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아탈라의 심판 (18)
투기장의 제왕, 유빅은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난생처음 겪는 격통을 앓은 데다, 피까지 너무 많이 흘렸다. 저런 광경이 절대 현실일 리는 없었다. 황급히 정신을 다잡기 위해, 가져온 독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여전했다.
쩔그렁쩔그렁, 쥐방울만 한 가방 속으로 금화와 금괴가 끝도 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뭐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처음엔 보기보다 꽤 용적량이 크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계속 보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산더미 같은 금화가 3할쯤 사라지고, 절반쯤 사라지고, 결국은 거의 다 사라지도록 가방은 도무지 가득 찰 기미가 없었다.
“뭐, 뭐야……? 뭔 짓을 한 거야? 설마 가방 밑에 구, 구멍이라도 뚫은 게냐? 어서, 어서 가방을 들어봐라!”
카딤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방을 들어 올렸다. 당연하지만 그 밑에 구멍 따윈 나 있지 않았다. 야만인과 행상인은 다시 부지런히 황금을 퍼담았다.
헛것도 아니었고, 구멍을 뚫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기를 쳤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당장 관두라고, 무슨 개수작을 부린 거냐고, 가방 안에 금화 퍼먹는 귀신이라도 들었냐고, 유빅은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따지고 들었다.
카딤은 그 항의를 전부 귓등으로 흘리다가, 한참 지나서야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런, 곤란하게 됐군.”
“뭐……? 뭐가? 뭐가 곤란해? 드디어 그 염병할 가방이 꽉 찼나?”
“아니, 아직 절반도 못 채웠는데 황금이 다 떨어졌다. 남은 공간은 보석이나 다른 걸로 채워야겠는데.”
“……뭐엇?!”
유빅은 제 몸 상태도 잊고, 벼락 맞은 멧돼지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발악했다.
난동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카딤이 정색을 하고 다가와 그의 어깨를 슬쩍 움켜쥐었다.
“분명 약속하지 않았나. 저 가방을 황금으로 꽉 채워 주기로. 잘못된 건 전혀 없는데 왜 그리 호들갑이지.”
“아니, 끄으윽……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아!! 저 가방이 저런 괴상한 요물이라고 말을 안 했잖…… 끄윽, 흐윽…… 아, 아니, 그보다! 황금만 가져가기로 약속해 놓고, 왜 다른 재물까지 눈독 들이는…… 끄으으윽…….”
“이런, 그건 그렇군. 그러게 왜 황금을 넉넉하게 준비해 두지 않았나? 하여간 가방을 황금으로 다 채우지 못하면, 네놈 쪽이 약속을 어기게 되는 셈인데…….”
“……?”
“……잠시만 기다리거라. 올라가서 다시 대접을 가져올 테니까.”
“……!!!”
투기장의 제왕은 불가피하게, 다른 재화로 황금을 대체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기어코 ‘인벤토리’는 창고에 있던 모든 금은보화를 집어삼켰다. 텅 빈 바닥을 둘러보는 동안 유빅의 주둥이에서 얼빠진 웃음을 흘러나왔다.
“크하, 하하…… 헤, 헤헤, 헤헤…….”
심지어 아직도 여유 공간이 남아 있었다. 카딤은 옆 창고를 둘러보다 수북한 노예 문서들을 발견했다. 그것까지 전부 다 쑤셔 박고 나서야 마침내 가방이 꽉 차게 되었다.
가방은 바윗덩이처럼 무거워졌으나 마음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선선히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남기는 카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군. 이건 개평으로 줄 테니, 나중에 술값으로라도 쓰거라.”
무언가 바닥을 굴러 빈 술병에 부딪혔다.
팅그르르르, 탱 – !
1백 루덴짜리 은화 한 닢. 이제 그의 전 재산이었다.
유빅은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다, 끝내 정신줄을 놓고 바지에 오줌을 좍 지렸다.
“헤, 헤헤헤, 헤헤……. 크헤헤, 크헤헤헤헤헤…….”
뭇 사람들에게 ‘투기장의 제왕’이라 칭송받던 대부호 유빅 아그라멘두스는, 그렇게 한순간에 투기장과 용병들과 노예들과 전 재산과 비계덩어리 한 점을 잃고 허망한 파멸을 맞이했다.
*
지하 창고에서 빠져나오는 길.
카딤은 태연했으나 던컨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나으리……. 애, 애초에 제가 꾸민 일이긴 합니다만, 사람이 저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보자니 마음이 편치가 않구만요……. 투기장도 무너졌으니 이제 돈 들어올 구멍도 없을 텐데…… 그래도 황금을 조금은 남겨두고 올 걸 그랬는지…….”
카딤에게선 늘 그렇듯 냉소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이건 놈이 받아 마땅한 심판이었다고.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앗아가지 않고선 의미가 없지. 게다가 남은 돈으로 우리 목에 현상금으로 걸 거란 말을 못 들었나?”
“하, 하지만 이것들을…… 과연 제가 가져도 되는 걸깝쇼? 저는 입방아 찧은 것 말곤 한 게 없고, 사실상 나으리가 죽을 고생을 해서 번 건데…….”
“그 입방아가 없었으면 구경도 못 했을 보물이다. 그리고 어차피 네게는 평생 써도 다 못 쓸 금은보화를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소원을 이뤘는데도 기쁘지 않은 건가?”
“아, 아니, 기쁘긴 기쁩니다만…… 제 깜냥에 비해선 보물의 양이 많이 과분하고, 또 누군갈 쥐어짜서 얻은 돈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쓰긴 영 껄끄러워서…….”
정수리에 물끄러미 내리꽂히는 시선. 던컨은 실언을 했나 싶어 헙, 입을 다물었다. 기실 카딤은 그저 거하게 저질러놓고 자책하는 모순됨에 어이없음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순됨이야말로 아직 행상인에게 인간성이 똑바로 남았다는 증거일 터였다. 카딤은 이미 반응을 예상하고 어떻게 할지도 다 정해 놓았다.
“확실히 한 사람이 먹기엔 너무 많은 재물이지. 들고 다니기도 귀찮고.”
쿵 – !
‘인벤토리’를 내려놓자 묵직하게 땅이 울렸다. 괴력을 지닌 야만인이라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거지, 다른 자였다면 압사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게였다.
설마 지금부턴 내가 저걸 들어야 하나, 던컨이 바짝 겁에 질린 사이, 카딤은 뻐근한 어깨를 뚝뚝 풀고는 명령했다.
“저택에 있는 노예들을 전부 데려와라. 가방이나 보따리 같은 것도 있는 대로 다 챙겨오고.”
“……예?”
“같이 주워온 것들을 적절히 써먹어 보도록 하지.”
팔랑팔랑, 카딤의 큼지막한 손에서 노예 문서 뭉텅이가 나풀거렸다.
*
입을 텁텁하게, 등을 축축하게 만드는 바람.
아곤 교외의 황무지에는 흙바람을 막아줄 건물도 토벽도 없다. 그러나 사열한 3백여 명의 아탈라인 전사들 중에는 눈 하나 깜빡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말할 것이 있다…….”
골타란은 ‘불굴의 군세’를 향해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나는 아탈라의 대전사가 아니다……. 아곤의 성난 뿔도 아니고, 동맹을 구한 영웅도 아니다……. 전설적인 챔피언도 아니며, 되려 투기장을 무너뜨린 학살자다……. 더 이상 저 도시에 머무를 수 없고, 참사회나 부호들의 후원을 받을 수도 없고, 영약과 신기를 나눠줄 수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내다.
“……그러니, 떠날 자는 누구든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
““…….””
처음에는 장중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리고 고요한 수면에 빗방울이 떨어지듯 나직한 파문이 일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파문은 서로 합쳐져 곧 폭우처럼 몰아치는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골타란은 자신의 업보를 감당할 시간이라 생각하며 담담히 눈을 감았다.
한데 뜻밖에도, 부하들의 규탄보다 먼저 들려온 건 앳된 목소리였다.
“아, 아니에요! 허억, 허억, 고, 골타란 님은! 골타란 님은! 절대로 아무것도 아닌 분이 아닙니다!”
“……?”
“고, 골타란 님은, 영웅입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신 영웅이라고요……. 저는, 저는…… 골타란 님이 아니었으면…… 골타란 님이 아니었으면, 이미 벌써……. 헉, 허억…….”
자그마한 아이가 급히 내달려왔다. 숨이 벅차고 가슴이 벅차 거기서 말을 더 잇진 못했다. 골타란은 두 눈을 의심했다.
“넌……? 네가…… 여길 어떻게…….”
일전에 채찍질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걸 구해 준 노예 아이였다.
비단 아이만 온 게 아니었다. 저 멀리, 물경 수백 명에 이르는 인파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전부 다 골타란이 그동안 해방시키기 위해 분투했던, 유빅 대단주 밑에 있는 아탈라인 노예들이었다.
그리고 행렬의 선두에는 낯설지 않은 자가 서 있었다.
악마 학살자, 카딤.
카딤은 놀람과 의혹에 찬 전사들을 가로질러 자연스럽게 수장의 면전에 섰다. 골타란도 부하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숱한 의문들이 목구멍에서 바글바글 들끓었다.
한데 무언가 묻기도 전에 카딤이 먼저 선수를 쳤다.
“짬을 때리러 왔다.”
“……예?”
“이런 무리를 이끌고 악마들을 족치러 다닐 순 없잖느냐. 네가 책임지고 데려가거라. 병력이 그만큼 있으면 인솔하는 게 어렵진 않겠지.”
앞선 내용이 지나치게 많이 생략된 설명이었다.
골타란은 뭣부터 물어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가까스로 이들을 어떻게 데려왔는지부터 물었다. 그러자 챔피언이 된 대가로 받았고, 노예 문서는 이미 전부 불태웠단 대답이 돌아왔다.
골타란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빅은 자신이 꾸민 거짓말대로 정말 노예들을 카딤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로 인한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지만…….
어쨌건 노예들의 해방은 골타란의 오랜 숙원. 수천 번 절하며 감사를 표해도 모자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들을 책임질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 소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곤에 머물 수도 없고, 달리 갈 곳도 없는 도망자 신세라…….”
“이걸 가지고 델루타나로 가라. 그리고 거기서 엔리코 튜리스란 자를 찾거라.”
카딤이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골타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엇입니까?”
“황금 가도의 통행증이다. 이걸 보여 주면 그도 내가 보낸 줄 알 것이다. 그치는 그쪽 참사회에 소속된 참사관인데, 나와 조금 면식이 있으니 도움을 청하면 아마 거절하지 않을 거다. 이전에 네놈들을 무슨 일당백의 힘을 지닌 전사들이라고 고평가하기도 했고…….”
“…….”
그렇게 목적지와 거처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 하지만 전사들이 더는 그를 따르지 않을 거란 문제와, 모두를 먹여 살릴 자금이 없다는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 문제들 역시 거짓말처럼 연이어 해결되었다.
“이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대전사, 아니, 골타란 님은…… 설령 대전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저희들의 영웅이십니다. 평생을 투기장 창살에 갇혀 살 뻔한 저희들에게, 유의미한 투쟁과 더 나은 미래를 주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골타란 님이 없었다면 저희는 아직도 미개한 야만인 취급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소수의 전사들은 실망하고 떠났으나, 대다수의 전사들은 굳건히 자리에 남았다. 그들의 심장은 여전히 골타란만을 유일무이한 군세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 전사가 함성을 외치자 다른 전사들도 똑같이 복창했다.
“아탈라께 영광을! 그럼에도 여전히, 군세를 이끌 우리들의 수장에게 영광을!”
““아탈라께 영광을! 그럼에도 여전히, 군세를 이끌 우리들의 수장에게 영광을!””
전사들의 함성이 우렛소리처럼 우렁차게 대지에 퍼져나갔다. 전쟁 북을 연주하듯 가슴팍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골타란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떨궈, 남몰래 벅차오르는 감정을 잘근잘근 삭였다.
시큰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딤이 봇짐을 맨 짐꾼들을 불러냈다.
“부하와 동족들을 먹여 살리는 문제는 걱정 말거라. 짬을 때리려면 처리비 정돈 대신 내줘야겠지.”
짐꾼들이 보따리를 풀자 골타란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주먹만 하게 뜨였다.
금괴와 은괴, 온갖 휘황찬란한 보석들. 고작 처리비 정도라기엔 터무니없이 값비싼 재화들이었다. 출처를 물어보려는 찰나, 유빅의 창고를 다 털어왔다는 설명과 함께 단연한 경고가 뒤따랐다.
“물론, 이걸 조건 없이 다 주겠다는 건 아니다. 절반 정돈 마음껏 써도 되지만, 나머지 절반은 절대 손대지 말고 엄중히 보관해 놓도록. 그건 모두 이자의 몫이니까.”
골타란의 눈동자가 굵직한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 끝엔 낯설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자신과 한바탕 사투를 벌이며 놀라운 투지를 보여 주었던 행상인.
골타란은 진중하게 낯을 굳히고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걸 본 던컨은 바짝 얼어붙었다.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바로 날 죽이고 보물을 독차지하려고 그러나? 아니면 솔타나에서 몰래 칼빵 놓았던 일을 복수하려고 그러나? 아니면 어제 모가지에 단검을 들이밀고 수염을 태워버린 걸 들켰나?
전부 아니었다. 골타란은 숙연히 무릎 꿇고 선언했다.
“존엄한 아탈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내 목숨을 걸고 자네의 보화들을 지키도록 하지. 만일 자네의 것에 눈독 들이는 자가 있다면 예외 없이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손대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양손을 잘라버리도록 하겠네.”
“어…… 예?”
해쓱하게 질린 던컨이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하고 말꼬리를 끌었으나, 골타란은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일도 내 진심으로 사과하지. 돌이켜보니 자네의 말이 전부 옳았네. 나는 정말 가짜 대전사였고, 저분만이 진정한 대전…… 헙.”
돌연 거친 손길이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를 꺾자 보이는 냉엄한 눈빛.
카딤이 슬쩍 사열한 전사들 쪽을 턱짓했다. 저놈들이 알게 되면 내부 분열이 일어날 수 있으니, 자신의 정체를 누설하지 말란 뜻.
하기야 아무리 골타란을 따른다 말했어도, 대전사의 사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이 작을 리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탈라의 심판’도 진작에 숨겨 뒀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골타란은 자신의 부주의함을 자책하곤 순순히 대전사의 뜻을 따랐다.
아무쪼록 대전사란 정체를 빼고 봐도, 카딤은 노예로 잡힌 동족들을 구하고 막대한 군자금을 제공한 은인이었다.
수장의 명을 따라 모든 군세의 전사들이 무릎 꿇고 가슴을 두들겼다. 해방된 노예들은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마다 않고 넙죽 엎드렸다. 드넓은 황무지가 좁아 보이도록 빼곡히 늘어선 인파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악마 학살자에게 광대한 영광을!””
““위대한 형제의 앞날에 아탈라의 투지가 함께 하길!””
““황야의 아버지시여! 거룩한 해방자의 앞날에 축복과 은총을 내리소서!””
“…….”
카딤은 별다른 내색도 없이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부담스러워 쩔쩔매던 던컨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윤곽이 저 멀리, 저 멀리 광활한 황무지의 아지랑이 속에 혼연히 파묻힐 때까지, 무릎 꿇고 엎드린 자들은 단 한 사람도 일어나지 않았다.
은인의 눈 밖에 있어도 그 은혜를 뼈에 새겨 잊지 않을 거라 다짐하는, 아탈라인들만의 방식.
기어코 거뭇한 얼룩마저 보이지 않게 돼서야 모두 몸을 일으켰다. 한데 골타란은 일어나던 중, 신경 쓰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왜 그러느냐, 아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
자신이 구해 줬던 노예 아이. 엎드리지도 무릎 꿇지도 않았는지, 옷에 흙이 하나도 안 묻어 있었다. 어두운 낯으로 우물쭈물대던 아이는 머지않아 그 속내를 털어놓았다.
“골타란 님, 이건 비밀인데요. 저는, 저분이…… 그 검은 도끼를 쓰시는 걸 보았거든요. 혹시 저분이…… 골타란 님의 무기를 훔치신 건 아닌가요……?”
골타란은 걱정 가득한 눈동자를 빤히 마주 보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투박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비밀을 말해줬으니, 나도 비밀을 하나 말해 주마. 실은…… 그 반대다. 그 도끼는 내 것이 아니라 본디 저분의 것이란다. 주인이 없는 동안은 내가 부당히 사용했으나, 그 정당한 주인이 오셨으니 돌려드려야 마땅하겠지.”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이도 그 도끼의 주인이 누굴 뜻하는지 모르진 않았으니.
“하지만, 골타란 님……. 저분은, 저분은…… 너무 잔인했어요. 주인님의 저택에서 용병들을, 살려달라고 싹싹 비는 사람들까지 전부…… 끔찍하게 죽이셨단 말예요. 물론 저희들을 구해 주신 건 너무 감사하지만…… 그런, 그런 무섭고 잔인한 분이 대전사라는 건 믿기가 힘들어서…….”
골타란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구르는 천구는 아직 중천을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간 분명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올 것이었다. 그 끝을 가늠키 힘든 모질고 악독한 밤이.
“……누군가의 안락한 밤은, 대개 누군가의 피땀 어린 밤으로 완성되는 것이란다. 끝없는 투쟁의 밤을 지새며 악을 멸하고 대적자들과 맞서는 것, 그것이 바로 저분께서 맡으신 사명이지. 저분이 용병들을 다 죽이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필시 우리의 뒤를 쫓아 추격하지 않았겠느냐?”
“…….”
“그러니 우리는 저분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존경을 드려야 한단다. 그 잔혹한 투쟁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저분께서 걸어간 발자국에 고이는 피가, 반드시 새 세상에 돋는 새싹의 거름이 될 테니까.”
아이는 숙연히 고개를 떨궜다. 그럼에도 아직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 완연했다. 골타란은 이제부턴 뭘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문득 생경한 색채가 담겼다.
이 일대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색채가.
“……보아라, 저것을. 벌써 새 세상의 흔적이 움트고 있지 않더냐?”
“……!”
아이도 골타란과 같은 걸 보았다. 흥분으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정말로 저것들이…… 저분 덕에 자라난 거라고요?”
“그래, 그렇다. 그릇된 뜻을 품고 이 땅에 저주를 내렸던 어느 무녀를…… 저분께서 심판하셨거든.”
“…….”
골타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내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동자는 물비늘처럼 반짝였다.
지글지글 끓는 그악스러운 볕이 황무지에 쏟아졌다. 생장의 의지를 뿌리째 뽑으려는 듯 매캐한 열풍이 불었다. 그러나 새싹들은, 척박한 땅을 뚫고 기어코 떡잎을 틔운 새싹들은,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고 달아오른 볕과 바람을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무수한 자들의 선혈이 장맛비처럼 쏟아졌던 어느 여름.
생명을 망각했던 아곤의 대지에 싱그러운 초록이 돌아오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