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아탈라의 심판 (11)
금빛 꽃망울이 만연한 방. 녹음이 무성한 주술진의 중앙.
긴 세월 동안 한 자리만을 지켜 온 황야의 무녀가 눈을 부릅 치켜떴다.
“……!”
그녀는 투기장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내다보았다.
유적에 유폐된 무녀는 본디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 허나 그녀는 금지된 수단을 써서 방법을 마련했다.
‘황야의 뿌리’.
무녀의 육신에 심어 발동하면, 토지의 생명력을 빼앗고 주변 일대를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는 주물(呪物).
그 영향권은 모두 물이 마르고 땅이 척박해지니, 본질은 한없이 저주를 내리는 주물에 가까웠다. 허나 오직 황야의 무녀들에 한해선 효과가 강력한 축복으로 반전되었다. 그들은 메마른 땅에서 더 많은 신통력을 얻고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니까.
아주 오래전, 누군가 그녀에게 이 주물을 맡겼다. 단단히 봉인하고 누구의 손에도 못 들어가게 하란 당부가 있었으나, 그녀는 결국 주물을 사용하였다. 퍼져나간 황무지는 새로운 눈과 적잖은 신통력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유폐되었음에도 밖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간단한 주술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땅 위에서 사멸한 생명력을 끌어모아, 유적 안에서 ‘영약’의 원료를 재배할 여건까지 마련했다.
비록 그 대가로 아곤이 황폐화되고 수백 년간 한 자리에 머물러야 했지만, 무녀는 티끌만치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결코 바깥세상사를 알아내지도, 자력으로 ‘아탈라의 대전사’를 만들어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젠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절대 안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진짜 대전사’가 돌아왔다. 심판을 예고한 대전사는 초인적인 무력으로 앞을 막는 적대자들을 거침없이 쓰러뜨리고 있었다. 축복받은 무기로 무장한 아탈라인 전사마저도 패배했고, 어느덧 다음 상대는……
골타란, 자신이 길러 낸 ‘가짜 대전사’였다.
그가 심판당하면 다음은 필시 자신의 차례일 터. 무녀는 초조함을 못 이겨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객관적으로 당장은 골타란 쪽의 승률이 더 높았다. 그러나 만에 하나, 골타란이 ‘아탈라의 심판’을 잃거나 빼앗긴다면 이길 확률은 사실상 없었다. 그의 무력은 본신의 힘보단 그 파멸적으로 강력한 신병에 의존하는 면이 더 컸으니…….
신통력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그녀의 힘으로 대전사를 저지하긴 힘들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각인의 바늘’을 바치고, 골타란은 건드리지 말라 협상해 볼까 고민하는데……
문득, 무녀의 심상에 낯선 환상이 스며들었다.
“……으음?”
주변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펼쳐지는 메마른 황야. 그리고 태양을 등지고 우뚝 서 있는 전사. 처음에는 흔히 보던 황야의 환상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환상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무녀는 소스라치게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허업!”
생살을 찢고 나오는 시뻘건 무언가.
그 전사의 몸속에,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재앙이 깃들어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심장이 멎을 뻔했다. 무녀는 충혈된 눈을 치뜨고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허억…….”
경악을 추스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겨우 진정이 된 후엔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녀는 쪼그라든 주먹을 꾹 쥐고 단호하게 결심했다.
“……죽여야 해, 죽여야 해, 그 녀석을, 죽여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재앙의 근원’을 죽이고 골타란을 진짜 대전사로 만들기로.
*
페룬이 떠난 직후, 골타란이 처음 느낀 감정은 배신감과 분노였다. 허나 그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것으로 변모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
의식이 과거로 침잠했다. 회상 속에서, 그는 첫 출전을 앞두고 바짝 긴장한 풋내기 검투사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악…….’
‘……후욱, 후욱, 후욱.’
코끝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잠시 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관중들의 환호성이 지옥의 비명소리보다 끔찍하게 들렸다.
결국 부담감을 못 이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기 구역에서 발길이 닿는 대로 달아나다 우연히 폐쇄 구역에 이르렀다. 고대 문자가 적힌 석판을 발견하고 홀린 듯이 다가가 손을 얹자……
끄저저저저저적…….
……밀폐된 유적이 나타나고, 내면에 명징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아탈라의 대전사가 아니로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찾아온 거지?]’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단지 직감했다. ‘아탈라의 대전사’가 아니라고 말하면 여기서 바로 쫓겨나리라는 걸.
생각보다 혀가 먼저 움직였다.
‘아, 아니다. 나는 아탈라의 대전사다.’
‘[……어이가 없군. ‘아탈라의 대전사’가 무엇인진 알고 하는 소리인가?]’
‘그, 그렇다. 나는 아탈라의 대전사가 맞다. 시, 시험해봐라. 어떻게든 증명해 보이겠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시련을 줄 테니 재주껏 통과해 보거라.]’
시련은 지독하게 끔찍하고 가혹했다. 투기장에서 싸우는 것 따위보다 훨씬. 전투가 끝날 즈음, 그는 손뼈가 다 으스러지고, 광대뼈가 함몰되고, 관절이 거꾸로 뒤틀리고, 배꼽 밖으로 튀어나온 창자를 구경하게 되었다.
‘끄아아아악! 끄윽, 끄흐흐흑…….’
그럼에도, 죽지는 않았다. 기지와 천운으로 살아남아 시련을 통과했다. 노쇠한 무녀는 산송장이 된 그를 주술진 앞으로 소환하곤 형형하게 눈빛을 빛냈다.
‘내 눈이 틀렸군. 네 말이 옳다. 너는…… 아탈라의 대전사가 맞군.’
‘끄아아악, 허억, 으허억, 으허어어…….’
‘그만. 징징대는 소리는 거기까지만 하고, 저기, 금빛 웅덩이에 몸을 담궈라. 신묘한 영약이 모든 부상을 치유해 줄 것이다. 그리고 회복을 마치면, 이걸 가져가거라.’
‘끄으으윽, 허억, 허억…… 그, 그 도끼는 무엇이지?’
‘이건 바로, 선대 대전사가 남긴 위대한 신병…….’
황야의 무녀는 ‘아탈라의 심판’을 내어 주고, 대전사로서 알아야 할 지식들을 전승해 주었다.
그 이후, 골타란의 삶은 달라졌다.
죽음이 무서워 달아난 겁쟁이 검투사에서, 존엄한 투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아탈라의 대전사’로.
신분을 세탁하고 유빅의 후원을 받아 화려하게 다시 데뷔했다. 투기장의 챔피언으로 승승장구하고 어려운 처지의 동족들을 구해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어느샌가 옛 기억은 흐릿해져, 본인 스스로도 ‘아탈라의 대전사’란 정체성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행상인이 심어 놓은 의심은, 자신의 것이 아닌 칭송을 곱씹으며 자라났고, 광인을 향한 분노로 덮일 뻔했으나, 떠나가는 부하의 일침을 듣고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부풀어 올랐다.
설상가상, 이젠 악마 학살자를 향한 분노마저도 정당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유빅 대단주가 아탈라인 노예들을 남에게 넘긴 적이 없다고?”
“예, 그렇습니다, 대전사님. 악마 학살자가 노예들을 인계받았단 증거는 다 조작된 겁니다. 아무래도 그들을 아곤 밖으로 끌고 간 건 대단주의 독단 행동인 듯합니다…….”
“…….”
분노가 싸늘하게 식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골타란의 머릿속에 지나가듯 들었던, 혹은 뇌리에 단단히 박힌 말소리들이 무질서하게 휘몰아쳤다.
‘그 도끼, 내 것이로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싸워 온 진짜 아탈라의 대전사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골타란 님께서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돌아왔을 리가 없지, 돌아왔을 리가 없어. 암, 그럴 리가 없다…….’
모든 정황과 증언이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골타란은 서둘러 유적으로 찾아갔다. 언제나 그렇듯, 늙수그레한 무녀가 주술진의 중앙에 앉아 그를 맞이해 주었다.
“무녀여…… 그대는 이미 모든 걸 보았고, 모든 걸 알고 있었겠지.”
“…….”
세월의 먼지로 얼룩져 탁하게 물든 눈동자. 늘상 보아온 눈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어쩐지 더없이 낯설게 보였다. 골타란은 마른침을 삼키고 잘근거리던 말을 뱉었다.
“묻겠다.”
“…….”
“나는 그대가 오랜 기다림을 못 견뎌 만든 ‘가짜 대전사’이고…… 악마 학살자가 홀연히 사라졌다던 그 ‘진짜 대전사’인가?”
무녀의 부연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그 파문은, 괴괴한 이채에 뒤덮여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철판을 우그러뜨리는 듯 묵직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니, 그자는 대전사가 아니다. 투신의 뜻을 대행할 아탈라의 대전사는 오직 그대뿐이다.]”
“……그러면, 그대가 며칠동안 그리 불안에 떨었던 이유는 무엇이지?”
“[그건, 그자가 바로 끔찍한 재앙을 품은 ‘재앙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재앙에 맞설 유일한 희망인 그대의 육신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노구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지.]”
골타란은 눈초리를 흠칫 떨었다. 불현듯 악마 학살자가 광인처럼 날뛰고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켰던 기억이 떠올랐기에.
그렇지만 먼저께 행상인이 언급했듯, 그자가 재앙만 일으켰던 건 아니었다.
“과연…… 그 말을 확언할 수 있겠는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중심 악마의 낯짝조차 보지 못했다고. 정황상, 악마의 숨통을 끊고 동맹을 구원한 건 틀림없이 먼저 와 있던 그자…….”
“[네가 먼저 말하지 않았느냐.]”
“……음?”
“[네가 먼저, 내게 와서, 똑똑히 말하지 않았느냐. 자신이 거악을 멸하고 세상을 구원할 ‘아탈라의 대전사’라고. 그런데 대체 왜,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는 거냐.]”
천불처럼 타오르는 시선. 골타란은 침묵했다. 고뇌에 잠겨 입술을 짓씹다가, 마침내 해묵은 진실을 토하려는 순간.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무녀가 정색하며 말을 끊었다.
“[닥쳐라.]”
“……뭣?”
“[그만, 징징대는 소리는 거기까지만 하거라. 명색이 대전사란 자가 부화뇌동하는 꼬락서니를 보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구나……. 대체 몇 번이나 더 말해 줘야 확신을 갖겠는가? 그대가 아탈라의 대전사다. 그대가 아탈라의 대전사다. 아탈라의 대전사다! 아탈라의 대전사다!! 아탈라의 대전사다!!! 그대가, 아탈라의 대전사라고!!!]”
악에 받친 목소리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혼탁한 동공에 누런 광기가 깃들었고, 주름진 낯짝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골타란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무녀여…… 그대…… 제정신이 아니로군……? 이게 지금, 무슨 짓거리…….”
“[그대만이 아탈라의 대전사다. 그대만이 투신의 뜻을 실천할 유일한 대행자다. 대전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널 진짜 대전사로 만들어 주겠다. 기다려보거라, ‘재앙의 근원’을 척결하고 진정한 대전사로 거듭날 힘을 줄 터이니…….]”
쿠구구구구…….
판석이 거칠게 떨렸다. 주술진에서 칙칙한 섬광이 터져나왔다. 불길한 직감을 느낀 골타란이 황급히 도끼를 쳐들었으나, 무녀가 주술의 시전을 마치는 게 더 빨랐다.
구우웅, 구우우우 –
혼탁한 빛줄기가 골타란을 에워싸고, 독사처럼 꿈틀거리며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
아곤에서 다소 동떨어진 황무지의 밤. 이제 저 도시를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야만인과 행상인, 두 사람은 간만에 밖으로 나와 식사를 같이 했다.
카딤은 포도주를 한잔 들이켜곤 물었다.
“네가 보기에, 아곤의 성난 뿔은 어떤 녀석이었나.”
던컨은 어깨를 흠칫 떨고 입을 열었다.
“어, 뭐…… 벼, 별것 아닌 조무래기였습니다……. 아탈라의 대전사를 사칭하기나 하고……. 저 같은 행상인에게 패배하기나 하고…….”
“뭐라 말해도 타박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하도록.”
던컨은 우물거리다가 결국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 후우…… 제가 보기엔,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디다. 뭔가,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말만 나눠도 압도되는 위엄이 있더군요……. 어려운 처지의 동족들을 돕고 노예들을 구해주는 등 인망까지 좋아, 저도 뭣도 몰랐다면 대단한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무력도 사람보단 악마나 괴물에 가까웠습니다. 처음 솔타나에 들어설 땐, 무려 도끼질 한 번으로 성문을 쪼개고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나으리 말고는 그만큼 강한 인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요…….”
“…….”
“제가 그자에게 맞서 이긴 건…… 아니, 사실 이긴 것도 아닙죠. 그건 순전히 그자가 만신창이가 되고 방심한 덕에 싸우는 시늉이나 낼 수 있던 겁니다. 그자가 마음만 먹었으면 바로 저를 곤죽으로 만들었습겠죠…….”
‘아탈라의 신기’를 둘렀다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카딤. 던컨은 힐끔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아첨을 덧붙였다.
“아, 물론 나으리가 훨씬 대단하지만 말입죠! 어휴, 왜 아곤의 성난 뿔이 악마를 죽였단 헛소문이 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놈이 중심 악마를 만났다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되었을 텐데……. 분명 내일 경기는 나으리가 승리하실 테니 아무 걱정 마십쇼!”
앞선 말을 싸그리 상쇄하는 태세 전환. 자갈 같은 눈깔 속에서 황금을 향한 열망이 반짝반짝 빛났다. 카딤은 희미한 실소를 터뜨렸다가, 도로 입매를 굳히고는 물었다.
“……놈이 어떻게 ‘아탈라의 심판’을 손에 넣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더냐?”
“아탈라의 심판……? 아, 그 시꺼먼 도끼 말입니까? 예, 어떻게 얻었는지 말을 않았습니다만, 그…… 뭐냐, 황야의 아버지와 선대 대전사의 의지가 깃든 신병(神兵)이라며…… 함부로 손도 못 대게 했던 것만은 기억납니다만…….”
“…….”
우연히 주운 것이라면 그런 유례를 알 리 없었다.
‘역시, 그 또한 황야의 무녀가 넘겨 준 것인가…….’
아곤의 성난 뿔에 관한 의문들은 대강 조각이 다 맞춰졌다. 이제 남은 일은 놈을 꺾고, 신병을 되찾고, 진실을 대조하고, 심판을 내리는 것뿐.
썩 쉬운 싸움은 아닐 터였다. ‘아탈라의 심판’은 터무니없이 파멸적인 힘을 선사하니까. 그러나 쉬운 싸움만 할 거라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카딤은 목을 뚝뚝 풀고는 각오를 굳게 다졌다.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군. 자리를 정리하거라, 던컨.”
“옙, 알겠습니다, 나으리!”
두 사람은 유빅의 대저택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침내 결승전, 챔피언과의 결판을 지을 날이 밝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