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아탈라의 심판 (16)
무녀는 낡은 꿈을 꾸었다.
햇살이 찬란했다.
너무나, 찬란했다. 시나브로 퍼지는 빛무리, 살결을 따스하게 간지럽히는 온기, 눈을 감아도 발갛게 보이는 광채. 심장이 콩닥콩닥 투정 부리듯 발길질을 했다. 저 빛을 눈동자에 담아 가져갈 수 없다는 게 못내 안타까워서.
저 볕은, 무녀가 살아생전 볼 수 있는 마지막 볕이었다.
“…….”
잔상이 알알이 찍히도록 보고 나서야 눈길을 거두었다.
발치에는 고대 문자 석판, 곁에는 그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자들이 서 있었다.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은 황야의 무녀들. 벌써 95명의 무녀들이 대륙 각지의 유적에 유폐되었고 이젠 자신을 비롯한 5명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황야의 무녀가 서 있었다.
두 눈을 잃었지만, 두 눈이 있는 자들보다 아득히 많은 걸 보는 여인. 아탈라의 대전사를 도와 대악마를 토벌한 불세출의 영웅. 그리고 대전사를 기다리는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우고 이행한 자.
맹안의 무녀, 시릴.
허리까지 늘어진 하얀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백금의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얼굴의 절반을 다 해진 헝겊으로 가리고도 신비로운 분위기와 고고한 미색은 빛바래지 않았다. 잇따른 강행군으로 며칠새 양뺨이 부쩍 홀쭉해지고 말았지만…….
시릴은 아무런 내색 없이 무녀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떨리죠?”
무녀는 그녀가 보지 못한단 걸 알면서도 도리질을 했다.
“아니요. 오히려…… 기쁜 마음입니다. 드디어 먼저 떠난 자매들처럼 신성한 사명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시릴의 가느다란 입술이 착잡한 호선을 그렸다.
“미안해요, 이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해서……. 결코 쉽지 않은,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거예요. 그래도 수백 일, 수천 일, 수만 일…… 가없는 세월을 인내하다 보면 반드시 그분이 오실 테니 부디 확신을 잃지 마세요. 만일 기다림을 견디기 버겁거든, 제 이름을 얼마든지 원망하고 저주해도 좋으니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맹안의 무녀님. 무녀님께서도 제 이명이 무엇인진 잘 아시잖아요?”
그녀의 이명은 ‘인내의 무녀’. 남들보다 지루하고 힘든 일들을 몇 곱절은 잘 견뎌 붙은 이명이었다. 어쩌면 이 사명 자체가 꼭 그녀를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릴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위로 솟았다.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어제 다른 분들과 상의한 끝에…… ‘각인의 바늘’과 함께 그대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들을 맡기기로 했어요.”
시릴의 손길이 허공을 살짝 스쳤다. 한 줄기 미풍이 불고, 어느새 눈앞에 뿌리처럼 생긴 주물과 칠흑의 도끼가 놓여 있었다.
무녀는 휘둥그레 토끼눈을 떴다.
“매, 맹안의 무녀님……? 이것들은……?”
시릴은 간략히 설명을 덧붙였다.
왼편은 ‘황야의 뿌리’. 지극히 위험한 주물이니, 단단히 봉인하고 절대 누구의 손에도 못 들어가게 지켜라. 오른편은 ‘아탈라의 심판’. 대전사가 돌아오면 필시 이 무기를 찾을 테니, 잘 보관하고 있다 꼭 내어주도록 하라.
무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초리를 떨었다.
“어째서…… 이토록 중요한 물건을 제게 맡기시는 거죠? 이것들은…… 맹안의 무녀님께서 직접 보관하시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은데…….”
“…….”
빛을 잃고 끝없는 어둠을 헤매던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무녀는 그 미소에서 형용할 수 없이 거룩한 정취, 지워지지 않는 애달픈 그리움, 그리고 잘 개어 놓은 수의처럼 말끔히 갈무리된 회한과 체념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의 것과 같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만큼이나 살아있는 자들을 번민하게 만드는 명제가 있을까요? 황야의 계율은 전사와 무녀들이 죽으면 전쟁과 연회가 끊이지 않는 천국으로 갈 거라 말하죠. 그렇지만 마경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긴 밤을 지새는 동안, 대전사님과 저희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어요.”
“…….”
“언젠가 해가 저물지 않는 들판에서, 달처럼 미소 짓고 다 함께 만나자고.”
“…….”
“……설령, 누군가 먼저 생의 여정을 다한다 하더라도.”
무녀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시릴은 빛을 담을 수 없는 눈으로 머나먼 태양을 우러러보았다.
“황야의 아버지께서 계시는 천국도 좋지만…… 결국은 모든 그리운 이들이 모이는, 그런 곳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요? 먼 훗날 그대가 사명을 다하는 날, 그때 그대도 그곳으로 와 재회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
소리에 탁하게 잡음이 끼었다. 손때를 너무 많이 탄 고서처럼 기억의 편린이 해어지고, 정신이 의식의 수면 위로 급격히 부상했다.
“……허윽.”
다시 눈을 떴을 때, 무녀는 아득한 세월을 뛰어넘어 아탈라의 대전사와 대면하고 있었다.
*
콰르르르르르…….
마지막 바위 거인까지 쓰러졌다. 유적의 잔영들도 다 사라졌다. 카딤은 신기를 거두고 무녀에게 다가갔다. 무녀는 망가진 고대의 흉상 같은 몰골이 되어 있었다.
“…….”
먼지가 된 허리 밑에서 영롱한 섬광이 번뜩였다. ‘각인의 바늘’, 틀림없이 시릴이 만든 주물이었다. 카딤은 즉시 그것을 주워 철 수통 안으로 담갔다.
피를 거머삼키고 짙붉게 달아오른 바늘 촉, 오른편 복부맡에 찔러넣었다. 살갗에 풀어진 혈기가 날카로운 형상을 빚어냈다. 이전보다 강하고 독한 피라 그런지, 서리서리 획을 뒤틀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감각이 아득해졌다.
그래도 인고의 시간이 길진 않았다. 잠자코 기다리자 안정되는 형상.
카딤은 무녀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페빌라투스의 문신’을 무사히 새기는 데 성공했다.
“후우…….”
고무적인 성과였다.
지금부턴 횟수 제한 없이 육신을 1회차 때로 되돌릴 수 있었다. 게다가 신기를 불러내면 광증에도 면역이 생기니, 어느 정돈 폭주할 우려 없이 ‘1회차의 힘’만을 끌어 쓰는 것도 가능해졌다.
물론 그것이 광증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진 않았다.
신기 역시 대가 없는 힘이 아니다. 오래 쓰면 반드시 부작용으로 육신이 붕괴한다. 더군다나 그 부작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더 강해지고, 그 강도가 낮아지려면 기나긴 대기 시간이 필요하다. 즉, 무한히 유지하며 광증에 상시 면역을 얻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
애초에 신기만으로 완벽히 광증을 다스릴 수 있었다면, 1회차에 그토록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 터.
‘그렇다 해도…….’
광증을 제어할 고삐를 하나 마련했고, 이전과 비교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무력이 생겼단 것만은 명징한 사실. 바야흐로 어쭙잖은 고위 악마 정돈 가볍게 찢어죽일 만한 무력을 손에 얻었다.
또한 외적인 성과보다 눈부신 건 정신적인 성장이었다. 전사의 자아를 긍정하고 모든 업보를 짊어짐으로써, 그는 해묵은 내면의 갈등을 완전히 끊어냈다. 더 이상은 자신의 행적을 부인하거나, 신기를 못 불러내거나, 환상으로 캔맥주 따위를 보고 흔들리는 일은 결단코 없을 터였다.
이 또다른 세계에서, 투쟁의 사명을 다하는 날까지.
“……허윽.”
죽은 줄 알았던 무녀가 정신을 차렸다. 카딤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독기가 다 빠진 쇠잔한 육성이 들려왔다.
“쿨럭, 정말…… 대전사님이 맞으셨군요……. 끌끌끌…… 이렇게, 웅혼한 신기는…… 난생처음 봅니다……. 아무래도, 저희를 떠나신 데에는…… 저 천상의 아탈라께서도 인정할 만한…… 연유가 있으셨나 봅니다…….”
“알아채는 게 너무 느린데.”
“그러게…… 말입니다, 끌끌끌……. 그토록 고대하던 만남이……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쿨럭, 쿨럭……. 이래서야 도무지…… 맹안의 무녀님을 뵐…… 면목이 없겠군요…….”
“…….”
“각설하고…… 입이 백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노욕과 아집이 눈을 가리워…… 그릇된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 미련한 노구의 과오를…… 깊이…… 사죄드립니다…….”
“돌덩이들을 부리며 길길이 날뛰기 전에 했어야 되는 사죄로군.”
퍽 – !
“……크헙!”
카딤의 발길이 무녀를 찍어눌렀다. 흉골이 바스라져 가슴팍이 움푹 주저앉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녀의 낯을 건조하게 내려다보다, 슬며시 발을 떼고 그 앞에 앉았다.
“정말로 미안하다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보거라. ‘아탈라의 심판’은 시릴이 네게 맡긴 건가? 그걸 네가 아곤의 성난 뿔에게 전달한 거고? 이 일대를 황야로 만든 것도 네 짓거리인가?”
“쿨럭, 쿨럭, 후우……. 예, 모두, 모두 맞습니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길 잠시, 무녀는 하나하나 답변과 얽힌 사연을 전부 털어놓았다. 대답을 들을수록 카딤의 면면에 드리운 그늘이 짙어져 갔다.
“그렇다면…… 시릴은 어떻게 된 것이냐. 너에게 그것들을 맡기고 시릴도 유폐를 택했나?”
“맹안의 무녀님은, 아마도…… 그러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분께선 이미…… 삶을 정리할 각오를…… 마치신 듯 보였습니다. 외람되지만…… 세상에 남으셨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
카딤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먹먹하게 밀려드는 감정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질끈 쥐고 손가락이 으스러진 왼손을 덜덜 떨다가, 겨우 속내를 추스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네놈은 왜 나를 ‘재앙의 근원’이라 부른 거냐?”
무녀는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고뇌하다 어렵사리 대답을 털어놓았다.
“환상을, 환상을 보았습니다. 지독하게…… 불길한 환상을……. 대전사님의 살갗을 찢고, 그 안에서 끔찍한 재앙이 튀어나오는…… 환상이었습니다……. 혹시 이곳을 떠나셨던 사이…… 그 육신에 무언갈 봉인하셨습니까?”
“…….”
카딤은 슬쩍 턱을 쓸었다.
처음엔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는데 떠오르는 게 있었다. 고위 악마, 페빌라투스를 죽이고 광증에 빠졌을 때 본 환상. 구덩이를 파헤쳤더니 튀어나온 악마의 피보다 시뻘건 윤곽.
그렇지만 그것의 정체는 카딤도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떠난 사이 뭔가를 봉인했냐니, 1회차를 마치자마자 2회차를 바로 시작했는데? 짚이는 게 있냐고 되물어 보았으나, 무녀 역시 아무것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뭔가 정보를 얻을 줄 았았더니 의문만 늘어나고 말았다.
그래도 알아낼 수 있을 만한 건 다 알아냈다.
가만 내버려 둬도 어차피 죽을 테지만, 대전사는 그런 끝맺음을 원치 않았다. 손수 심판의 방점을 찍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이 무엇이냐.”
“…….”
“네놈은 영혼까지 멸살당해 마땅한 과오를 저질렀다. 허나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받았을 고통을 참작하여, 그 이름만은 기억해 주도록 하지.”
황량한 입가가 쓰디쓴 고소로 갈라졌다.
“노구는…… 까마득한 세월을 헤매다…… 제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다른 청탁을 하나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염치없는 것도 유분수다. 칠흑의 도끼가 무자비하게 위로 치솟았다. 무녀는 부스러진 팔로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 제발! 제발 골타란만은! 아곤의 성난 뿔만은 살려 주십시오……. 누군가 칼부림을 벌였다면, 그 칼자루를 쥔 자에게만 죄를 물어야 할 줄로 압니다……. 주인의 뜻대로 휘둘린 칼에게 대관절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카딤의 미간에 짙은 구김이 졌다.
“……어이가 없군. 아곤의 성난 뿔이 제 스스로 생각도 할 줄 모르는 천치란 건가?”
“예, 예, 맞습니다! 그는 그저, 노구의 간특한 꾀임에 넘어간 천치에 불과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 핍박받는 동족들을 구하고 싶어, 저를 진짜 대전사라고 착각한, 나약하고 우매한 천치에 불과하오니…….”
“…….”
“모든 죄업은 노구가 짊어지겠습니다……. 그 어떤 매서운 채찍질도 감내하고, 지옥의 밑바닥에라도 기꺼이 처박히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골타란만은, 골타란만은 살려 주십…… 쿨럭, 쿨럭, 쿨럭…….”
카딤은 강판처럼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잠연히 고민하다 도끼날을 무녀의 코앞에 들이밀고 턱짓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각오를 입증하란, 그 의미가 명백한 몸짓.
무녀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토 한 마디 달지 않았다. 그저 골타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내다보고,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을 따름.
‘언젠가…… 들판에서…… 미소 짓고…… 만날 수 있기를…….’
가냘픈 혼잣말을 속삭인 뒤, 무녀는 주저 없이 도끼날에 이마를 처박았다.
퍼거거걱 – !
바싹 마른 살갗이 바스라지고 골통이 벌레 먹은 장작처럼 쪼개졌다. 어찌나 처박은 힘이 거셌는지, 머리를 넘어 아예 등짝까지 일자로 갈라졌다. 장구한 세월을 지샌 육신이 먼지가 되어 부질없이 흩어졌다.
후우우우우웅…….
카딤은 아주 희미하게 입매를 떨었다. 허나 이내 별 감흥도 없이, 도끼날에 붙은 마른 살 조각을 훌훌 털어냈다. 그러곤 아곤의 성난 뿔, 골타란 쪽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놈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광폭화는 진작 풀렸고, 부상도 거의 다 나아 있었다. 그 사이 영약으로 목욕이라도 한 걸까. 카딤은 모든 소란으로부터 비껴 나간 듯 태평하게 널브러진 가짜 대전사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무녀는 이자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각오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카딤은 아직 처분을 확정하지 않았다. 기실 무녀의 목숨은 딱 재고할 여지를 주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고심하던 중 문득, 그동안 굳게 지켜온 행동 원칙이 떠올랐다.
절대 후환을 남기고 떠나지 마라.
조력자, 칭호, 지위, 명예, 무기……. 자신이 모든 걸 잃었단 걸 깨달았을 때, ‘아곤의 성난 뿔’은 과연 그 사실을 뒤끝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일까?
“…….”
카딤은 결단을 내렸다.
퍼 – 걱!
도끼날이 가차 없이 가짜 대전사의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