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아탈라의 심판 (4)
카딤은 대기 구역의 석재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다른 검투사들이 흠칫 놀라더니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피범벅이 된 몰골도 몰골이지만, 쇠창살 너머로 이전의 경기를 전부 지켜보았기 때문. 혼자서 24명을 도륙 낸 괴물과의 동석은 어지간한 담력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자도 있었다.
“수,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으리……! 그 많은 검투사들과 홀로 싸워 이기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일단, 그, 피부터 닦으시지요!”
던컨이 다가와 무명 천을 건넸다. 카딤은 무의식적으로 그걸 받아들었다가 슬쩍 눈썹을 오므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예?”
“밖에서 검투사들이 못 들어오게 막지 않았나?”
“어…… 몰래 들어오니까 안 막던뎁쇼? 제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습디다.”
카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인기척 숨기는 재주 하나는 여전히 일품이군. 천으로 피땀을 슥슥 닦고는 다른 손에 들린 건 뭐냐고 턱짓했다.
“그, 뭐냐 이건, 갈렌타나에서 샀던 포도주입니다요! 날씨가 많이 더워서 걱정했는데, 햇포도주라 그런지 쉬지도 않고 아주 적당히 익었습디다. 땀 흘려서 목이 타실 텐데 일단 한 모금 하시지요!”
피와 와인이라, 아주 환상적인 궁합이었다. 사양 않고 잔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찰랑이는 핏빛 액체를 내려다보는 찰나.
꿈틀, 날카로운 충동이 뇌리를 찔렀다.
카딤은 인상을 팍 쓰고 어금니를 갈았다. 그래, 제기랄…… 악마의 피를 마신 지도 시간이 좀 지났지. 그 거대한 까마귀 괴물을 처치한 후로는 한 방울도 입에 댄 적 없었다.
“저…… 왜 그러십니까, 나으리? 포도주에 무슨 문제라도……?”
괜한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내젓고 잔을 들이켰다.
던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시원하고 깔끔한 맛은 아니어도, 포도주는 적당히 익어 균형 있고 향기로운 풍미를 발했다. 한입에 다 마시고 숨을 내쉬자 진한 포도향이 훅 올라왔다. 비록 피를 향한 갈증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카딤은 입가를 쓱 닦고 던컨을 흘겼다.
“그래서, 할 말은 무엇이냐.”
“예? 아, 아, 그게…….”
용건도 없는데 이리 허둥지둥 왔을 리 없었다. 속내를 들킨 던컨은 우물쭈물대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으리, 그, 혹시, 제가 지난번에…… 주제넘은 짓을 한 건 아닌지요?”
“무슨 짓 말이냐.”
“투기장의 제왕, 그러니까 유빅 대단주님과 말씀을 나누는데 난입해서…… 나으리가 챔피언이 되면 황금을 달라 제안했던 것…… 말입니다.”
유빅은 푼돈 정도 내주는 것으로 착각한, 그러나 사실은 그를 파산시킬 만한 제안을 하여 속여먹은 것. 허락도 없이 그런 수작을 부린 게 마음에 걸려 비위를 맞추려고 헐레벌떡 달려온 모양이었다.
카딤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상관없다. 차라리 잘됐다 싶더군. 이전에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막대한 금은보화를 주기로 하지 않았더냐? 그만한 황금을 얻는다면 약속을 지키기에 충분하겠지.”
던컨은 근심을 떨쳐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어지는 말을 듣고 도로 우중충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걸 네가 들고 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
던컨은 어떻게 산더미 같은 황금을 들고 갈지 고뇌에 잠겼다. 그래도 카딤이 챔피언이 못 될 거란 걱정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카딤은 그 모습을 잠시 묵묵히 지켜보다, 불현듯 엄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 부호에겐 어떻게든 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예? 어째서입니까?”
“놈은 ‘투쟁’을 한낱 구경거리로 만드는, 이 빌어먹을 타락의 전당을 통해 배를 불렸다. 집어삼킨 고혈을 고스란히 토한다면 적절한 심판이 되겠지. 거기다 가짜 대전사도 처죽이고 ‘아탈라의 심판’까지 되찾으면…… 이 도시에서 처단해야 할 자는 딱 한 명 남는군.”
“……그, 그건 누구입니까, 나으리?”
“…….”
던컨이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카딤의 시선이 어둑한 저편의 구석을 향했다. 끝까지 그게 누구인지 답해 주는 일은 없었다. 던컨은 우물쭈물대다 눈치껏 자리를 떴다.
그렇게 행상인마저 내보내고 홀로 남은 공간.
천천히 일어나 안쪽으로 향했다. 대기 구역의 경계선을 벗어나 빛이 닿지 않는 폐쇄 구역에 이르렀다. 그곳의 정중앙, 일전에 찾은 고대 문자가 적힌 석판이 놓여 있었다.
카딤은 그 석판을 짓밟고 무거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듣고 있는가. 황야의 무녀여.”
되돌아오지 않는 대답.
“아탈라의 대전사가 돌아왔다.”
그럼에도 준엄하게 울리는 목소리.
“너는, 전령의 역할을 저버리고 대전사를 내쫓은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
아곤의 성난 뿔, 골타란은 눈살을 팍 찌푸렸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무녀여?”
“…….”
“뭔가 문제가 있다면 얘기를 하거라. 벌써 며칠째 그러고 있으면서 아무 일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설마 그대는, 아탈라께 간택받은 대전사를 기망하려는 건가?”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대는 오롯이 영약으로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거라, 대전사여…….”
만난 지도 벌써 근 20년. 골타란은 저 무녀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우 기가 세고 정력적인 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상한 일이 있었던 이후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녀는 벌써 수일째 가쁜 숨을 푹푹 내쉬며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마치 망각하고 있던 수백 살의 나이를 한꺼번에 먹기라도 한 것처럼.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는 조짐이었다. 골타란은 이미 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저자에게 많은 걸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무녀는 도통 사정을 속 시원히 털어놓질 않았다.
“혹여 그대의 육신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가? 아니면 이 유적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가? 혹은 바깥에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는가?”
“…….”
“제기랄! 말을 해 보거라, 말을! 그래야 나도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쾅 – !
골타란도 더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리쳤다. 빛나는 꽃망울과 수풀들이 나풀나풀 흔들리고, 반쯤 줄어든 금빛 웅덩이에 격랑이 일었다.
그런데 진동이 멎을 즈음, 무녀가 파뜩 허리를 펴고 천장을 응시했다.
혼탁한 눈동자에 새로운 우려가 덧씌워졌다.
“이런…… 맙소사.”
“……왜 그러지?”
“그, 그대의 동포들이 끌려가고 있다……. 자네가 언젠가 해방시켜 주기로 약속했던 노예들이…… 쇠사슬에 줄줄이 묶여, 매섭게 채찍질당하며 도시의 북쪽으로…….”
골타란의 이마가 포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반평생 투기장에서 분투한 이유는, 오롯이 아탈라인을 괄시하는 시선들을 척결하고 사로잡힌 동포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무슨 사정인진 몰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절대 가만둘 수 없었다.
골타란은 웅덩이에서 나와 물기를 털고 옷가지를 걸쳤다. 무녀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대전사여…… 지금 바로 나가려는 건가?
“그렇다.”
“지, 지금은 때가 좋지 않으니 나중을 기약하거라! 그대의 육신도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고, 밖에서 누굴 만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고, 그리고, 그리고 또…….”
“그러면, 계속 저 도랑에 누워 물장구나 치면서, 내 동포들이 팔려나가는 꼴을 방관하고 있으란 건가?”
“…….”
“……며칠이나 쥐새끼처럼 벌벌 떨고 있었던 이유는 돌아와서 다시 듣도록 하지.”
이윽고 뿔투구를 깊이 눌러쓰고, 검은 날을 빛내는 전투도끼를 굳게 쥐고 유적의 출구로 나섰다.
황야의 무녀는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들러붙은 살가죽이 노구를 옭아맸다. 그녀는 독물처럼 치밀어오르는 불안감을 꾸역꾸역 곱씹으며 간절히 기원했다.
제발, 자신이 만든 대전사가 ‘돌아온 대전사’와 충돌하는 일이 없기를…….
*
아곤의 교외 북쪽, 쩍쩍 갈라진 황무지의 살갗을 벗겨버릴 듯 뜨겁게 햇볕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살갗을 벗기고 핏물을 튀어 올리는 저 매서운 채찍질에 비한다면야.
“이 새끼, 빨리 안 가? 빨리 안 가?”
쩌억! 쩌억!
쇠사슬에 묶인 아이는 느꼈다.
척추에 소름이 쫙 끼치고 귓바퀴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감. 절로 어깨가 후들거리고 다릿심이 풀려버리는 탈력감. 등가죽을 통째로 벗겨내는 듯한 끔찍한 고통.
“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엄마아아아!! 엄마아아아아아아악!!”
“어쭈? 요놈 새끼! 요놈 새끼! 여기 니 엄마가 어딨어? 내가 니 엄마야? 내가 니 엄마야? 내가 니 엄마야?”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쩌억, 쩌억, 쩌억!
아이가 피범벅이 되어 널브러졌는데도, 감독관은 자비 없이 계속 채찍질을 했다. 줄줄이 묶여있던 다른 아탈라인 노예들은 인면수심의 패악질에 놀라 얼어붙었다.
보다 못한 늙수그레한 노예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 그만두시오! 그 애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요? 그리고 이런 짓을 한 걸 알게 되면, 대전사님께서 가만 있을 것 같소?”
아탈라의 대전사, 아곤의 성난 뿔.
그 이름은 의지할 데 없는 이 무력한 노예들을 지켜 주는 든든한 방패였다. 아무리 악독한 감독관이라 해도 그 이름을 듣고 긴장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감독관은 전혀 겁먹지 않고 되레 눈을 부라렸다.
“뭐야, 너…… 방금, 날 협박한 거냐?”
“그, 그런 건 아니지만…….”
“크흐흐흐…… 어이없네, 씨팔. 하여간 아곤의 성난 뿔이 야만인 놈들 버릇을 죄다 버려 놨단 말이지……. 그래서, 그 잘나신 대전사님께선 지금 어딨는데, 새끼야? 이미 도시 밖으로 나온 지 오랜데? 게다가 아곤에서도, 벌써 일주일 넘게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냐?”
“…….”
“하,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나서기는…….”
빈정거리며 다시 채찍을 드는 찰나, 배후에 드리워지는 짙은 그림자.
감독관은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걸 느꼈다.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오금이 저릿해졌다. 무언가 일이 터지기 전에 본능적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칠흑의 도끼날이 등짝을 내리찍었다.
퍼 – 걱!
“커흡! 커허, 허어…….”
“…….”
숨이 턱 막혀 컥컥대던 감독관은, 도끼질을 한 번 더 얻어맞곤 으스러진 척추를 훤히 드러낸 채 숨을 거뒀다.
골타란은 시체를 무심하게 걷어차고는 도끼날에 묻은 핏물을 닦았다.
“으허억! 아, 아곤의 성난 뿔이다!”
“이런, 제기랄! 뭐야! 잠적했다고 들었는데 왜 하필 이럴 때…….”
“허어억!! 튀, 튀어, 씨팔!”
제 발 저린 다른 감독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노예들은 감격에 차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오오, 대, 대전사시여!”
“대전사님! 대전사님이 드디어 돌아오셨어!!”
“대전사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채찍에 얻어맞은 아이는 아직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골타란은 피범벅이 된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느냐?”
“흐윽, 대, 대전사님……?”
말 못 할 고통에 사경을 헤매면서도, 아이의 눈동자는 별빛이 깃든 구슬처럼 말갛게 빛났다.
위대한 영웅, 자신의 찬란한 우상을 우러러보는 눈빛. 왜인지, 보고 있노라면 말로 표현 못 할 가책이 느껴졌다. 확신을 잃고 흔들리는 대전사는 도저히 그 눈을 오래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니다. 나는, 그런 시선을 받을 만한 자격이…….
골타란은 급히 다른 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너희들은…… 유빅 대단주의 노예들이군.”
“예, 예, 맞습니다, 대전사님…….”
“왜 저택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나온 거지? 분명 너희를 다른 곳에 넘기지 않기로 단단히 약속받았는데.”
유빅은 동족을 아끼는 골타란의 마음을 존중하여, 몸값을 받기 전까지 아탈라인 노예들을 다른 곳에 팔지 않기로 약속했다. 물론 그 실상은 챔피언을 제어하기 위한 목줄을 매어 둔 것이었지만…….
웅성거리던 노예들 틈에서 곧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건…… 저희들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단주님께서 어느 분께 저희를 넘겼다고 들었는데, 그분이 급전이 필요하여 저희를 처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
골타란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빤히 알면서 이렇게 많은 동족들을 남에게 넘겼다고?
이건 절대 다른 자가 원흉이 아니었다. 필시 유빅이 잠적한 자신을 불러내기 위해 꾸민 수작. 그렇지만 이런 짓을 벌이면 자신과 척지게 될 걸 유빅도 모르진 않을 텐데…….
투구 밑의 눈동자가 음산한 빛을 발하고, 얼굴 근육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허나 지켜보는 눈들과 마주치고는 조속히 표정을 숨겼다.
“……우선 아곤으로 돌아간다. 대단주와는 내가 직접 만나 얘기해 보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대전사님!”
노예들은 밝은 미소를 짓고 영웅의 뒤를 따랐다. 골타란은 한 손으론 피범벅이 된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론 도낏자루를 꾹 움켜쥐고 아곤으로 돌아가는 길을 앞장섰다.
만일 시답잖은 이유로 자신의 동포들을 팔아먹은 것이라면, 투기장의 제왕을 반 토막 내버리기로 결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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