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아탈라의 심판 (17)
골타란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크허어어어억!”
두개골이 쪼개질 듯 얼얼한 고통, 절로 콧잔등이 짜글짜글하게 구겨졌다. 정말로 머리가 나뉜 줄로만 알고 황급히 정수리를 더듬거렸다.
다행히도 머리가 나뉜 건 아니었다. 갈라진 건,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뿔투구.
반토막 난 투구가 좌우로 툭, 툭, 떨어졌다. 골타란은 얼떨떨히 눈길을 쳐들었다. 칠흑의 도끼를 앗아간 장대한 신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 네놈…… 네놈은…….”
퍽 – !
“……커헉!”
우악스러운 발길질이 몸뚱이를 도로 눕혔다. 카딤은 무릎으로 골타란의 명치를 무겁게 짓누르고, 목울대에 도끼날을 바짝 들이밀었다.
“머리통에 뿔이 안 달렸으니, 이젠 아곤의 성난 뿔이라 부르기도 좀 그렇군.”
“크흐윽, 이게, 무슨 짓거리…….”
“기억나는 건 어디까지지. 신기를 두르고 여기서 난동을 부렸던 건 기억하나?”
골타란의 눈매가 흡, 뜨였다.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기억. 흔들리는 동공 속에 폐허가 된 투기장과 둔덕을 이룬 시체들이 담겼다. 힘겹게 나온 목소리가 촉새의 울음처럼 가느다랗게 떨렸다.
“내가, 내가…… 이곳을, 저들을, 이렇게 만든 건가?”
“절반 정도는.”
“아니…… 그렇지만…… 분명 신기는 모든 해악과 저주를 면케 할 텐데…… 왜, 왜, 내가 정신을 잃고 이런 끔찍한 짓을…….”
“…….”
무녀가 건 ‘광폭화’ 주술은, ‘광증’과 달리 디버프가 아니라 버프였다. 이성만 없애고 끝이 아니라 전투 능력을 월등히 증폭시켜 주니까. 대가가 저주에 가깝다 하더라도 본질이 축복이라면 면할 수 없다는 게 신기의 맹점이었다.
카딤은 그런 부연 설명을 친절하게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핏물이 배어 나오도록 도끼날을 살갗에 꾹 짓누르고 스산하게 읊조렸을 뿐.
“끄으으윽…….”
“황야의 무녀는 심판을 받고 죽었다. 가짜 대전사를 조종한 것, 대전사를 능멸한 것, 금지된 주물로 이 땅을 황폐하게 만든 것, 자신의 과오를 전부 인정하고 황야의 먼지로 돌아갔지.”
“……!”
“본디 네놈 또한 함께 광대놀음을 즐겼으니 심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무녀가 네놈은 착각에 빠진 천치라며 살려주길 애걸하더군.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마.”
“…….”
“말해 보아라. 네놈은 누구냐.”
“……뭐, 뭣?”
“네놈은, 누구냐고 물었다.”
맥락 없는 질문이었으나, 듣는 사람을 바짝 질리게 만드는 중압감이 실려있었다. 골타란은 벌벌 떨리는 심장을 추스르며 상념에 잠겼다.
‘빌어먹을, 내가 누구냐니? 나는 당연히…….’
답변하려는 찰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그 누구도 아니었기에.
아곤의 성난 뿔? 아니었다. 그 이명을 선사한 뿔투구가 쪼개졌으니 더는 그렇게 불릴 만한 이유가 없었다.
투기장의 챔피언? 아니었다. 저토록 많은 관중들을 죽였으니 이젠 그 누구도 그렇게 칭송하지 않을 터였다.
동맹을 구한 영웅? 아니었다. 중심 악마를 죽이고 창궐을 종결시킨 건 자신이 이룬 위업이 아니었다.
불굴의 군세의 수장? 아니었다. 가장 믿음직했던 부하마저 떠나보낸 차에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나 싶었다.
……아탈라의 대전사?
단언컨대, 아니었다.
그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면피성으로 사칭한 이름에 불과했다. 그 영광스런 칭호가 제 몫이 아님을 세상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나는, 나는…….”
혓바닥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치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숱한 이름들이 부정에 부정을 거듭했다. 거짓으로 아득바득 쌓아 올린 인생 전체가 질문 하나에 송두리째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결국, 그에게 끝까지 남은 이름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골타란이오.”
“…….”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 골타란. 그것이 바로…… 나요.”
애끓는 고백, 이어지는 조마조마한 정적.
잠시간 아무것도 아닌 사내를 굽어보다가, 카딤은 도끼를 거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녀의 말과 달리 천치는 아닌 것 같군. 자신이 누군지는 똑똑히 잘 아는 걸 보니.”
“…….”
“그럼 이제, 아탈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라. 다시는 대전사의 칭호와 ‘아탈라의 심판’을 탐내지 않겠다고.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내 여로에 훼방을 놓지 않겠다고.”
골타란은 눈초리와 입매를 거칠게 어그러뜨렸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질척한 감정들이 뒤섞인 얼굴로 처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역시, 그대가…… 아탈라의 대전사였던 것이오?”
“…….”
대답 대신 맹세를 촉구하는 도끼날이 돌아왔다. 결국 골타란은 일단 뜻을 따르고 봤다. 한데 맹세를 끝내자마자, 카딤이 뿔투구를 한 조각 주워 들고 볼일을 마쳤다는 듯 떠나기 시작했다.
골타란은 급히 일어나 뒤를 쫓았다.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물어볼 것들이 있소!”
“…….”
“그대가 정말 대전사라면, 솔타나에선 왜 그렇게 광인처럼 날뛰고 있었던 것이오? 그런 모습만 보지 않았어도, 그대와 좀 더 제대로 얘기를 나눴을 텐데…….”
카딤은 잔해와 시체 쪽으로 까딱 고갯짓을 했다.
네가 그러했듯, 나 또한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는 뜻.
몸짓의 의미를 해석한 골타란은 할 말을 잃고 어물댔다. 자신은 앞뒤 없이 그를 죽이려 들었거늘, 대전사는 같은 꼴을 보고도 아량을 베풀었단 걸 깨달았기에.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애써 수습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그렇다면 떠났던 건! 아무 말도 없이 이 세계를 떠났던 건 왜 그런 것이오? 일언반구의 언질만 남겼어도 나 같은 것 따위가 대전사를 칭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떠나가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카딤의 눈동자가 가깝지만 머나먼 과거를 응시했다. 공교로운 물음이었다. 지난날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중, 그는 저 가짜 대전사와 자신의 삶이 기묘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질문에 시시콜콜 답변을 남긴 이유는.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내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심신이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긴 처지였으니 언질을 남길 여유 따윈 없었지.”
“…….”
“그러나, 착각이었다. 네놈이 스스로를 대전사라 착각했듯, 나는 내가 더는 대전사가 아니라고 착각했다. 남은 자들이 인고의 세월을 지새며, 이 세계에 다시금 혹세가 도래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
“…….”
“허나, 이제 달아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게 못다 한 사명이 남았단 걸 알았으니까. 이 세계 또한 나의 자리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투쟁하다 산화할지언정 결코 이 세계를 다시 저버리진 않겠다. 그러니 네놈도…… 아무것도 아닌 자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을 찾아보거라.”
홀린 듯 경청하던 골타란의 면면에 선명한 물음표가 찍혔다. 카딤은 지친 한숨을 내쉬고는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여지껏 꾸준히 핍박받는 동족들을 구했다고 들었다.”
“…….”
“대전사의 사명은 구호가 아니라 투쟁이지. 그렇다면 대전사가 아닌 누군가는, 투쟁 대신 구호를 사명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
골타란의 눈동자에 커다란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곧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는 뇌까렸다.
“제가 감히……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저 때문에 죽었는데…… 뻔뻔하게 다시 누군가를 구하려 든다는 게…….”
“인과응보다. 제 손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남의 고통과 절망을 즐기는 것들은, 그 본질이 인간보단 악마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몰가치한 자들의 죽음에 파묻히지 말고 가치 있는 자들을 구할 생각이나 하거라.”
“…….”
격랑이 몰아치는 검은 눈동자. 위태로운 흔들림 끝에 비로소 각오가 섰다. 골타란은 결연하게, 목메인 목소리로 물음을 토했다.
“그렇다면, 그 구호의 사명…… 투신의 대행자께서 친히 맡기신 사명으로 여겨도 되겠습니까?”
카딤은 괜한 말을 꺼냈나, 뒤늦은 후회를 하며 대충 손을 휘휘 내저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거라.”
다시 발걸음을 떼는 찰나, 뒤에서 가슴을 쿵쿵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비장한 외침이 들려왔다. 대충 대전사께 사죄한다, 영광을 바친다, 어쩐다 하는 것 같은데, 한탄과 오열이 엉망진창 뒤섞여 내용을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어찌 됐건, 계획했던 심판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투쟁을 모욕하는 타락의 전당’은 무너졌다. 토대조차 남지 않은 처참한 폐허가 되었다. ‘황야의 무녀’는 자멸했다. 과오를 뒤늦게 참회하고 먼지로 돌아갔다. ‘아곤의 성난 뿔’은 죽었다. 오로지 아무것도 아닌 사내만이 남았다.
이제 남은 표적은 딱 한 명뿐이었다.
붉은 검신을 밑으로 질질 끌며 나아갔다. 혈귀가 시체 더미에서 흘러나온 피를 삼키고 주인의 부상을 회복시켰다. 잔해의 언덕을 넘어 투기장을 벗어나자, 작달막한 신영이 득달같이 이쪽으로 내달려왔다.
먼저 떠나보냈던 던컨. 한데 그는 달려오다 말고 급히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으리, 괘, 괜찮으십니까……? 아까 보니 막 모래 폭풍이 엄청난 기세로 몰아치던데, 몸은 괜찮, 아니, 그 지, 지병은 괜찮으신지…….”
“그래, 지금은 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그럼 슬슬 그 부호 놈의 저택으로 가보도록 하지.”
“예? 거긴 갑자기 왜…….”
“챔피언을 꺾지 않았나. 약속했던 대가를 받아야지.”
기뻐해야 할지 황당해해야 할지, 던컨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떨떨하니 눈을 끔뻑였다.
*
텅 빈 술병 옆으로 외뿔 달린 투구 조각이 쿵, 놓여졌다.
알 수가 없었다. 뭘 어쩌라는 건지. 투기장의 제왕, 유빅은 투실한 턱을 바르르 떨며 거한을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
“아곤의 성난 뿔이 쓰던 뿔투구의 조각이다. 여기, 그놈이 훔쳐 쓰던 도끼도 가져왔고.”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나? 지금 이걸 내 앞에 들이미는 의도가 대체 뭔가?”
“챔피언을 꺾고 승리했단 증표다. 나는 광대 노릇을 하겠단 약속을 끝까지 다 지켰다. 그러니 이젠, 네놈이 약속했던 황금을 내어줄 차례로군.”
유빅은 매우 이성적인 상태였다. 붕괴를 피해 투기장에서 피신한 후, 심신을 달래기 위해 독주 세 병을 연달아 들이킨 덕이었다.
그렇지만 방금 들은 말로 인해 견고하게 쌓은 취기의 제방이 와르르 무너졌다. 낯짝이 과열된 용광로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살찐 아가리가 대번에 격노를 품은 불길을 뿜어냈다.
“이런, 개미친, 등신 같은, 상또라이 같은, 깨진 오우거 골통만도 못한, 정신 나간 야만인 새끼가!! 씨팔, 그게 지금 이 상황에 할 소리야! 눈깔 달렸으면 너도 봤을 거 아냐!! 투기장이 무너졌다고! 어?? 내 투기장이 무너졌다고, 이 근본도 없는 개호로 잡놈의 새끼야!!!”
“…….”
“내가 하는 말들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고 툭하면 협잡질이나 일삼더니, 이제 와서, 뭐? 황금을 달라고?? 챔피언을 꺾었으니 황금을 달라고?? 씨팔, 니가 골타란을 죽인 건지 대가리에 벽돌 맞고 뒤진 시체에서 주운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제기랄, 아직 투기장이 무너진 원인도 못 알아내서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무슨 이 야만인 새끼들은 대가리에 순 흙먼지만 꽉꽉 들어찬 건지…….”
카딤은 부호의 분노에 맞불을 놓지 않았다. 걸레짝 같은 욕설의 향연을 차분하게 경청하다, 던컨에게 준비한 물건을 가져오라 손짓했을 뿐.
그 꼴을 본 유빅의 미간에 칼자국 같은 고랑이 패였다.
“뭐야, 씨팔?? 그건 또 무슨…….”
“대접이다.”
“아니, 내가 그걸 몰라서 물었겠…….”
“약속을 어기면 대접을 가져와 살점을 뜯어가도 좋다고 했지. 그럼 딱, 그릇이 다 찰 만큼만 뜯어가도록 하겠다.”
“……뭣!?”
카딤이 칼을 들고 일어나는 순간, 출타했던 유빅의 이성이 황급히 귀가 선언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타협을 택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그는 일찌감치 비장의 수를 마련헤 넣았다.
“제, 제기랄, 밖에! 밖에!! 뭐 하고 있어!! 얼른 들어와서 이 새끼 쫓아…….”
“밖에 있던 용병들이라면 이미 다 쓰러뜨려 놓았다. 장비가 좋아서 그런지 확실히 지난번보단 성가시더군.”
어안이 벙벙해졌다.
유빅은 단순히 좋은 장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북부의 유물병들처럼 값비싼 유물들을 사서 용병들을 무장시켜 놓았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쉽게 다 쓰러뜨렸다고?
부호의 안색이 청금석보다 시퍼런 빛깔로 질려갔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은 남아 있었다. 이 마탑에서 비싸게 공수한 반지로 보호막을 펼치면, 아무리 막돼먹은 야만인이라 해도 손대지 못할…….
쯔즈즈즈즈적 – !
반투명한 보호막이 달걀의 피막처럼 부드럽게 찢겼다.
“……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칼날이 날아들어 투실투실한 뱃살을 찔렀다.
푹! 쯔걱, 쯔걱…….
“어, 어어, 억…….”
비현실적인 몽롱함, 괴상야릇한 흡착감.
찢긴 옷자락 너머로 누런 덩어리가 밀려 나오고, 줄줄 새어 나온 피가 붉은 검신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살육의 풍경은 익숙했으나, 당사자가 된 건 최초였기에 투기장의 제왕은 도통 현실감을 느끼질 못 했다.
저게 내 살이라고? 아니, 저게? 저 뻘건 게 내 피라고?
쯔거걱 –
거친 칼질 끝에 살덩이가 툭, 떨어져나왔다. 그제야 나락 같은 현실이 부호의 심신에 파고들었다.
“아, 아아, 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떨어진 살덩이는 대접을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한데 카딤은 그것마저도 쓱 훑어보고는 담지 않고 내동댕이쳤다.
“이런, 순 비계덩어리밖에 없군. 살점을 파내려면 조금 더 깊숙이 찔러야겠어.”
“끄아아아아아아악!!! 아, 안돼!! 안돼애애애애!! 줄게, 줄게! 황금, 황금 줄 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그것마느으흔, 끄아하으으으으으윽…….”
유빅의 눈엔 이제 카딤이 살아 숨 쉬는 죽음, 그보다도 더 끔찍한 무언가로 보였다. 인간인 이상 도무지 대적할 수가 없었다. 헐떡이며 호흡을 진정시키고, 독주를 들이켜 고통을 달래고, 너절해진 복부에 고약을 쑤셔 넣고, 하릴없이 뒤뚱뒤뚱 일어나 지하 창고로 향했다.
겹겹이 둘린 철장과 보안문을 지났다. 미로 같은 통로를 뚫고 가장 내밀한 방에 이르렀다. 그 안을 살펴본 후, 매사에 초연한 야만인마저도 눈썹을 슬쩍 올렸고, 행상인은 아예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눈꺼풀을 개방시켰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레밀리온이시여…….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
금화, 은화, 금괴, 은괴, 금강석, 청금석, 홍옥, 녹옥…….
별처럼 빛나는 형형색색의 보물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억 루덴에 이를만한 금은보화가 두둑하게 쌓여 있었다. 투기장의 고혈로 축적한 부의 결정체였다.
오느라 힘을 다 뺀 유빅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혈색이 벌써 산송장처럼 파리하게 질렸는데도, 한 움큼 독기만큼은 잃지 않고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끄윽, 당연하지만…… 절대, 전부 가져가라는 건 아니다……. 약속을 지키겠다고…… 아탈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건 잊지 않았겠지?”
“물론.”
선뜻 수긍하는 야만인의 대답. 유빅은 불안감을 못 이겨 약속을 재확인했다.
“전에 말한 대로…… 그 조그만 가방이 꽉 찰 만큼, 딱 그만큼만 황금을 채워가라……. 한 톨이라도 더 넘치게 가져갔다간, 내 남은 재산을 전부…… 네놈들 목에…… 현상금으로 걸어버릴 터이니…….”
“무, 물론입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단주님……?”
던컨이 애매하게 입꼬리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인벤토리’ 안에 황금을 푹푹 퍼서 채워넣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