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진실을 꿰뚫는 별 (8)
철겅철겅, 회랑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무거운 발소리.
그 규칙적인 소리는 귀빈실의 내부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침상에 누워 있던 백발의 노인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었다.
주교복을 걸치고 벨벳 의자에 앉는 순간, 발소리의 주인이 방 안에 들어섰다. 백색 판금 갑옷을 걸친 초로의 아크팔라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망도 두터워, 교단 내에서 뭇 성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거물이었다.
데카그램 제3좌, ‘진실을 꿰뚫는 별’ 헨다르크.
그가 노인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목례를 올렸다.
“긴 밤을 헤매더라도 찬란한 별을 보고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임무 수행을 조기 종결하고 돌아왔습니다, 대주교님.”
“…….”
제2석 대주교, 에렌스코의 흰 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헨다르크가 빈손으로 왔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럼에도 인자한 미소를 띠우고 부드럽게 말했다.
“과연,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나 보군요.”
“…….”
“어느 정돈 예상했습니다. 헨다르크 경의 애제자를 무참히 도살한 악귀였으니까요. 역시, 뼛조각 하나 남김없이 깡그리 절멸시키셨나 봅니다. 더군다나 경의 무기는 절륜한 화력을 자랑하는 바로 그 ‘루카온의 유성’이니, 아무런 증거물을 못 가져왔다 해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요.”
“…….”
“물론 앞선 제 말이 전부 진심이 아니란 걸 모르시진 않겠죠. 그렇다면 이제 왜 악귀를 살려두고 빈손으로 온 건지 설명 바랍니다, 헨다르크 경.”
에렌스코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표정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사에 격렬한 노기가 깃들어 있음을 파악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헨다르크는 사무적인 어조로 답했다.
“주변 일대에 심대한 피해가 우려됐습니다. 근방 5킬로미터 내에 퀴른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만일 악마 학살자와 맞섰다면 그곳이 초토화되고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겁니다. 또한 지리적으로 마탑과 인접한지라 마법사들의 개입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무엇보다 제힘으로 무사히 제압하리란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자는 모종의 수단을 감추고도 아크팔라딘에 준하는 무력을 선보였는데, 만일 전력을 발휘했다면 아무리 저라 해도…….”
끌끌끌, 쇠를 긁는 듯한 웃음소리가 성기사의 말을 잘랐다.
헨다르크는 슬몃 미간을 구겼다. 불안정한 와류를 빚으며 흐르는 공기. 에렌스코는 하얀 머리칼을 쥐어뜯듯이 쓸어올렸다가, 가볍게 손깍지를 끼고는 물었다.
“성도의 지성소에 보관돼있던 성유물 중 하나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
“‘칠흑을 태우는 등불’. 그건 임무 수행 중 어느 부분에 사용하신 겁니까?”
헨다르크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실만을 실토할 수 있는 아크팔라딘은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대주교는 자조적인 조소를 머금었다. 말라비틀어진 고목의 뿌리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우리가 같은 비탄을 공유하는 줄 알았는데요…….”
“…….”
“린튼 펠리퍼스, 헬리아 뮤넬……. 둘 다 참으로 빛나는 미래를 가진 엘가의 아이들이었습니다. 한 명은 전도 유망한 신예 성기사, 한 명은 제국의 최연소 아크팔라딘……. 만일 시간이 좀 더 흘렀다면, 언젠가 경과 같은 별이 되어 엘가의 존명을 찬란하게 빛냈을지도 모르지요.”
“…….”
“그러니까 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지 못했다면, 최소한 복수라도 끔찍하게 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극악무도한 악귀에게 복수하긴커녕…… 성유물을 내어주고 오다니요?”
강파른 지탄에도 헨다르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제 눈으로 보고 겪은 것만 믿습니다, 대주교님. 그자는 악귀가 아니었고, 린튼과 헬리아는 부당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헨다르크 경, 헨다르크 경…….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당신의 성흔은 개인적 진실을 들여다보는 거지 절대적 진실을 통찰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엘가라고 단단히 믿는 정신병자를 만난다면, 당신은 그를 진짜 신으로 받들고 섬길 겁니까?”
“…….”
그 말을 듣고, 문득 헨다르크의 상념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엘가를 거짓된 존재라 말한 ‘빛을 등진 고든’의 고사가 떠올랐기에. 그자의 눈에는 아마 엘가 교단 전체가 정신병자를 신으로 섬기는 자들로 보이지 않았을까?
……해선 안 될 불경한 생각이었다. 헨다르크는 성호를 긋고는 의식을 다잡았다.
“저는 그저 간편히 그릇에 담긴 진실만을 보고 온 게 아닙니다, 대주교님. 그보다 그 그릇의 만듦새를 더 주의 깊게 보았지요. 악마 학살자는 결코 진실을 왜곡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교단의 성기사들이 먼저 큰 실수를 저질렀단 쪽이 더 타당한 추측…….”
“경의 어린 제자들이 걱정되는군요. 교단의 별이라 불리는 스승이 악귀를 두둔하다니. 워낙 사제 관계가 깊어서, 스승과의 무관함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
진심을 담아 염려하는 어조. 그러나 그 저의는 협박임이 명백했다. 아크팔라딘의 눈동자 속에 차가운 불꽃이 어렸다.
“제 제자들은, 건드리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감히 경의 제자들을 건드리겠습니까? 모두 이대로만 가면, 이미 죽은 두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성기사가 될 아이들인데…….”
“……제가 진실을 꿰뚫어 본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대주교님.”
“그래서 뭘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맞불이라도 놓으시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습니다, 헨다르크 경.”
“…….”
대주교의 입매에 냉혹한 서리가 어렸다. 소복한 눈썹 밑의 동공은 빛을 삼키는 나락처럼 까마득했다. 두 사람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동안, 칼날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듯 팽배한 긴장감이 내리깔렸다.
에렌스코는 소임을 저버린 성기사에게 다시금 명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다시 동맹령으로 돌아가 그 악귀를 죽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대의 제자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될 겁니다. 애지중지 길러낸 제자를 잃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지그시 눈을 감고 고뇌하는 헨다르크.
그러나 갈등은 길지 않았다.
“거절하겠습니다. 그건,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제 제자들의 터럭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대주교님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말끔히 일소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에렌스코는 그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는 듯이.
그러다 어느 순간, 정색하며 웃음을 꺼뜨리고 손을 휘저었다.
“나가보십시오. 이 임무는 다른 적임자를 찾아보지요. 그리고 경의 제자들에게도 해를 끼치진 않겠습니다.”
“…….”
“일단은, 말이지요.”
아크팔라딘은 대주교를 무겁게 노려보다가, 가볍게 목례를 올리고 귀빈실을 떠났다. 육중한 금속의 발소리가 회랑의 저편으로 흐릿하게 멀어져갔다.
홀로 남은 에렌스코는 손깍지를 끼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판석을 바라보며 다시금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허파에 천공이 난 것처럼 쉰 웃음소리를 흘리길 한세월. 숨이 벅찰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하고 성력을 모아 손가락을 튕겼다.
우우웅 –
허공에 뭉근히 떠오르는 빛의 구체.
에렌스코는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마경으로 떠난 ‘어둠을 삼키는 별’에게선 아직 아무런 기별이 없는가?”
지지직, 구체로부터 암호화된 전음이 흘러나왔다. 에렌스코는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다 은밀히 지시했다.
“대악마의 육신을 찾는 일은 당분간 중지하고 즉각 내게 오라 고하거라. 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
퀴른에서 카딤과 던컨은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공짜로 여관 전체를 전세 내서 묵게 되었고, 양념 생선조림, 밀면과 시금치를 채워 넣은 빵, 입가심할 사과술과 맥주 따위로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받았다. 출입이 봉쇄되어 한동안 기근에 시달렸던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온 마을의 남은 식자재를 전부 모아 잔치를 벌인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유감은 없었다. 이제부턴 마음 놓고 밖과 왕래하며 먹을거리를 구해올 수 있었으니. 오히려 더 잘해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악마와 성기사를 물리친 영웅이라면, 응당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용병님! 언제든 내키시면 저희 마을에 다시 찾아주십시오!”
“다음엔 더 좋은 술과 음식으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용병님의 여정에 레밀리온 님의 황금 같은 축복이 있기를!”
사람들의 환대는 하룻밤 자고 마을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마을 어귀까지 떼 지어 나와 헝겊을 흔들고 손을 휘저어댔다.
“…….”
“…….”
허나 카딤과 던컨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들이 하지도 않은 일로 보상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크팔라딘과 협상한 사정을 전해 들은 던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면서도 안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헨다르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모든 걸 반전시켰다.
다른 아크팔라딘이 찾아올지도 모른단 경고.
‘나를 보낸 자는 교단의 대주교인데, 그자라면 필시 그대에게 또 다른 ’데카그램’을 보낼 것이오. 일단 내 나름 수를 써서 막아보겠지만…… 미리 각오는 해두는 편이 좋을 거요.’
그 얘기는 두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딤은 쯧, 혀를 찼다. 데카그램은 총 10명이 있는데, 헨다르크의 자리는 그중 3번째라고 했다. 이자만 해도 충분히 괴물 같았는데, 더 강한 놈들이 있다 하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거기다 상대적으로 약한 놈들도 여럿이 오면 나름 위협적일 터.
시작 지점에서 성기사를 죽인 일이 이렇게까지 거추장스러운 족쇄가 될 줄은 몰랐다. 그 녀석이 대주교가 아끼는 조카만 아니었더라도……. 당면한 문제에 신통한 타개책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교단이 건드릴 수 없을 만큼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만은 충돌을 피해서 다행이었다.
패배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허나 그대로 싸웠다면 또다시 동료가 치명상을 입고, 마탑의 출입에도 차질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헨다르크가 300년 전에도 극히 드물었던, 대화가 통하는 아크팔라딘이었단 건 굉장한 요행이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한들 완전히 신뢰할 순 없었다.
찬란한 별빛도 먹구름에 묻히면 가리어진다. 교단이 그 모양이다 보니 성기사에 대한 카딤의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딱 고든의 정보를 대가로 마탑의 정보를 주는, 한 차례의 거래 상대 정도로 여기는 편이 적당할 터였다.
이런저런 잡념이 거듭 두 사람의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자욱한 생각을 머금은 얼굴 위로 얼기설기 잎맥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무 그늘 사이로 새어 나오는 얼룩무늬의 파도, 눈동자들은 녹음의 숲길이 아닌 숙고의 물길을 유영하고 있었다.
이 앞으론 갈림길도 없었다. 아늑한 오솔길이 일직선으로 곧게 이어질 뿐. 자연히 어디로 갈지 상의할 필요도 없었다. 터벅터벅, 침묵 속에서 엇박자의 발걸음만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
“…….”
그렇게 얼마나 걸어 나갔을까.
던컨은 문득 시야 한구석에 환한 빛무리가 비친단 걸 깨달았다.
“어……?”
울창히 우거진 삼림의 출구였다.
보자마자 홀린 듯이 뛰쳐나갔다. 머리칼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 심장을 간질이는 알 수 없는 설렘. 어찌나 흥분했는지 짊어진 짐짝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숨 가쁘게 내달려 빛무리에 몸을 던진 끝에 마침내 보게 되었다.
“후아아아…….”
폐부에서 절로 밀려 나오는 벅찬 탄성, 등을 돌려 파닥파닥 손짓하는 던컨.
“나, 나으리! 나으리!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빨리 이쪽으로 와서 보십시오! 드디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카딤도 가볍게 발을 굴러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또한 보게 되었다.
파르라니 눈 시린 빛깔로 펼쳐진 바다, 그리고 포말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순백의 도시.
도시의 가장자리엔 성벽이 없었다. 대신 반투명한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일렁이는 빛의 커튼 뒤로 백색 건물들이 장인이 빚은 수공예품처럼 오밀조밀 늘어서 있고, 좌우에 자리한 하얀 대로가 백사장과 푸른 대양으로 이어져 극적인 색채의 변화를 이루었다. 한 폭의 풍경화를 빼다 박은 도시에는 어느 곳 하나 눈을 뗄 만한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시선을 앗아가는 건 탑이었다.
도시의 중앙, 하늘을 들이받는 뿔처럼 우뚝 솟은 백색의 탑. 최하부는 땅, 중심부는 바다, 최상부는 하늘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 온 부분이 청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품게 되는 건축물을 마주하노라면, 자연스레 이 도시의 이명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기적의 도시, 베스타나.
“……하.”
카딤은 스스로가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고된 여정은 그에게서 평범한 감정들을 앗아갔다. 행상인처럼 풍부하게 감정을 표현하거나, 촐싹대며 감탄사를 내뱉을 일은 영영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순간만큼은 그도 고즈넉한 감상에 젖어 잔잔한 미소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륙 중앙에서 동부 끝자락까지, 거진 반년에 가까운 강행군 끝에.
마침내 그들은 여정의 첫 번째 목적지에 도달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