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그런 친구 하나쯤 (2)
사내아이들은 대개 싸우고 겨루는 놀이를 좋아한다.
이 동맹령의 작은 마을, 몰타나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곳의 아이들은 좀 더 본격적인 편이었다. 몰타나엔 대도시의 암흑가에서 굴러먹던 용병들이 꽤 있었다. 그들이 지껄인 무용담과 용병들에 관한 얘기는, 아이들이 밋밋한 전쟁놀이를 벗어나 더 풍부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기폭제가 되어주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십여 명의 아이들이 마을 근처의 숲에 모였다. 바로 용병 역할극을 하기 위해.
까불대던 아이 하나가 나무 막대를 집고 너른 바위 위로 올라섰다.
“나는 ‘북부의 창’이다! 나는, 엄청, 엄청나게 창을 잘 다루고, 또, 아무나 막 찔러 죽인다! 엄청 무서운 괴물들도 나를 만나면 막, 무서워서 막 그냥, 벌벌 떤다!”
아이가 빈약한 알통을 뽐내었다. 무리에서 킬킬,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북부의 창’이 내려온 후, 다른 아이들도 차례대로 무기를 집고 바위에 올라섰다.
“나는 ‘핏빛 칼날’! 내 칼은 절대로 적들의 목숨을 살려두지 않지! 내게 덤비려거든 죽음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난 ‘그물 포식자’다! 나의 쇠 그물에 걸리면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어!”
“나는 ‘아곤의 성난 뿔’이다……. 나보다 강한 야만인은 세상에 거의 없다……. 그, 딱 한 명만 빼고…….”
이름 날리는 용병들, 그리고 유명 검투사들의 이명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원하던 이명을 차지한 아이들은 제 역할에 완전히 몰입했다. 무기는 나무와 새끼줄로 만든 조악한 모조품이었으나 표정만큼은 진짜 용병처럼 사뭇 진지했다.
그러나 거의 마지막 직전에 올라온 아이는 원하던 이명을 차지하지 못했다.
“우워어어!! 나는 ‘악마 학살자’다! 나는 아무도 못 막는 최강의 용병이다!! 어젠 저녁 식사로 악마들의 머리통을 뽑아서 잘근잘근 씹어먹…….”
퍽 – !
돌연 다음 차례에 있던 덩치 큰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바위 위의 아이는 균형을 잃고 무참히 나동그라졌다. 덩치 큰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고 시선을 깔았다.
“뭐 하는 거야, 등신아? 내가 어제도 말했잖아. ‘악마 학살자’는 나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아얏! 으윽…… 아, 대장! 벌써 며칠째 대장만 ‘악마 학살자’ 하고 있잖아! 나도, 나도, 오늘 딱 하루만 ‘악마 학살자’ 해보면 안 될‥.”
“어쭈, 씹새끼가? 말이 많네?”
퍽! 퍽!
아이들의 대장, 휴렉은 가차 없이 쓰러진 아이의 콧등을 내리찍었다. 그러곤 억지로 나무 도끼를 빼앗고 ‘악마 학살자’의 이명을 차지했다. 코피를 질질 흘리며 울던 아이는 결국 그다지 인기 없는 이명, ‘비열한 사냥꾼’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비열한 사냥꾼’은 그나마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아예 용병 역할, 아니, 사람 역할도 맡지 못한 아이도 있었으니.
“저, 나는…….”
“아, 뭘 물어봐! 너는 오늘도 악마야! 멍청하고 사악한 허접 악마! 이제부터 사람 말 하지 말고 악마처럼 울어!”
“…….”
조그만 꼬마, 던센은 고개를 푹 숙였다.
현실과 달리, 여기서 악마는 맨몸으로 도망치다 용병들에게 두들겨 맞기만 하는 역할이다. 던센은 손가락을 꼼질대며 겨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대장…… 나, 오늘만 악마 말고 다른 거 할래……. 나, 지금까지 악마 말고 다른 건 해본 적 없으니까……. 딱 오늘 하루만 다른 거 하면 안 될…….”
“…….”
“…….”
다른 아이들이 도끼눈을 뜨고 정색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표정을 지은 건 단연 휴렉이었다. 던센은 어깨를 움찔 떨고는 옹송그렸다. 그제야 말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뭔 소리냐.”
“……어?”
“뭔 소리냐고, 씨팔. 장난하냐, 지금? 니가 안 하면 누가 보고 악마 하라고 시킬 건데. 내가 하리, 어? 내가 하리?”
“…….”
나무 도끼가 달걀이라도 깨 먹듯 툭툭 머리통을 건드렸다. 곧 던센의 눈가에 울먹울먹 물기가 고였다. 그 꼴을 본 휴렉은 눈살을 찌푸리고 질색했다.
“어휴…… 이 찌질이 새끼, 또 질질 짜고 자빠졌네……. 알았다. 그럼 딱 오늘 하루만 악마 말고 다른 거 시켜줄게.”
“지, 진짜? 고, 고마워, 대장……! 그러면 나, 어떤 용병하면…….”
“대신 고블린해.”
“……어?”
“고블린 하라고, 고블린. 다른 애들처럼 이명도 줄게. 이명은, 그 뭐냐…… 너네 애비가 집 나가서 죽었으니까…… 그래, ‘애비 없는 고블린’이라고 하면 되겠다.”
“푸핫!”
“푸흐흐흡…….”
잠자코 구경하던 무리가 조소를 터뜨렸다. 계속 풀 죽어있던 던센이 처음으로 발끈하여 나섰다.
“우, 우리 아빠 안 죽었어! 돈 많이 많이 벌려고, 머, 멀리 멀리 가셔서 아직 못 돌아오신 거야! 우리 엄마가 늦어도 이번 겨울까진 꼭 돌아오실 거라고…….”
“아니, 사람 말 하면 안 되지, 새끼야. 너 이제 고블린이라니까?”
퍽 – !
“아악!”
그 미약한 항의는 너무나도 쉽게 묵살되었다. 나무 도끼에 마빡을 찍힌 이후, 던센은 더 이상 사람의 말을 내뱉지 못하게 되었다. 휴렉은 킬킬, 음험한 조소를 흘리며 다른 아이들을 돌아봤다.
“제군들! 나, 최강의 용병인 ‘악마 학살자’의 이름으로 명하겠다! 오늘 우린 악마를 토벌하지 않는다! 대신 특별히 ‘애비 없는 고블린’을 사냥한다! 자, 복창해 봐라! 뭘 사냥한다고?”
“애비 없는 고블린!”
“애비 없는 고블린! 애비 없는 고블린!”
“그래, 좋다! 사냥에 포상이 없어선 안 되겠지! 애비 없는 고블린을 가장 먼저 붙잡고 두들겨 팬 자에겐, 다음번에 제일 먼저 원하는 용병을 고를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와아아아아아아!!””
아이들은 가짜 무기를 쳐들고 우르르 목표물을 뒤쫓았다. 멋 모르는 어른들은 흐뭇하게 볼 만한 광경이었으나, 그 속내엔 정제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악의가 깃들어 있었다.
“이리 와라, 이 애비 없는 고블린아!”
“당장 안 멈추면 너희 애미까지 없애 주겠다!”
“키잉, 키이잉, 키이잉…….”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만을 오매불망 기다려 온 어느 행상인의 아들은, 잔뜩 겁에 질린 고블린을 흉내 내며 허둥지둥 숲속으로 달아났다.
*
율리아는 동맹령의 시골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낙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현재 그녀는 남들보다 좀 더 불행한 여인이 되었다. 반년 전, 큰돈을 벌겠다고 멀리 상행을 떠난 남편이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이제 그녀의 뒤로는 청상과부란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
그래도 율리아는 좌절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거액의 빚을 갚고, 하나뿐인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그럴 틈이 없었다. 오늘도 삯빨래를 하기 위해 빚을 진 마을 유지, 사무관의 저택에 출근한 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신의 도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저, 로레인 양……? 창고에 있던 제 빨랫방망이가 사라졌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허,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빨래하는 사람들한테나 가서 물어볼 것이지…….”
까탈스럽게 생긴 하녀가 톡 쏘아붙이곤 제 갈 길을 갔다. 율리아는 입술을 짓씹다가 일단 빨랫감을 떠안고 개울가로 나섰다.
“아니, 그 멍청한 여편네는 아직도 제 남편이 돌아올 줄 알고 있더라니까?”
“어휴, 돌아오긴 무슨……. 다른 여자랑 눈 맞아서 새살림 차린 게 뻔한데…….”
“어머, 새살림이요? 그 쪼그맣고 볼품없게 생긴 아저씨가 무슨 능력으로요? 분명 멋모르고 국경이라도 넘었다가 잡혀간 거…… 엇.”
“…….”
빨래를 하러 온 건지, 호박씨를 까러 온 건지, 참새처럼 조잘대던 여인들이 율리아를 보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 얘기를 하던 건지 안 봐도 뻔했다. 율리아는 들끓는 속을 억누르고 뚜벅뚜벅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메델 부인, 혹시 제 빨랫방망이 못 보셨나요. 어제 사무관님댁 창고에 두고 왔는데.”
“어머…… 그거요? 오르탄 씨네 둘째 딸이 빌려 가는 것 같았는데, 으음, 쓰고 제자리에 안 돌려놨나……?”
“…….”
뭔가 미심쩍었지만 다른 단서가 없었다. 율리아는 재깍 오르탄의 집으로 찾아갔다. 허나 거기선 빌려 간 적 없단 대답만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른단 말을 듣고 그쪽으로 가봤으나 또다시 허탕.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물어가며 마을을 한 바퀴 순회하고 나서야, 율리아는 겨우 제대로 된 단서를 얻었다.
“아, 그 빨랫방망이? 그거, 아침에 창고에서 메델 부인이 꺼내 가는 것 같았는데?”
“…….”
산만 한 빨래 바구니를 떠안고 뒤뚱뒤뚱 다시 개울가로 돌아왔다. 율리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처음 방망이의 행방을 물어봤던 여인, 메델 부인이 든 빨랫방망이가 바로 자신의 것이란 걸.
왜 멋대로 가져가고 모른 체 했냐고 추궁하자, 그녀는 깜짝 놀란 척 연기를 했다.
“어머어머,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서 어떡하죠, 부인? 내 거랑 너무 똑같게 생겨서 착각해버렸네~”
“……부인이 원래 쓰던 거랑은 색깔부터 다른데 어떻게 착각을 했다는 거예요?”
“어머?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사람이? 누가 들으면 내가 일부러 가져간 줄 알겠네……. 뭐, 아무튼 빨랫방망이 잘 빌려 썼고, 우린 이만 가볼 테니 수고해요~”
“…….”
메델 부인은 태연하게 방망이를 내려놓고 다른 부인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율리아는 주먹을 꾹 쥐고 지근지근 울분을 삭였다.
예상치 못한 사건 탓에 해질녘이 다 돼서야 빨래를 마쳤다. 이렇게 빨래가 늦으면 언제 다 말리냐고, 저택에서 한바탕 하녀장의 호통을 듣느라 또 시간을 끌었다. 율리아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땐 벌써 깜깜밤중이었다.
“……던센, 집에 있니?”
“…….”
여덟 살배기 아들내미는 평상시처럼 어두운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제 아비가 떠난 뒤론 늘 저기가 제 자리였다. 율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엄마가 늦어서 미안……. 많이 배고프지? 지금 바로 저녁 만들어 줄 테니까…….”
“아니, 나 안 먹을래.”
“……어?”
“나 밥 안 먹을래. 배 안 고파.”
문득 느껴지는 꺼림칙한 예감.
율리아는 곧 아들의 몸이, 또다시 온통 멍과 상처로 얼룩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세상에, 던센! 또, 또 누가 이런 거야? 누가 이랬어? 이번에도 그 같이 놀던 걔네들이 그런 거야?”
던센은 묻는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목이 메어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엄마아……. 아빠, 죽은 거야?”
“……뭐?”
“애들이 우리 아빠 벌써 죽었대……. 나보고, 나보고 애비 없는 고블린이래……. 아빠, 정말 이번 겨울까진 돌아오는 거 맞아, 엄마?”
“…….”
말문이 턱 막혔다.
다른 때였다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냐고, 이번 겨울까진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늘 하던 하얀 거짓말을 내뱉었을 터. 하지만 오늘 하루 너무 지치고 충격받은 율리아는 바로 대답을 내놓질 못했다.
그러자 던센이 와지끈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후다닥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던센! 던센!”
아무리 불러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망연히 어둠 속을 바라보다 철푸덕 주저앉는 율리아.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따라갈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매일매일이 바닥없는 늪으로 푹푹 가라앉는 기분인데.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는 게 힘들 것은 각오했다. 그러나 현실은 각오한 것보다 수백 배는 더 가혹했다. 진이 다 빠지는 중노동,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내는 이웃들, 시시각각으로 빚 독촉을 하는 사무관의 용병들과 비협조적인 하녀들, 온 세상이 집요한 악의를 갖고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여전히 남편이 돌아오리란 희망을 놓질 않는 어리석은 자기 자신.
“…….”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늦어도 석 달에 한 번은 돌아왔던 남편이다. 반년이나 소식이 없다는 건…… 틀림없이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단 뜻이겠지.
그래도 삶을 포기할 순 없었다.
고통받는 건 자기 혼자로 족했다. 저 가련한 핏덩이에게까지 무거운 짐을 물려줄 순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주저앉아 있어서만은 안 됐다. 율리아는 다시 한번 심지를 굳게 다지고, 벌떡 일어나 아들의 뒤를 쫓았다.
“던센, 던센! 어디 갔니! 위험하니까 어서 돌아와!”
한데 마을 어귀의 숲을 헤매던 율리아는, 곧 전혀 상상치 못한 인물들과 마주했다.
염소 같은 턱수염을 매단 왜소한 사내, 그리고 사람이 맞나 의심 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덩치를 지닌 야만인.
보통 이럴 땐 야만인 쪽에 눈길이 가야 정상이겠지만, 율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롯이 왜소한 사내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마주한 이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천치처럼 눈만 끔뻑이던 사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함지박만 한 미소를 떠올렸다.
“유, 율리아……! 어떻게 알고 여기에……! 보, 보고 싶었…… 그, 그동안 잘 지냈…….”
철썩 – !
“……엑.”
날벼락 같은 손길이 오른뺨에 직격했다. 던컨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얼굴을 어리벙벙하게 바라봤다.
“어디 갔다가 이제 돌아오는 거야, 이 날벼락 맞고 얼어 처죽을 화상아!!”
“…….”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자, 대전사의 피를 나눠받은 동료, 아곤의 성난 뿔과 싸워 승리한 전사, 투기장의 제왕의 전 재산을 갈취한 협잡꾼, 그리고 마탑을 염탐하여 마나와 마석과 마탑주의 비밀을 밝힌, 최고의 길잡이.
화려한 업적을 쌓고 고향에 돌아온 던컨이 처음으로 마주한 건, 천추의 한이 실린 아내의 뺨따귀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