멜리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