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아탈라의 심판 (8)
카딤은 술잔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저놈이 포도주에 악마의 피를 타 놓았군.’
잡은 지 보름쯤 지난 원종 하급 악마의 피.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악마의 피를 섭취하면 보통 사람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으니, 독극물론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필 목표물이 자신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카딤은 술잔을 치웠다. 그래도 굳이 마실 필요는 없었다. 이런 잔수작에 의존하는 것만 봐도, 저 벽 뒤에 숨은 놈은 악마의 피 없이도 충분히 상대할 만한 피라미였다.
하지만 돌아서는 찰나, 묵직하게 뇌리를 때리는 충동에 의식이 흐릿해지고.
퍼 – 걱!
정신을 차려보니 술잔을 비우고, 경기장에서 상대의 머리통을 짓밟아 터뜨린 뒤였다.
“…….”
한동안 전혀 마시지 않아, 악마의 피를 향한 갈증이 너무 심해진 탓. 충동을 느낀 뒤론 도무지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직도 욕구가 남아 있었다. 마신 피가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하급 악마의 피였기에.
이것 가지곤 턱없이 모자랐다. 체내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악스럽게 갈망하고 있었다. 신경을 홧홧하게 자극하고 근육을 쥐어짜는 혈기를, 더 강력하고 독한 피를, 더 강한 악마의 피, 파멸적인 힘을 선사하는 고위 악마의…….
“나, 나으리…… 그…… 괜찮으십니까?”
카딤은 던컨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던컨의 얼굴은 평상시와 달랐다. 방금 죽인 검투사의 얼굴이 기괴하게 중첩되어 있었다. 걱정스레 눈꼬리를 내린, 그러나 골통이 다 터져 엉망진창 찌그러진 낯짝.
눈가를 문지르자 행상인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번에 나타난 광증의 환각은 얄팍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터질지도 모르니 방심할 순 없었다.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일단 물러나거라.”
“……예?”
“지병이 도졌다. 어서 뒤로 물러나고, 잠시간 아무도 이쪽에 다가오지 못하게 막거라.”
던컨은 휘둥그레 토끼눈을 떴다. 몇 번이고 괜찮냐고 도와줄 게 없냐고 묻다가, 결국은 뒤도 안 보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카딤은 시야를 닫고, 광증과 갈망이 완전히 가라앉기만을 묵묵히 기다렸다.
*
투기장의 제왕, 유빅은 명목상 카딤의 후원자였다.
수시로 목숨을 겁박당하는 등 정상적인 후원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만, 아무튼 유빅은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진 않았다. 자신의 저택에서 묵으며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준 것도 그중 하나였다.
대저택엔 호화찬란한 시설들이 즐비했다. 백 명도 넘게 동시 훈련할 수 있는 연무장과 호수에 견줄 만한 인공 오아시스, 극장처럼 화려하게 꾸며놓은 연회장, 피로를 풀어줄 노예들이 상시 대기하는 휴식실, 언제나 원하는 만큼 산해진미를 대령할 준비를 갖춘 식당…….
카딤은 다른 곳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용하는 건 오로지 커다란 목욕탕뿐이었다. 물이 귀한 지역이다 보니 경기 후 피땀을 씻어 낼 곳이 없었기 때문. 간신히 광증을 가라앉히고 돌아온 카딤은 이번에도 바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한데 안으로 들어서자, 전에 듣지 못했던 나긋나긋한 목소리들이 카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카딤 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목욕물을 미리 데워두셨습니다.”
“걸친 옷들은 이리 주시고, 먼저 욕탕에 들어가서 피로를 푸시지요. 저희가 몸을 씻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얄팍한 양모천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여인들.
동맹인과 북부인, 심지어 아탈라인까지도 섞여 있었다. 윤기 있는 구릿빛 피부에 긴 흑발을 늘어뜨린 늘씬한 아탈라인 여인이 대표로 앞에 다소곳이 섰다.
카딤은 무뚝뚝한 눈길로 그녀를 마주 봤다.
“너희들은 누구지.”
“저희들은 오늘 하루 카딤 님의 목욕 시중을 도와드릴 노예들입니다.”
“……그 단주 놈이 시켜서 온 건가.”
“예, 대단주님께서 카딤 님을 극진히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저희들은 개인적으로도 반드시 카딤 님께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카딤은 슬쩍 인상을 썼다. 그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동자가 잘 닦은 흑요석처럼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어제, 카딤 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까막눈이 사냥’에 동원된 노예들을 살려주셨지요? 여기 있는 자들은 전부 어제 살아남은 그 노예들의 육친입니다. 제 동생 또한 카딤 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 덕에 목숨을 건사하였지요.”
“…….”
“다른 비정한 분께서 출전하였다면 꼼짝없이 다들 혈육을 잃었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 뒤늦게나마 감사를 드립니다. 베푸신 크나큰 은덕에 비하면 볼품없는 몸이지만, 반드시 만족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슴께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이는 여인. 다른 자들도 그녀를 따라 일제히 꾸벅 허리를 굽혔다. 그 몸짓에는 분명 감사를 담은 진심이 실려있었다.
그러나 카딤은 무뚝뚝한 대답으로 응했다.
“필요 없다. 목욕 시중은 제 몸 하나 못 씻는 모지리들에게나 가서 들어주거라.”
“…….”
여인은 순간 당황하여 긴 눈꺼풀을 떨었다. 허나 곧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고 요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여 허락도 없이 찾아든 게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저희가 정말 씻는 것만 도와드리는 건 아닙니다. 투기장에서 활약하시는 동안, 고단한 피로와 못다 한 원기가 많이 쌓이셨을 줄로 압니다. 그 부정한 기운을 저희가 성심성의껏 해소시켜 드릴 테니…….”
“지금 부정한 기운이라 했나.”
“……예?”
“못 버틸 텐데. 그걸 건드리면 네놈들은 싸그리 다 죽을 거다.”
여인은 사내들 특유의 객쩍은 허세인 줄만 알고, 살풋 가벼운 미소로 응수하려 했다.
그러나 곧 카딤의 표정을 보고 그런 종류의 말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농담으로 들렸나?”
지독한 공포가 오금을 잡아챘다. 여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카딤은 싸늘하게 시선을 돌리곤 손을 휘저었다.
“물러가거라. 괜한 짓을 하다 해를 입기 전에.”
“죄, 죄송합니다. 이만 무, 물러나 보겠습니다. 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생각이 바뀌시거든, 어, 언제든 다시 불러주십시오.”
아탈라인 여인은 다른 여인들과 함께 도망치듯 물러났다. 홀로 남은 목욕탕. 카딤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옷을 벗고 얼룩진 피땀을 씻어냈다.
유빅이 무슨 의도로 이랬는지는 알 만했다. 저번 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으니, 어떻게든 자신을 묶어 둘 족쇄를 마련하려 머리를 굴린 거겠지.
하지만 의도의 불순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여인을 품에 안는 건 카딤의 정신에 있어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본능적인 욕구를 해소할 땐 이성이 얄팍해져, 광증이 날뛰기 매우 쉬워지기 때문. 그는 1회차 때처럼 무고한 여인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비단 여인들만 정신에 악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육즙이 줄줄 흐르는 고기들이나 달콤한 풍미를 그윽이 담은 술, 부드러운 비단옷과 구름처럼 푹신한 침대까지……. 대부호가 카딤의 호의를 사기 위해 마련한 모든 게 악영향을 줬다.
입에 달고 몸에 편한 것들은 항상 옛 기억을 상기시켰다. 저런 걸 무분별히 취한다면, 적들을 썰고, 찌르고, 베고, 자르고, 토막 내기 위해 칼처럼 바짝 벼려놓은 정신이 금세 썩고 녹슬어버릴 터. 카딤이 그동안 괜히 거친 음식과 잠자리만을 찾아다닌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침실에 놓인 것을 본 순간 거세게 흔들렸다.
“…….”
은백색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이슬, 운무처럼 흘러내리는 수증기, 입구에 푹신하게 피어오르는 하얀 거품.
캔맥주.
옛 기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시원하고 청량한 캔맥주가 탁상에 놓여 있었다.
저런 물체는 이스터 에그로도 있을 리가 없었다. 허상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홀린 듯이 잔을 움켜쥐었다. 냉감이 손바닥을 저릿하게 했다. 너무 차가워서 도무지 허상이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눈으로 맥주 캔을 응시했다.
정신이 저 깜깜한 밑바닥으로 잠겨 들고, 파묻어 둔 자아가 깨어났다.
남자는 사실 카딤이 아니라 현대인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마음이 무뎌지고 무너지기 전에 자신을 숨겼다. 항상 카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려 노력했다. 1회차에 이어 2회차까지 겪으며, 이젠 현대인의 자아를 어느 정도 깊숙이 파묻는 데 성공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정신의 기저엔 언제나 이런 방어기제가 깔려 있었다.
누군가를 보면 죽일 생각부터 하는 것, 숱한 인간들을 고기 토막처럼 썰어 버린 것, 악마의 피를 삼키고 광증에 미쳐 날뛴 것,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자신은 카딤이 아니라고.
그러나 이렇게 시원한 캔맥주를 갈망하는 정신과, 그에 조응하여 마른 혀를 달싹이는 육신을 관조하노라면, 어김없이 카딤과 자신을 분리하기가 쉽지 않단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캔을 슬며시 옆으로 기울였다. 거품을 피워올리던 황금빛 액체는 아스라이 흩어지고, 차가운 캔까지 신기루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이런 환상이 나타난 걸 보니 아직까지도 광증의 여파가 미진하게 남아 있던 모양.
남자는 맥주와 함께 잡념도 같이 흘려보냈다. 현실을 도피하고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결투가 머지않았다. 지금은 카딤, 그중에서도 대전사로서의 카딤에 충실해야만 하는 때였다.
가짜 대전사와 황야의 무녀, 그리고 투쟁을 모욕하는 타락의 전당을 심판하기 위해.
남자는 다시 자신을 파묻고 카딤을 일깨웠다.
아무래도 장소가 영 좋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호화로운 저택을 벗어났다. 날은 어느덧 이슥하게 저물었으나, 축제의 열기에 들뜬 도시는 잠들지 않고 어딜 가나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혹여 자신을 알아보고 귀찮게 구는 무리가 있을까 싶어 은밀히 외곽으로 벗어났다.
그리하여 다다른 적요한 황무지. 카딤은 커다란 바위 맡에 기대 사색을 곱씹다가, 문득 하늘을 마주 보았다.
엘가의 눈동자는 진작에 자취를 감췄고 달도 어둠에 파묻혀, 유리 파편처럼 흩어진 별들만이 총총히 빛나는 밤.
대전사의 심장이 전쟁 북을 두들기듯 둔탁하게 고동했다.
*
‘비열한 사냥꾼’이 죽은 이후, 아곤의 암시장에서부터 기이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악마 학살자가 악마와 계약하고 초인적인 힘을 얻었다는 소문.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절반 정도는 소문을 극구 불신했다.
“헛소리 좀 작작하라지! 악마들을 산더미처럼 죽인 용병이 어떻게 악마랑 계약을 한다는 거야?”
“악마 학살자!! 악마 학살자!! 악마 학살자!!”
“악마들을 물리치고 황금 가도를 구원한 영웅!! 패배를 모르는 투쟁의 화신!!”
“아곤의 성난 뿔의 시대는 끝났다!!! 모두 새로운 챔피언을 받들어라!!!”
그들은 이 검투사의 압도적인 무력과 어떤 적을 만나도 초연한 태도에 완전히 매료됐다. 괴소문 따윈 아랑곳않고, 그가 결승전에 이르러 챔피언을 꺾기만을 간절히 고대했다.
나머지 절반 정도는 소문을 절대 맹신했다.
“제기랄, 내 그럴 줄 알았지! 어쩐지 사람이 아니라 괴물처럼 싸우더라니!”
“저놈은 악마와 계약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놈이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악마 학살자! 악마의 힘이 없으면 네가 고블린만도 못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이건 조작이야! 경기를 모두 무효 처리해야 돼! 내 돈 돌려줘!!”
그들은 이 검투사가 악마의 힘을 빌어 투기장의 물을 흐리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널리 소문을 퍼뜨리는 데 일조하고, 그가 하루라도 빨리 패배당하고 죽기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거진 아곤 전체가 그 소문을 두고 반으로 갈렸다. 구경꾼들은 그나마 온건하게 으르렁댔지만, 돈을 따고 잃은 노름꾼들은 아예 칼부림까지 벌였다. 저잣거리에서 함부로 악마 학살자를 칭송하거나 욕하다간, 고개 돌린 순간 반대파들에게 짱돌로 뒤통수를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아무쪼록, 그 와중에도 본선 경기는 착실히 이어졌다.
뼛가루 분쇄자, 그물 포식자, 붉은 도살자……. 카딤의 칼과 도끼 아래 유명 검투사들의 목이 줄줄이 떨어졌다. 그렇게 본선도 막바지에 이르러, 이제 남은 경기는 단 하나.
챔피언에게 도전할 자를 선별하는 마지막 승부를 치를 때가 되었다.
경기 종목은 ‘무장전’. 규칙은 각자 원하는 대로 장비를 갖추고 일 대 일로 맞서는 것. 고대의 드워프들이 남긴 유물, 신의 축복이 깃든 축병과 신병, 마법사들이 만든 마도구까지. 어떤 장비든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어 유독 실력자가 꺾이는 이변이 많이 일어난다는 종목이었다.
그럼에도 카딤은 긴장하지 않았다.
붉은 칼과 회청빛 도끼, 지옥불로 타오르는 단검까지. 일신의 무력뿐 아니라 무기까지 뛰어난 걸 갖췄으니 패배할 걱정 따윈 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편이 챔피언에게서 ‘아탈라의 심판’이라도 빌려오지 않는 이상…….
한데 경기 시작 직전, 뜻밖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간만에 뵙겠습니다, 용병님. 축하드립니다, 벌써 결승전을 목전에 두셨군요. 경기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
황무지에서부터 동행했던 아곤파 의원, 아도니스.
카딤은 눈썹을 오므렸다. 한동안 안 보인다 싶었는데 뜬금없이 왜 찾아왔나 싶었다. 아도니스가 빙긋 웃으며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상대 검투사가 교체되었단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원래 상대였던 ‘운타나의 오우거’가 어제 기권했거든요. 아마 용병님께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하여간 그 탓에, 제가 초빙한 특별한 검투사가 대타를 뛰기로 다른 단주님들과 합의를 보았습니다.”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이런 얘길 이제서야 전해주다니. 카딤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졌다.
“……아곤의 성난 뿔이 바로 나오기라도 하는 건가?”
“예? 하, 하하…… 아쉽게도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 용병님께서도 마음에 드는 상대일 겁니다.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여러모로 용병님과 연이 깊은 자거든요.”
“…….”
“본래의 이명은 ‘불굴의 투사’였지만, 지금은 새로운 이명이 필요해 보이더군요. 용병님께서 직접 겨뤄보고 지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남은 경기 마저 잘 치르시고, 저는 슬슬 관중석으로 가보아야 해서 이만…….”
떠나는 의원은 분명 비뚜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카딤은 놈을 쫓아 모가지를 붙들고 무슨 개수작을 부렸냐고 닦달할까 했으나.
그 순간,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들려왔다.
대 – 앵!
“…….”
닦달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일단 이 무의미한 싸움부터 끝내고 나서. 어차피 무슨 수작을 부렸건, 어떤 놈이 나오건 큰 상관은 없었다. 목을 베고 배를 가르면 죽는단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
그리하여 입구를 넘어 경기장에 다다른 카딤은, 왜 의원이 저딴 소리를 한 건지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악마 학살자!! 악마 학살자! 악마 학살자!!”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환호하는 관중들도, 엄지를 바닥에 꽂으며 야유하는 관중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딤의 시선은 오로지 반대편에 선 상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문신으로 뒤덮인 탄탄한 육신, 고대 문자가 새겨진 칼과 도끼, 적요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오른손이 있어야 할 곳에 대신 달린 두꺼운 갈고리.
검투사가 갈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숨소리만큼 고요한 읊조림이 바람결에 실려 귓전을 희미하게 스쳤다.
“간만에 뵙소, 카딤 형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
“…….”
카딤은 얕게 입매를 떨었다.
그러곤 외팔이 전사, 페룬을 묵묵히 노려보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