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다섯 개의 기둥 (11)
당연히 경매장에 있는 카딤이 던컨을 도와줄 도리는 없었다. 얼굴에 떠오른 근엄함이 서서히 목숨에 대한 체념으로 바뀌려는 찰나였다.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던컨의 행색을 자세히 훑어보곤, 화들짝 놀라 얼어붙는 두 마법사.
그러다 난데없이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컨저러님! 연기가 짙어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다음부턴 반드시 미리 알아보고 인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음?
예기치 못한 반응에 당황해 굳어 있길 8초, 천천히 자신을 향해 시선을 떨구기까지 12초, 붉은 로브 차림을 보고 한발 늦은 깨달음을 얻기까지 21초.
푸른 로브의 두 마법사에겐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러, 던컨은 비로소 무슨 상황인지를 깨달았다.
‘갈색은 어프렌티스, 하늘색은 시커, 푸른색은 인보커, 붉은색은 컨저러…… 아아! 내가 이 녀석들보다 등위가 높구나!’
뇌리를 스치는 훔친 책에서 읽었던 정보.
던컨은 어딜 가나 얕보일 만큼 왜소했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 체구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마법적 계급인 ‘등위’를 나타내는 복장만이 중요할 뿐. 게다가 그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도 마법사들이 착각하는데 한몫했다.
당장은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만…… 여기서 급히 물러나면 도로 의심을 살 게 분명했다. 말에는 행동을 바꾸는 힘이 있는 법. 던컨은 카딤으로부터 배운 금언을 되새기고는 흠흠, 육성을 내리깔았다.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자네들.”
“……예?”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무얼 하고 있냐고 물었네.”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싶어 마법사들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보, 보시다시피 지금은 새로 입탑한 어프렌티스들이 쓸 ‘마석’을 제조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하급 악마 32구, 중급 악마 2구가 투입되었으며, 마광로가 안정화 상태에 접어들면 하급 악마 8구를 추가로 투입할 예정입니다.”
“마기 희석 배합은 2형 마석 배합식을 따르고 있고, 희석 재료는 제조부 3조가 조달 중에 있습니다. 현재까지 진행 과정 중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이상이 생기면 즉각 전음으로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컨저러님!”
“…….”
던컨은 마법사들의 뒤편을 흘끗 내다보았다.
쿠르륵, 쿠르륵, 쿠르륵 –
괴상망측하게 생긴 거대한 솥이 주전자처럼 절절 끓고 있었다. 악마의 시체를 밀어 넣은 구멍 역시 저 솥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게 아마 ‘마광로’라는 물건인 듯했다.
그 외의 말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석? 마법사의 심장에서 ‘마나’를 공급한다는 그 돌? 저 솥으로 그걸 만드는 건가? 히익…… 근데 왜, 왜 거기에 악마의 시체를 넣는 건데……? 희석 배합은 또 뭐고, 그 재료들은 또 뭐고…….’
던컨은 의구심을 꾹꾹 감추며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마법사들은 이 당연한 걸 왜 묻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선선히 답했다.
‘마나’의 핵심 성분은 마기다, 마석의 재료로 악마 시체를 넣어서 그 마기를 공급한다, 희석 배합은 마법사가 마석의 마기에 홀리지 않게 다른 재료를 섞는 과정이다, 재료로는 괴물의 뼈와 광물, 마굴에서 수입한 인간의 신체 부위 따위가 들어간다…….
던컨의 낯빛이 해쓱하게 질렸다. 질 나쁜 괴담 같은 진실에 놀라 말문이 틀어막혔다.
그즈음, 마법사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행동거지가 영 수상한 고위 마법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컨저러님께서는 무슨 용무로 통제 구역에 찾아오셨습니까……? 저희 제조부 소속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외람되지만, 혹여 존함과 소속 조직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통제 구역의 출입 인원은 빠짐없이 기록해 두란 탑주님의 지시도 있었던 터라…….”
던컨은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이러다 저 솥가마 안에 재료로 들어가게 되는 건 아닐까? 그냥 아까 안 걸렸을 때 튈걸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그렇지만 이젠 물러날 수가 없었다. 눈매를 부릅 치뜨고, 목소리를 더욱 내리깔고, 나름 위엄 있는 척 염소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모르나?”
“…….”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모르냐고 물었네.”
“……예, 죄송합니다. 이번 기회에 말씀해 주시면, 몰라본 죄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고 필히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사의 어조엔 전혀 사죄하는 기미가 없었다. 이미 반쯤은 고위 마법사가 아니라 확신한 눈치.
던컨은 초조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하, 어떻게 내가 누군지 모를 수가……. 요, 요즘 인보커들은 정말 빠졌군. 정말, 정말로 내가 친히 설명해준다면, 과연 네놈들이 그 뒷감당을 할 수 있겠느냐?”
“…….”
“…….”
희번득하게 빛나는 눈동자들, 필사의 허세를 부려봐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던컨은 슬슬 갈비뼈가 떨리고 불알이 오그라드는 걸 느꼈다. 심지어 왼편에 있는 마법사는 벌써 마나를 끌어올리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 순간, 목숨의 위기가 생존 본능을 일깨웠다.
던컨은 다짜고짜 허리춤에서 ‘지옥불 단검’을 뽑아 들어 휘둘렀다.
화르르르륵, 화르르르륵 – !
흐리터분한 장막을 가르는 홍염의 획, 자욱한 연기가 맹렬한 불길에 연소되었다. 흩날리는 불티 사이로 마법사들을 쏘아보며 조곤조곤 읊조리는 던컨.
“……이만, 이만하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지 모르겠군.”
정말로 몰랐다.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지. 그저 방금 보여준 칼질이 뭔가 의미 있는 마법으로 보였기만을 간절히 빌 따름이었다. 만일 그러지 못하면 어떻게든 이 불꽃을 저들의 목에 내꽂아야 할 테니…….
그런데 먹혔다.
“……어? 이 불꽃은…….”
“이거…… 그거 아냐……? 오클라무드 장로님께서 수제자분들과 연구 중이라는 그 지옥불 마법…….”
“뭐야, 그럼 설마…… 이분이 ‘흑암의 폭염’ 휘하에 계신……”
“…….”
그것도 너무나도 잘.
“……알아차리는 게 너무 늦군.”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흐름에 편승하고 봤다. 마법사들이 사색이 되어 곧장 다시 허리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오, 오클라무드 장로님께서 시찰을 위해 보내신 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앞으론 절대 컨저러님의 존안을 잊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장로님께 보고하는 일만은…….”
“…….”
던컨은 그런 그들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굽어보았다.
오클라무드가 누구인지, 저들이 왜 저렇게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흐름이 다시 넘어왔다. 십년감수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금 여유로운 척 위장했다.
“흠, 흐음, 뭐, 지금이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이다만. 그런데 옆에 네놈은…… 감히 내 앞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지 않았던가?”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
“그건 지금부터 너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며, 명만 내려주십시오.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자신의 업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한번 가볍게 시험해 보도록 하겠다.”
던컨은 단박에 핵심적인 질문을 물었다. 마석의 제조법을 고안한 자가 대체 누구인지, 마기 섞인 ‘마나’로 ‘고대 마나’를 대체하는 방식을 고안한 자가 대체 누구인지.
짧은 머뭇거림 끝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야 당연히 선대…… 아니, 현대 탑주님 아니십니까?”
무언가 이상한 대답이었다.
현대 탑주가 고안했다니? ‘고대 마나’가 고갈된 건 20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이라 들었는데? 거기다 선대와 현대 탑주를 헷갈린 것도 왠지 미심쩍었고…….
던컨은 미간에 짙은 주름을 새기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 그렇다면, 이번엔 현대 탑주님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자네들이 아는 대로 설명해 보게나.”
“…….”
마법사들은 긴장하여 꿀꺽 침을 삼키곤, 이내 고분고분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어두컴컴한 저녁의 숲.
땅거미는 이미 어슴푸레한 여운조차 남기지 않고 스러졌다. 잿빛 먹구름이 내깔린 하늘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무거워 보였다. 판판한 나뭇등걸 위에, 먹먹한 하늘만큼이나 먹먹한 표정을 지은 소녀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삭연한 밤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 침울한 눈동자는 계속 흙바닥에 내리꽂힌 채 고정. 퉁퉁, 성난 발길질을 하고는 혼잣말을 하는 마법사, 멜리사.
“그래, 필요 없어……. 그런 제멋대로인 야만인 따위……. 그냥 원래 없었던 것처럼 버리고 나 혼자 돌아가면 되는 거야.”
꺼낸 말과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도리어 한층 더 침울한 낯빛을 하곤, 등걸 밑으로 미끄러져 아예 무릎을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그녀의 유일한 일행, 카딤은 멜리사를 떠났다. 한 시진쯤 전, 그녀가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고 말했기에.
사실 그렇게까지 말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갈등이 생긴 계기도 매우 사소했다. 카딤이 앞으로 어떤 ‘황야의 무녀’를 찾아 일행으로 삼을 거라 한 말을 듣고, 멜리사가 이렇게 질문한 것.
‘흐응, 그럼 말이야……. 네가 말한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이야, 아니면 나야?’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너와 그녀는 맡은 바 역할이 다르고, 둘 다 대체할 수 없이 중요하니까.’
‘아 – 하……. 그럼 나는 몇 달이나 너랑 같이 다녔는데도…… 아직 얼굴도 모르는 누구누구랑 중요도가 같다는 거구나?’
아무리 비아냥대도 카딤은 반응이 없었다. 도리어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 본인의 감정만 고조되어, 이미 지난 일들에 대한 불만들까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러다 결국 화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꺼지라고 말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정말로 바랐던 건 카딤이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것이었지만…… 무뚝뚝한 야만인은 그러는 대신 곧이곧대로 꺼져 버리고 말았다.
“머저리 같은 야만인……. 두개골 안까지 근육 다발만 꽉꽉 찬 둔탱이…….”
멜리사는 흙바닥에 지팡이로 멍청한 야만인처럼 생긴 낙서를 그렸다. 한편으론 카딤이 아예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로 안 돌아오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대체 어떤 기분인 건지 잘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때, 불현듯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카딤?”
멜리사는 다급히 수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덩치 큰 야만인의 신영이 아니라, 표표하게 빛나는 안광과 날 선 이빨들이 있었다.
– 크르르르르…….
– 크르르르르르…….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접근하는 칼날늑대 무리.
“어, 어어, 어어…….”
머리가 새하얘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마법을 준비할 틈이 없었다. 멜리사는 머뭇머뭇 뒷걸음질 치며 백치처럼 한 사람의 이름만을 중얼거렸다.
“카딤……? 카딤……? 카딤……? 카딤…….”
– 크르르르르르…….
– 크르르르르르릉…….
“어, 어딨어! 카딤!! 카딤!! 카딤!! 카디이이임!!”
– 커헝, 컹컹!!
“꺄아아악!!!”
맹수의 이빨이 그녀를 덮치기 직전, 야음을 뚫고 쇄도하는 도끼날.
패래래래래랙, 퍼 – 걱!
– 캥!
늑대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널브러졌다. 으스러진 측두부에서 피와 뇌수가 줄줄 새어 나왔다.
뒤이어 수풀에서 거한이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그는 도끼를 회수하고, 광풍처럼 그걸 휘둘러 남은 짐승들을 상대했다. 칼날늑대 무리는 순식간에 전부 갈라진 가죽과 으깨진 살점의 혼합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카딤은 눈가에 튄 핏자국을 쓱, 문질러 닦곤 소녀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 멜리사. 인근의 괴물을 다 정리하고 올 생각이었는데, 내가 놓친 놈들이 있는 줄은 몰랐군.”
“…….”
멜리사는 싸늘하게 등을 돌리며, 왜 이제서야 왔냐고 톡 쏘아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내와는 달리 눈시울에서 왈칵 설움이 솟구쳐 올랐고,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피로 얼룩진 거한의 품을 끌어안고 말았다.
“흐어엉…… 어, 어디,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멍청아……. 왜 이렇게 늦었어……. 왜, 왜 나 혼자 버려두고 떠났던 거야…….”
“……네 입으로 떠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그래도 가, 가지 마……. 아, 앞으론 내가, 아, 아무리, 떠, 떠나라고 말해도, 절대 가면 안 돼……. 계속 내 옆에 있어야 돼…….”
“……그래, 가지 않으마. 내가 여기에 있다.”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듯 훗날 대마법사가 될 소녀의 등을 토닥여 주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들어오는 풍경은, 어느 여관의 객실로 일변했다.
300년 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전사는 한동안 망연히 천장만을 응시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