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
1화. 프롤로그
어둑한 공간의 끝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출구가 있었다. 남자는 그 출구의 위에서 이렇게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
【 New Game 】
생각할수록 황당한 일이었다. 단지 평소처럼 퇴근 후에 맥주를 마시며 게임을 즐기다가 잠들었을 뿐인데. 이 새카만 공간은 무엇이고 저 글자와 출구는 또 무어란 말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는 다른 길이 없었으니.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출구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눈부신 빛을 넘어서자 어딘지 낯익은, 척박한 중세의 풍경이 펼쳐졌다.
남자는 그렇게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지게 되었다.
산맥 너머의 거친 황야에서 온 야만전사의 몸을 가지고.
‘이게 무슨…….’
남자는 게임을 꽤나 오래 즐긴 플레이어였다. 수면에 얼굴을 비추어 본 후, 자신이 빙의한 전사의 정체를 즉각 알아차렸다.
‘……카딤?’
카딤. 황야의 아들, 두려움을 모르는 아탈라의 대전사. 게임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용사 일행 캐릭터 중 하나.
카딤의 육신은 현대인의 몸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건했다.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 사람보단 곰에 가까운 덩치,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체와 강철조차 능히 쥐어짤 수 있을 법한 팔뚝까지.
바깥세상에선 업무에 치여 헬스장도 못 가고 군살만 늘어가던 처지였다. 남자는 현실도 잊은 채 일순간 흥분에 들뜨고 말았다. 그러나 그 고양감은 얼마 가지 않아 증발했다.
여정을 겪으며 남자는 빠르게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만나는 자들 중 야만인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로에는 항상 괴물과 노상강도가 들끓어 푹 잘 수도 없었다. 요리는 죄다 짬통을 한 국자 퍼낸 듯한 것뿐이었다. 사람들의 위생 관념은 현대의 노숙자들조차 경악할 만한 수준. 부상을 입으면 뼈저린 고통이 파고들었고 사과나 약초 따위를 먹는다고 상처가 회복되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허우대만 멀쩡하지, 사실 카딤의 성능은 주역 캐릭터 다섯 중 최악이었다.
캐릭터마다 다르게 주어지는 어드밴티지, ‘고유 특성’.
카딤의 고유 특성은 다른 캐릭터들에 비하면 지극히 하자가 많았다. 캐릭터 분류를 귀족캐와 천민캐로 나눈다면 카딤은 단연코 후자에 속하는 캐릭터였다.
“…….”
그래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빌어먹을 게임 세상 속 이름도 모르는 농노로 빙의한 것보단 훨씬 나은 상황.
가진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고, 야만전사의 전투 기술을 몸소 체득하고, 대륙을 떠돌며 주역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동료로 맞이하면서 메인 스토리를 진행해 나갔다.
이 게임의 메인 스토리는 지극히 단순했다. 대악마를 퇴치하란 계시를 받은 용사가 동료들을 모으고, 동료들과 힘을 합쳐 마경(魔景)으로 가서 대악마를 무찌른다는 것.
스토리의 진행은 게임과 조금 달라졌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남자가 다른 동료를 모조리 모으고 곧장 용사와 합류했기에. 그래도 대악마를 퇴치한다는 핵심 줄기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륙을 가로질러 마경으로 향하는 길. 겨우 본격적인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 들어섰다. 그 무렵, 남자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바로 어떤 엔딩을 볼 것인지.
게임에선 용사의 행적에 따라 업보가 쌓이고 엔딩이 달라졌다. 선한 행동을 많이 했으면 ‘트루 엔딩’이 등장하고, 악한 행동을 많이 했으면 ‘배드 엔딩’이 등장하는 식으로.
물론 엔딩을 본다고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다만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떤 빌어먹을 절대자가 이 게임의 끝을 보길 바라며 자신을 여기에 집어넣은 거라면, 현실로 돌아갈 가능성이 더 높은 건 단연코 ‘트루 엔딩’ 쪽이라고.
문제는 현실이 된 게임 속 세상이 선한 행동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녹록지 않다는 점이었다. 강도에게 당하는 사람을 구해 줬더니 그놈이 강도질을 하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성인군자처럼 살아간단 말인가?
결국 남자는 결단을 내렸다.
‘엔딩에 영향을 미치는 건 주인공인 용사의 행적만이다. 업보에 내 행동은 포함되지 않아.’
용사를 대신해 모든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기로.
용사를 모함하는 자들의 아가리를 찢어 죽였다. 수프에 독약을 탄 여관주인의 머리에 도끼를 박아 넣었다. 용사가 자비를 베푼 도적들의 뒤를 쫓아가 후환이 없도록 모가지를 모두 토막 쳤다. 저항 의지를 잃은 괴물의 배를 반으로 갈라 버리고 안에서 쏟아진 알까지 전부 짓밟아 터뜨렸다.
도끼날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악귀와도 같은 삶. 닭 모가지 한번 내려쳐 본 적 없는 현대인이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냐. 철두철미하고 잔혹한 야만전사, 카딤이 저지른 짓이다.’
남자는 얄팍한 방어기제를 만들었다. 모든 게 자신이 아니라 ‘카딤’이 한 일이라고 되뇌며 피로 얼룩진 현실을 버텨 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남자의 사고방식은 결코 자신이 빚어낸 ‘카딤’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이고 괴물이고 마주하면 일단 죽일 생각부터 하는 자신을 향해 더없이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설상가상, 마경에 이르러 남자가 카딤의 고유 특성을 활용하기 시작하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카딤의 고유 특성, ‘피의 광전사’.
악마의 피를 마셔 일정 시간 특수한 버프를 얻는 대신 점차 제정신을 잃어가는 특성. 게임에선 단순히 디버프에 걸리는 식으로 표현됐지만 현실에선 뇌리에 파고드는 광기를 직접 감내해야 했다.
단검으로 악마의 동맥을 긋고 그 피를 수액처럼 마셨다. 버프가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악마와 맞서 싸워 머리에 도끼를 박았다. 악마가 숨을 거두면 또다시 동맥을 긋고 피를 수액처럼 마셨다.
남자, 카딤에게 서서히 부작용이 일어났다.
점차 야만인과 현대인의 정신적 경계가 흐릿해지고 광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신에게 선택받은 사제의 성법도,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 마법사의 마법도, 해주에 능통한 무녀의 주술도 소용없었다. 솟구치는 살의와 시시때때로 폭주하는 광증을 억누르기 위해 남자는 매일 쇠사슬과 구속 마법에 속박된 채 땅에 파묻혀 잠들어야만 했다.
몸도 마음도 누더기가 되어가는 여정.
이제 카딤의 육신 안에 퇴근 후 게임을 플레이하며 작은 안식을 찾는 회사원은 없었다. 오직 광기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광전사만이 남았을 뿐. 고장 난 등이 점멸하듯 이성이 돌아올 때마다 카딤은 이 끔찍한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단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나니, 세상에 영원한 건 결코 없는 법.
마침내 그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가 찍혔다.
푹 – !
대악마의 마지막 심장에 성검을 꽂아 넣고 거칠게 비틀어버리는 용사.
– 크하, 크하하하학!! 이런다고 네놈들 따위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
후 – 웅, 퍽!
카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대한 전투도끼로 대악마의 목을 내리쳤다. 떨어진 머리통을 짓밟아 터뜨려 버리자 대악마는 더 이상 그 오만하고 간교한 혀를 놀리지 못하게 되었다.
“허억, 허억…….”
“후우…….”
“…….”
일행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지독한 싸움이 끝났다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기에. 독기가 피어오르는 창백한 대지 위로 한동안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정적을 깬 건 쉼 없이 주문을 영창하느라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끄, 끝난 거야……? 이제 다 끝난 거야?”
양손을 바들바들 떨며 지팡이를 움켜쥐는 마법사.
눈가에 깊은 그림자가 지고 양 뺨이 홀쭉하게 패인 얼굴. 그녀에게서 더 이상 풋내 나는 소녀 마법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엘가께서 보우하사,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성호를 그으며 답하는 사제.
마경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멀끔했던 순백의 사제복은 거무튀튀한 적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저 지저분한 염료의 절반은 악마의 피고 절반은 사제 자신의 피였다.
“……카딤 님은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혹시 이성을 잃고 폭주하시진…….”
더듬더듬 땅을 짚으며 다가오는 무녀.
악마에게 두 눈을 잃은 그녀는 항상 자신의 육체적 결손보다도 카딤의 정신적 결손을 더 염려했다. 이유를 물어보면 매번 같은 신을 모시는 동족이기 때문이라 답했지만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
마지막으로 용사.
용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묵묵히 악마의 목을 쳐 버린 카딤을 바라보았을 뿐.
반면 카딤은 용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붙었다. 이랬는데도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함께 대악마의 피를 향한 갈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깨를 무지근하게 짓누르는 정적.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공백의 시간.
칠흑의 구름이 잿빛으로 물든 태양을 가로지른 후, 비로소 용사가 입을 열었다.
“이봐, 카…….”
한데 그 순간.
쩌저저적 –
질긴 가죽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간에 균열이 일어났다.
카딤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 않던 과묵한 야만전사가 전율로 온몸을 떨었다.
망설일 틈은 없었다. 균열을 향해 질주하는 카딤. 일행은 갑자기 일어난 기현상에 한번 놀라고, 아끼던 도끼조차 내팽개치고 달려가는 카딤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어, 야, 야!”
“카딤 님!”
“무, 무슨 일인가요? 카딤 님한테 무슨 일이……?”
동료들의 아우성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카딤의 머릿속엔 오롯이 현실을 향한 그리움과 귀환을 향한 갈망만이 남아 있었다.
허나 그의 앞길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용사가 양팔을 펼치고 소리쳤다.
“멈춰 서게, 카딤!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가려는 건가?”
“……비키게. 설명해 줄 시간 없네.”
“저 균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게 있나? 말해 주기 전까진 비킬 수 없다네. 기껏 함께 대악마를 물리쳤는데 동료를 또다시 위험에 처하게 할 순…….”
“만일 이렇게 시간을 끌다 저 균열이 사라진다면, 나는 대악마의 피를 마시고 자네의 골통을 부숴 버릴걸세.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옆으로 비키게나.”
농담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서슬 퍼런 협박. 야만전사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툭 불거졌다. 용사의 얼굴 위로는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카딤이 맨정신으로 이렇게 명징한 적의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기에.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야만전사는 용암을 품은 거산처럼 굳게 서 있었고 용사의 시선은 흩날리는 재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느 쪽이 패배할지는 이미 정해진 기싸움이었다.
끝내 굳은 얼굴로 자리를 비켜서는 용사. 다소 미안한 생각이 든 카딤은 용사를 곁눈질하며 작별인사를 남겼다.
“시간이 없어서 별다른 인사치레는 못 하겠군. 선의로 사람들을 구원하겠단 자네의 신념은 계속 지킬 가치가 있는 걸세. 이제 내가 없으니 더 힘들겠지만, 부디 초심을 잃지 말게나. 그리고…….”
“…….”
“……화면 너머로만 보는 게 아니라, 직접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네.”
“……뭐?”
쩌저저적 –
용사는 뜻 모를 작별인사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카딤이 들어서자마자 균열이 말끔하게 닫혀 버렸기에.
“…….”
“…….”
“…….”
대악마를 퇴치하는 위업을 이뤘으나 용사 일행은 그 누구도 희열에 들뜨지 않았다.
“카딤 님……? 카딤 님? 카딤 님!!!”
빛을 잃은 무녀가 처절하게 이름을 부르짖는 가운데, 모두가 동료를 집어삼킨 허공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
또다시 나타난 어둑한 공간.
이곳에 오는 건 두 번째지만 첫 번째와는 그 감회가 남달랐다.
카딤, 남자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야만전사의 광기는 씻은 듯 녹아내리고 현대인의 자아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실로 돌아가면 앞으론 죽어도 중세 판타지 배경의 게임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게임뿐 아니라 영화나 소설, 만화도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치안과 위생 관념이 개박살 난 세계와 독하고 비릿한 악마의 피 냄새는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돌아가는 대로 표면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시원한 캔맥주 하나 따서 마시고 빈대 한 마리 없는 뽀송뽀송한 침대에 누워 한숨 푹 자기로 했다.
‘동료들과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 하고 온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한다만…….’
동료들을 향한 남자의 감정은 상당히 오묘해졌다. 분명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인데 현실에서 그들은 고작 게임 캐릭터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인식과 앞으로 가져야 할 인식의 간극. 남자의 내면에는 강렬한 위화감이 휘몰아쳤다.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이젠 다시 만날 수 없는 녀석들이니까.’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영영 못 보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성의 있게 작별인사를 하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았다.
어둑한 길 끝에 희끄무레한 출구가 보였다. 아마도 지난번과 같이 저길 지나 현실로 돌아가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출구의 빛무리는 커졌다. 남자의 마음속 설렘도 커다랗게 부풀었다.
그런데 출구 앞에 도달한 남자는 즉시 들어서지 않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우뚝 멈춰 서는 남자.
얼굴 근육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 쳤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뻣뻣하게 당겨오는 등골, 아찔하게 흔들리는 시야. 뱃속에서 욕지기가 치밀고 내장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꿈이지?’
모든 게 허상이길 바라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다. 도무지 지금 이 상황을 맨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봐도 출구 위의 글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 New Game +】
허망한 눈동자로 하염없이 글자를 바라보는 남자.
이윽고 상스러운 욕설이, 객혈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니…… 씨이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