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그런 친구 하나쯤 (1)
어느덧 계절은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에 들어섰다.
사위를 훅훅 달구던 열풍에 갓난아이 숨결처럼 여린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녹음을 뒤집어 쓴 들판의 거죽에도 어렴풋이나마 연갈색 물이 들었다. 부지런한 철새들이 정든 둥지를 버리고 떠나자, 성급한 가을 풀벌레들은 덩달아 제때가 온 줄 알고 열심히 앞날개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호수라고 해야 할지, 적당히 널찍하고 고즈넉한 물가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염소 수염을 매단 행상인, 던컨. 그는 유심히 지도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눈썹달과 잔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밤. 날이 저문 뒤론 일행이 찾기 좋게 불을 피워놓았다. 물론 그의 일행은 깜깜한 나락에 떨어진 석탄 알갱이도 찾을 자이니, 크게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두 식경쯤 지나 일행이 돌아왔다. 슬슬 사람보단 괴물에 가까운 덩치를 갖춰가는 거한, 카딤. 던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 오셨습니까요, 나으리! 그런데…… 어디에 다녀오신 겁니까?”
“……전에 만난 아크팔라딘에게 전할 기록을 남기고 왔다. 베스타나 남부의 큰 바위 밑에 묻어달라고 들었는데, 어떤 바위인지 헷갈려서 시간이 좀 걸렸군.”
카딤이 흙으로 얼룩진 손을 탁탁 털었다. 던컨은 끄덕끄덕 고갯짓을 하곤 뜸 들이다 지도를 들이밀었다.
“나으리, 잠깐 이것 좀 보시죠. 보시다시피, 이번 목적지인 몰타나는 이렇게 동맹령의 중앙 하단에 있습디다. 그래서 보통은 이렇게 남쪽으로 가다 서쪽으로 빠지는 길을 많이 이용합니다만, 더 빨리 가시려면 아예 이렇게 대각선으로 험지를 넘어가는 길도…….”
“됐다. 이제 여로는 네가 다 알아서 하거라. 굳이 내 눈치를 보고 시키는 대로 할 필요 없다.”
“…….”
던컨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에 도통 적응하질 못하는 눈치. 머리를 벅벅 긁고, 손가락을 꼼질대며 망설이다, 곁눈질을 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저, 나으리……? 그래도 나으리의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 정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괜히 저 때문에 빙 돌아가는 건 아니신지…….”
“나는 대수림으로 간다. 어차피 거기도 남쪽에 있으니 방향은 비슷하지.”
“대수림? 그 엘프들이 숨어 산다는 숲 말입니까? 그곳은 갑자기 왜…….”
“내가 찾는 사람이 거기 있다더군.”
“…….”
대수림은 온갖 기이한 소문과 불가사의가 뒤얽힌 미지의 땅. 평범한 사람이 머물 만한 곳은 절대 아니었다. 유심히 카딤의 행적을 되짚어 본 던컨은, 어느 순간 이런 결론에 와닿았다.
“그럼 혹시 나으리께서 찾으신다는 분이…… 초대 마탑주, 멜리사입니까?”
“…….”
찌르륵, 풀벌레 울음 사이로 묵언의 긍정이 돌아왔다. 옹색하게 좁혀진 눈망울이 왕방울만 하게 뜨였다.
“세상에, 정말입니까? 그, 그 대마법사가 아직도 살아 있답니까? 최하층에 있는 기록에 그렇게 적혀있었습니까?”
“…….”
“허 참…… 아무튼 놀랍구만요. 200년도 전에 마탑을 지은 전설적인 대마법사가 여태 살아있다니……. 뭐, 하긴 현대 마탑주도 비슷하게 살았다 했으니, 그만한 마법사들의 수명은 보통 사람이 가늠할 게 아닌가 봅…….”
공기가 무거워졌다. 야만인의 낯에 짙은 그늘에 덧씌워졌다. 던컨은 이럴 땐 곧바로 화제를 돌려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어 쭈뼛뿌뼛 말을 이어나갔다.
“그, 그런데 말입니다, 그…… 200년 넘게 그런 데 숨어 살았다면, 그 마법사도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지 않을깝쇼? 왜, 지난번에 아곤에서 본 할머님처럼 말입죠. 그런 작자들은 갑자기 돌변해서 뭔짓을 할지 모르는데…… 혹시 모르니 몰래 대비해놓지 않으면…… 거기다 대수림은 길도 무진장 복잡할 테고…….”
“…….”
“으흠, 그…… 역시 나으리 홀로 그자를 만나러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악의가 실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행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선의가 담긴 말이었다. 그러나 때론 무지한 선이 영악한 악보다 나쁜 결과를 낳을 때도 있는 법.
저 질문들로 인해, 카딤이 마음에 세웠던 둑이 무너지고 삿된 환각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쿠드드득, 쿠득, 쿠드드득…….
던컨의 살덩이가 진흙 반죽처럼 뭉그러지고 과거의 인물들로 엉망진창 재조립되었다. 한이 실린 속삭임이 중첩되어 고막을 웅웅 울렸다.
– ……대체 왜, 왜 우릴 버리고 떠났던 게냐?
– 내가, 아, 아무리, 떠, 떠나라고 말해도, 절대 가면 안 돼……. 계속 내 곁에 있어야 돼…….
– 어쩌면 그 정신은 이미 악마에 홀린 자나 광인의 것처럼 엉망진창 뒤틀리고, 썩고, 문드러졌을지도…….
– 천 년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는 강철을 빚으려면, 반드시 그 곁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어야…….
“…….”
카딤은 팔다리를 쇳덩이처럼 경직시켰다. 그나마 헛것이란 걸 자각할 정신머리는 남아 다행이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한 채 폐부를 쥐어짜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거라. 그보다 땔감이 떨어진 듯 한데, 내가 가서 모아오도록 하지.”
“예? 아, 아닙니다! 그런 허드렛일은 제가…….”
“아니, 내가 가겠다.”
“……”
아탈라의 심판을 끌러 들고 일어났다. 떠나는 내내 불안으로 점철된 시선이 뒤통수를 따갑게 했다.
일행의 눈이 닿지 않을만한 구석에 이르러 기도문을 외웠다. 누런 기운이 깃들어 불안정한 정신을 진정시켰다. 환상과 환청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신기의 부작용까지 어느 정도 추스른 다음, 땔감을 찾아나섰다.
어느 둔치의 꼭대기에 이르러 적당히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를 발견했다. 한 차례 땔감 거리로는 다소 과했으나, 모자란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런데 나무를 베어내려는 찰나, 난데없이 옹이 구멍이 갈라지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입이 튀어나왔다.
– 어디로 간 거야? 언제 돌아와? 왜 말도 없이 떠났어?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너무 괴로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다 니 잘못이야…. 다 니 잘못이야…. 다 니 잘못이야…. 깔깔깔깔깔깔….
……아직도 광증이 남아 있었나.
문득 불쾌한 기분이 치밀어 올라, 도끼 대신 맨 주먹을 휘둘렀다.
―――――― 퍼거걱 – !
쿠구구구구…… 쿠 – 웅!!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둥의 속살이 처참히 터져나가고, 아름드리 나무가 갓 자란 묘목처럼 손쉽게 꺾였다.
카딤은 단단히 뭉친 주먹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고위 악마를 하나 더 처치한 덕에, 그의 신체 능력은 이미 1회차의 절반 이상으로 강해졌다. 이 추세라면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1회차의 전력을 뛰어넘게 될 지도 몰랐다.
허나 그건 광증과 심마도 마찬가지였다.
차차 드러나는 과거의 진실들이, 날카로운 창날과 화살과 송곳이 되어 뇌리에 푹푹 꽂혔다.
옛 동료들이 살아 있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고통과 절망에 빠져 기약 없는 세월을 지새우길 바라진 않았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꾸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2회차의 모든 문제들은, 자신이 말없이 동료들을 떠나는 바람에 벌어진 걸지도 모른다는…….
카딤은 굳건히 믿어왔다. 모든 문제는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혹여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건 힘이 모자란 것이라고.
하지만 만일,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한다면.
모든 악마 위에 군림하는 대악마를 베어버리고, 끝없는 투쟁의 사명을 선사한 아탈라를 쓰러뜨리고, 세계를 관음하는 거짓된 엘가를 찢어발기고, 자신을 게임 속 세상에 떨어뜨린 근원마저 능히 으스러뜨릴 만한 힘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영원토록 투쟁하기로 맹세한 대전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잃은 이방인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수천 번 고통과 절망으로 담금질하고, 수만 번 시련으로 두들겨도 꺾이지 않는 강철도, 그 안에서부터 균열이 번지면 결국은 산산이 깨지고 말 터이니…….
카딤은 갈라진 쇳덩이 같은 표정으로 처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의 대양을 유유히 떠도는 초승달, 빛나는 월면을 가린 어둠이 고뇌하는 전사를 적요히 내려다보았다.
*
며칠간 홀연히 실종되었던 렘타나의 참사관, 엔리코 튜리스는 델루타나 북문 도개교 밑에서 숨 쉰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형, 펠리코 튜리스는, 안정을 취할 틈도 주지 않고 즉시 동생을 데려와 심문했다
펠리코의 형제애가 얄팍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미를 주기엔 이 천방지축 동생 놈에게 너무 많은 게 걸려있었다. 저택 집무실에서 한바탕 사정 청취를 마치고 난 후, 펠리코는 매캐한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후우…….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너를 납치한 건 에렌스코 대주교였는데, 그는 이미 모든 전후사정을 알고 있었고, ‘악마 학살자’의 구금을 거들라 협박한 다음 너를 풀어줬단 얘기냐?”
“그렇소이다, 형님. 그리고 대주교는 ‘데카그램’ 중 한 명을 파병했다고 확언했소. 절대 협박조의 허언으론 보이진 않았으니, 단단히 대비를 취해놓는 게…….”
“……늦었다. 에렌스코 대주교는 참사회에도 같은 말을 남겼어. 이미 한참 전에 국경과 운타나 상공에서 ‘광휘마’를 목격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
‘광휘마’는 아크팔라딘들에게도 주어지지만, 하늘을 나는 광휘마는 거진 ‘데카그램’의 전유물이라 봐도 좋았다. 엔리코의 낯이 점차 임종을 앞둔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갔다.
한데 왜인지 그의 형은 그리 급박해 보이질 않았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 펠리코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그 말에 탄 기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더군.”
“…….”
“다른 관할령에도 다 연락을 취해봤는데 피해를 입은 곳은 없었어. 정말 ‘데카그램’이 공격했다면 흔적이 안 남을 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게다가 ‘악마 학살자’의 시신을 봤다는 사람도 전혀 없었고…….”
“…….”
표면적으론 안도할 만한 소식이었다. 허나 엔리코는 안도하는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교교하게 번뜩이는 눈빛을 마주하곤, 펠리코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 행동 자체가 하나의 전언이었겠군요.”
“후우, 그래…….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칼날이 목덜미를 스쳤는데 안 죽었다고 기뻐할 순 없는 노릇이지. 한번 규칙을 어긴 이상, 이제부턴 언제 다시 ‘데카그램’이 동맹령에 침범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됐어.”
“…….”
동맹령에 깊숙이 침범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데카그램’은 제 몫을 다했다. 그 순회가 동맹에 시사하는 바는 명백했다. 제국은 언제든 너희의 땅에 들어서 종말을 인도할 수 있음을, 자비와 타산으로 존속한 걸 자력으로 생존한 걸로 착각하지 말라는 단연한 경고.
……‘진실을 꿰뚫는 별’ 헨다르크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들로선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그 경고에 대처할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제국 앞에 배를 드러내고 쓸개까지 내어주거나, 이빨을 갈고 발톱을 벼려 전면 충돌에 대비하거나.
물론 전자는, 이미 제국과 척을 지고 ‘악마 학살자’란 패를 떠안기로 결심한 튜리스 형제에겐 고르는 게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후우,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인지 모르겠군. 고작 타지에서 온 용병 하나 지키겠다고 제국과의 전쟁을 불사하다니…….”
“아니, 어차피 언젠간 벌어졌을 일이오, 형님. 악마들 탓에 잠시 물러난 척했을 뿐, 제국은 한시도 동맹을 향한 야욕을 꺼뜨린 적이 없소. 굳이 악마 학살자가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통치권을 수복하려 들었겠지.”
“…….”
맞는 말이었다. 펠리코는 동생의 의견에 수긍했다. 그들은 구차하게 엎드릴 방법을 찾는 대신, 전쟁을 대비할 방법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델루타나 참사회를 포섭하고 조율하고 군사화하는 역할은 거물급 중진 의원인 펠리코의 몫이었다. 그러나 델루타나 하나만으론 절대 무리였다. 갈렌타나와 베스타나, 두 대도시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결단코 동맹이 제국이란 거인에게 맞서는 건 불가능했다.
“갈렌타나는 황금 가도의 창궐로 큰 피해를 입었으니, 거액의 지원금을 미끼로 뿌리면 덥썩 물 거다. 물론 제국과의 전쟁을 대비한단 저의는 숨겨야겠지. 정말 문제는 베스타나 쪽인데…….”
“그거라면 걱정 마시오. 이번에 물밑 협상을 벌이다 세실리온이란 고위 마법사에게 연줄이 닿았소. 내가 그자를 통해 어떻게든 마탑 쪽에 물꼬를 터보겠소. 유미르의 죽음에 관해선 보다 철저하게 은폐하고…….”
전면전으로 간다 해도 아예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교단도 각지에 흩어진 성기사들과 ‘데카그램’을 바로 총동원하진 못할 테고, 이쪽은 한 가지 비장의 패를 마련해두었으니.
‘악마 학살자’ 카딤.
베스타나로 보낸 심복, 펠드릭이 전언을 무사히 전하면 그를 데카그램에 맞설 전력으로 동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전쟁은 누군가 일기당천을 벌이거나, 적들을 죽이기만 하면 끝나는 난투극이 아니니까.
“형님, 그럼 가장 시급한 문제는 델루타나의 방호일 듯하오. 여긴 제국령과 가장 인접한 대도시인데, 상시 동원 가능한 병력이 참사군밖에 없지 않소? 당장 어떻게든 이곳을 지킬 파수꾼들부터 보충해야…….”
“…….”
펠리코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난제에 맞닥뜨린 것보다는, 매우 유용한 골칫덩이를 떠올린 것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게 말이다, 엔리코. 으음, 이것 참…… 뭐라 말해야 할지……. 그, 네가 실종된 사이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들을 어떻게 잘 구슬리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지도…….”
“……?”
“……아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더 확실하겠지. 이리 따라오거라.”
엔리코는 의아한 기색으로 펠리코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대저택의 별관, 귀빈들이 묵는 구역에 이르렀다. 평상시엔 쥐 죽은 듯 조용했던 곳이 어째서인지 축제라도 연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연회장 겸 집회실의 문을 벌컥 열자 방문한 손님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엔리코는 두 눈을 의심하며 멈춰 섰다.
날카로운 문신을 새긴 구릿빛 피부의 전사들, 그리고 텁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거한.
매서운 시선과 급작스런 침묵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으나, 펠리코는 개의치 않았다. 거한을 향해 휘휘 손을 흔들며 다른 손으론 동생을 가리켰다.
“이보게, 자네가 찾던 사람이 왔네. 이쪽이 바로 내 동생인 엔리코라네. 그 뭐, 내 동생에게 보여 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
그 말에 거한이 벌떡 일어났다. 엔리코는 당장 뒤돌아 달아나고픈 충동을 느꼈으나,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태연한 척 자리를 지켰다.
쿵쿵, 세차게 바닥을 울리며 다가온 거한은, 엔리코의 목전에 와선 의외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찾았군. 만나서 반갑소, 엔리코 참사관. 나를 보낸 분께서 이르시길, 이걸 보여 주면 그대가 알아보고 우릴 도와줄 거라 하셨는데.”
그가 내민 건, 참사회의 문장이 찍힌 구깃구깃한 서류.
황금 가도의 통행증. 자신이 몇 달 전에 카딤에게 발급해 주었던 통행증이 분명했다. 엔리코는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이걸, 당신이 어떻게 갖고 있는 거요……?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카딤 공과는 또 무슨 관계고…….”
거한은 투신의 이름에 맹세하듯 엄숙하게 고했다.
“나는 불굴의 군세의 수장이자 구호의 사명을 받은 자, 골타란.”
“…….”
“……지금은 쓰지 않는 이름이지만, 한때는 ‘아곤의 성난 뿔’이라 불리었소.”
이미 충분히 커다래진 엔리코의 눈동자가, 익힌 빵 반죽처럼 한층 더 커다랗게 부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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