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그런 친구 하나쯤 (9)
던컨 일가는 몰타나를 떠나기로 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집은 멀쩡해도 인근이 초토화돼 버렸으니까. 현재 던컨의 집은 망망대해의 무인도 같은 꼴이었다.
아쉬움은 없었다. 어차피 그렇잖아도 떠나려고 했던 마을이다. 정든 이웃들과의 추억 따윈 있었던 적도 없었다. 사무관과 그 수족들이 몰살당했으니 뒤끝이 남을 걱정도 없었다.
게다가 이사 갈 행선지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디로 갈 건데요, 던컨?”
“델루타나. 우린 델루타나로 갈 거야, 율리아”
“……델루타나요? 뜬금없이 그렇게 큰 도시는 왜요? 거기에 뭐, 보물이라도 묻어놨어요?”
던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물이라, 그건 지나치게 약소한 단어였다. 도시 하나를 쥐락펴락하던 대부호의 재산을 표현하기에는.
떠나기 전, 무너진 사무관 저택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붕괴한 잔해를 치우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카딤은 순식간에 벽돌 무더기를 밀어버리고, 지하실에 덩그러니 놓인 인벤토리와 금화 궤짝을 되찾았다.
잔해를 뒤지던 중 뜻밖의 수익도 있었다. 용병단장 알루벤이 쓰던 칼. 카딤은 잠시 그걸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보니 낯설지 않은 무기였다. 일레니아, 그리고 마굴에서 본 애꾸눈도 이렇게 검신이 투명한 칼을 쓰지 않았나? 혹여 이것도 잊힌 신의 성유물인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누가 이걸 잘 써먹을지는 분명했다. 카딤은 화려한 검집까지 찾아 수납하여 칼을 던컨에게 건넸다.
“이건 네가 갖거라, 던컨.”
“예? 어? 이, 이 칼은…….”
“황야의 계율 아래 전리품을 취하는 건 승자의 정당한 권리지. 그리고 그 전리품은 응당 세운 공헌에 따라 분배되어야만 하고.”
“하, 하지만 그 용병단장은 나으리께서 힘겹게 쓰러뜨리셨는데…….”
“너는 네 투쟁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다시금 네 가치를 입증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전리품을 나눠 받을 자격이 있지. 그리고 이 무기는 나보단 네 전투 방식에 훨씬 어울린다.”
헤벌레 입을 벌리길 잠시, 던컨은 후다닥 칼을 받들었다. 마치 대주교에게 신병을 하사받는 성기사처럼 엄숙하게. 감격 받은 눈동자가 별 무리를 품은 호수처럼 은은한 빛으로 일렁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몰타나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밤.
여러 일이 연달아 터져 한동안 자식과 대화할 시간도 없었다. 던컨은 모처럼 교외의 숲으로 나와, 아들과 오붓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 아빠가, 그 ‘아곤의 성난 뿔’과 혈투를 벌여서 이겼다니까? 아곤의 성난 뿔이 가슴을 싹 베어내서 아빠가 쓰러졌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무기를 감추고 기습할 기회만을 노리다가…… 방심하고 가까이 왔을 때…… 벌떡 일어나서 발등을 콱!”
“와아…… 진짜예요, 아빠?”
“당연히 진짜고 말고! 증거도 있단다! 보여 줄게, 여기 가슴에 흉터가……. 아, 맞다. 그날 다 나았지…….”
사사건건 ‘에휴, 당신이 아니라 저 용병분이 하셨겠죠……’하고 빈정대는 아내와는 달랐다. 던센은 증거 없이도 제 아비의 말을 다 믿어 주었다. 던컨은 간만에 신이 나서 줄기차게 무용담을 풀어놓았다.
그렇게 거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줬을 즈음, 던컨은 문득 숙연해지고 말았다. 자신이 자릴 비운 동안, 이 순진하고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했을지가 눈에 훤했기에.
던컨은 부드럽게 아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던센…… 미안하다. 아빠가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지?”
“으음…… 조금 힘들긴 했는데요, 이젠 안 그래요. 이렇게 아빠도 돌아왔고, 카딤 아저씨가 발가락을 잃지 않는 법도 알려줘서요.”
“……?”
뭔 소린가 싶었는데, 아마 카딤의 도움으로 사무관의 아들을 혼쭐내 준 얘기인 것 같았다.
던컨은 앞으로 다른 친구에겐 그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던센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곤 올망졸망한 눈길을 보내다, 문득 이렇게 물었다.
“아빠는요, 저랑 엄마 없는 동안 많이 안 힘들었어요?”
“……나? 어휴, 왜 안 힘들었겠어! 너희 엄마랑 너도 보고 싶고, 길바닥이 아니라 집에서 편히 쉬고 싶고, 그래서 엄청 힘들고 고달팠지!”
“진짜요? 그런데요, 아빠가 방금 전에 카딤 아저씨랑 같이 여행 다닌 얘기할 때, 되게 눈빛이 반짝반짝했어요.”
“…….”
“아빠가요, 엄마랑 처음 만났을 때나, 저 태어났을 때 얘기해 주실 때처럼, 그렇게 되게, 눈빛이 반짝반짝했어요.”
“…….”
던컨은 잠시 멈춰 섰다. 그러다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아들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카딤과 함께한 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단했으나, 또 그만큼 값지고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유약한 행상인에서 투쟁을 감당하는 자로 성장하며, 고강한 전사에게 제 삶의 가치를 인정받은 시간. 아마 자신이 이번 생에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다시 겪을 일은 없겠지.
한데 흐릿하게 미소 짓고 눈길을 내리는 순간, 던센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빠, 저, 이제 다 컸어요. 키도 아빠 앉은 키보다 훨씬 크고요, 알통도 이렇게 나왔어요. 그리고 이제 저 괴롭히는 애들한테 맞설 줄도 알고요!”
“……?”
“엄마도요, 엄청나게 강해졌어요. 맨날 뭐라 하던 아줌마들도 이젠 엄마한테 꼼짝도 못 해요. 다들 싸대기 맞을까 봐 무서워서 뭐라고 말도 못 붙여요!”
“…….”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생각하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다시 떠나도 괜찮다고, 우리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아들이 자신을 안심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던컨은 목이 부러져라 도리질을 했다.
“아냐, 아냐, 아냐, 던센. 아빠가 또 떠나진 않을 거야. 너희 엄마하고 널 두고 대체 어딜 가겠니? 아무리 그게 특별한 시간이었다 해도, 아빠한텐 가족이 더 소중하니까…….”
“아빠.”
던센이 돌연 어두운 낯빛을 했다. 발끝으로 흙을 쓸며 머뭇거리다, 속에 꾹꾹 눌러 놨던 말들을 털어놓았다.
“카딤 아저씨가요, 혼자 있을 땐 가끔씩 이상해져요……. 제가 몰래 따라가서 봤는데, 바위에다 엄청 세게 머리를 박기도 하고요, 뭔가를 벌컥벌컥 마시고, 중얼중얼 혼잣말하고, 노란 연기 같은 걸 뿜고, 손가락을 막 뒤로 꺾기도 하고…….”
“……!!”
“그래서요, 많이 걱정돼요. 카딤 아저씨가 없었으면 저하고 아빠하고도 많이 위험했을 텐데…… 이번엔 아빠가 가서 아저씨 도와주면 안 돼요……?”
“…….”
“‘친구’가 많이 힘들어하면 가서 꼭 도와주라고, 아빠가 저한테 옛날에 그랬잖아요.”
아들의 목소리엔 순수한 우려와 간곡함이 실려있었다. 그러나 던컨은 쉬이 답하질 못했다. 실어증에 걸린 듯 어물거리며 초점 없이 멍한 눈빛만을 보냈다.
친구, 친구라니……. 많이 힘들어하면, 도와주라니…….
휘영청 중천에 떠오른 달빛이 서편으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까지, 계속 그러고만 있었다.
*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던컨 일가는 떠날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어디, 옷이랑 먹을 건 다 챙겼고, 다른 짐도 다 챙겼고…… 좋아요. 슬슬 출발하죠, 던컨.”
“……어? 어어, 그래, 그래, 가야지. 어어.”
“음? 당신 어제부터 왜 그래요? 정신머릴 딴 데 두고 온 사람처럼…….”
“어, 아냐, 아냐. 던센, 어서 가자. 나, 나으리도 마을 밖까진 저희랑 같이 가시죠.”
“…….”
던컨 부자와 카딤이 짐을 들고 앞장섰다. 율리아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며 뒤따랐다.
지긋지긋한 이웃들과 마주칠 일 없도록 떠나는 시간대는 새벽으로 골라잡았다. 보금자릴 잃은 주민들은 죄다 길바닥에 노숙하는 중이었다. 거적때기를 이불 삼아 덮고, 그것마저 없는 사람은 낙엽 무더기를 덮은, 처량한 모습들.
그래도 지금이 그나마 나을 때였다. 곧 겨울이 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쓰라린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 던컨 일가는 잠시 복잡한 심정으로 이웃들을 흘겼으나, 인과응보라 생각하곤 이내 눈길을 돌렸다.
카딤과는 마을 밖으로 나오자마자 갈라져야 했다. 델루타나는 북서쪽에 있고 대수림은 남동쪽에 있어, 서로 갈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던컨 일가는 차례대로 작별 인사를 남겼다.
“휴우, 참,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긴 했는데…… 그래도 그동안 저희 못난 남편하고 아들하고 잘 돌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용병님의 남은 여정에 레밀리온 님의 황금 같은 축복만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카딤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 발가락 지키는 법 알려주시고, 약속대로 나쁜 어른들이 잡아갔을 때 구해주셔서…… 많이 감사합니다.”
“나으리…… 저…… 그…… 그동안 정말 많이 신세 졌고…… 약속도 다 지키고, 돈도 많이 주셔서 감사하고…… 저, 그, 그게…….”
행상인이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지만, 야만인은 늘 그렇듯 간소하게 작별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 잘 가거라. 너희들의 앞날에 아탈라의 투지가 함께 하길 빌지.”
딱 그렇게만 말하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떠나는 카딤.
던컨은 황망하게 정지했다.
지나치게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조만간 재회하지 않을까 착각이 들 정도. 그러나 이건 틀림없이 영구적인 작별이었다. 천운이 따라주지 않는 한, 이번 생에 다시 만날 기회 따윈 없을 그런 작별.
반대편을 향해 가면서도 던컨은 도무지 고개를 돌릴 줄 몰랐다. 그 꼴을 몇 번이고 흘겨보다가, 율리아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따라가요, 던컨.”
“……뭐?”
“따라가라고요, 저 용병분. 더 늦기 전에, 지금 바로.”
“어? 아, 아냐, 아냐, 아냐, 율리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린 델루타나로 가야지. 자, 어서 가자, 던센!”
던컨은 아내가 가족에 소홀한 것에 화가 나 빈정대는 줄로만 알았다. 허나 율리아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던컨, 빈말도 아니고, 비아냥도 아니에요. 난 남자들의 세계는 문외한이라서, 당신이 그러는 이유가 정확히 뭔진 모르겠어요. 뭐, 의리 때문인지, 선망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셋 다인지…….”
“…….”
“근데 지금 당신 눈빛만큼은 익숙하네요. 딱,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그때랑 비슷한 눈빛이야. 지금 저 사람을,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그런 눈빛.”
자신이 정말 그랬냐는 듯, 던컨이 얼빠진 표정으로 눈망울을 껌뻑였다.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듯, 율리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저분과 함께하고 나서 당신, 조금 더 남자답게 멋있어지긴 했어요. 막, 헛소리하는 옆집 아저씨 업어 매칠 땐 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그거 봐서 딱 이번 한 번만 더 봐줄 테니까, 맘 바뀌기 전에 얼른 쫓아가요. 괜히 빼다가 두고두고 후회하지 말고.”
“…….”
“던센이랑 제 걱정은 하지 말고요. 델루타나는 뭐…… 근처 도시에서 호위를 구하거나, 상단 행렬에 낑겨서 가면 되죠. 어차피 대도시라 거기 가는 사람이야 널렸을 텐데. 아, 물론 기왕 또 남편 빌려주는 김에, 이번에도 대여료 잔뜩 받아오면 더 좋고.”
짐짓 태연한 척 농지거리를 던지는 율리아. 던컨은 그런 아내를 빤히 바라보다가, 감정이 북받쳐 올라 꾹 끌어안았다. 율리아는 질색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결국은 마주 끌어안고 등짝을 두들겨주었다.
“율리아, 델루타나에 가면 ‘골타란’이란 사람을 찾아. 나으리만큼 덩치가 큰 분인데, 아탈라인 전사들로 이루어진 무리를 이끌고 있을 거야. 내 이름을 대고 그 처자식이라 말하면 알아서 잘 대접해 줄 텐데… 만일 못 믿는 기색이면 나으리의 이름을 대거나, 내가 전에 말한 ‘아곤의 성난 뿔’과 싸웠던 얘기를 해주면 되고….”
“그래요, 알았어요. 당신도 몸조심하고,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마시고요. 던센, 아빠 다시 가신다.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고마워요, 아빠……. 잘 다녀오세요.”
한시름 덜고 배시시 웃는 아들도 꾹 끌어안았다. 아니, 아예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려 셋이서 함께 포옹을 나눴다. 기나긴 세월이 무정하게 흐르더라도 잊지 않도록, 서로의 온기를 심장 깊이 새기는 순간.
그렇게 가족과 작별을 마친 후, 던컨은 발바닥에 땀띠가 나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 허억, 허억, 허억…….”
다행히 아직 멀리 가지 않아, 채 일각이 지나기 전에 뒤따라 잡을 수 있었다. 카딤은 해괴한 생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헐떡대는 던컨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뭔가 용무가 남았는가.”
“아, 아닙니다! 허억, 허억, 나으리와, 나으리와 여정을 계속 함께하려고 돌아왔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네 소임은 끝났다. 돌아가서 네 가족들이나 지키거라.”
“허억, 허억, 케헥, 켁! 아닙니다! 제 가족들은, 제가 없어도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으리는, 허억, 허억, 도무지 괜찮을 것 같지가 않아서…….”
“……뭐가 괜찮지 않다는 거지.”
무거운 육성이 귓전에 파고들었다. 던컨은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숨을 돌렸다.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먼저 꺼내 들었다.
“나으리, 혹시 최고의 길잡이가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제가 앞으로도 쭉 앞길을 안내할 테니까…….”
“필요 없다. 대수림까진 그냥 이 길만 따라가면 되니까.”
“그, 그러면, 혹여 짐꾼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싸울 때까지 계속 가방을 메면 거추장스러울 텐데…….”
“필요 없다. 그때만 잠깐 내려놓으면 되니까.”
“그, 그렇다면, 악마의 피를 받거나, 요리를 하거나, 땔감을 모으거나…… 그런 허드렛일을 도맡아 할 잡부는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 없다. 그건 전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는 말마다 칼 같은 대답이 떨어졌다. 초조함이 혈관을 타고 쿵쾅대는 심장을 향해 심지처럼 타들어 갔다. 이러다, 이러다가…… 정말로 퇴짜맞고 쫓겨나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으리가 미쳐 날뛸 때, 누가 그걸 진정시키지?
앞으로 내 삶의 가치는…… 대체 누가 증명해 주지?
던컨은 결국, 잠깐 미친 척하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나으리가!!! 지병 때문에!!! 미친 개망나니처럼 날뛰고 있을 때!! 바위에 대가리를 처박고, 제 손가락을 마구 꺾고, 제 팔뚝에 줄줄이 칼집을 새길 때!! 아주 눈에 뵈는 것도 없이 싹 다 처죽이려고 들고 염병할 깽판을 치고 있을 때!!! 정신이 번쩍 들게 귀싸대기를 날려주고 찬물을 양동이째 부어 줄, 그런 ‘친구’는 필요 없으십니까!!!”
“…….”
외침이 끝나자 찾아드는, 파멸적인 정적.
살벌한 구릿빛 낯짝이 대번에 화석처럼 굳었다.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던컨의 얼굴이 가뭄 든 땅바닥처럼 쩍쩍 갈라졌다. 실언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사람 머리통을 호두알보다 쉽게 깨부수는 사람 앞에서 어찌 이런 미친 망발을 지껄일 수가…….
하지만 카딤이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친구, 친구라…….’
동료도, 일행도 아니고 ‘친구’라니.
유치하고 어색한 울림이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론 거의 듣질 못한 낯간지러운 단어였다. 인간이고 악마고 닥치는 대로 처죽여 피의 수라도를 만들어온 광전사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낱말이었다.
하지만 카딤은, 그 유치함이 썩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정말로 광증에 미친 자신까지 막아설 수 있는 각오라면.
“……그런 친구 하나쯤, 있어서 나쁠 건 없지.”
“……!”
“만만찮은 여정이 될 거다. 마음 단단히 먹어 두거라, 던컨.”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떼는 두 사람.
행상인은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지도를 꺼내 들었다. 야만인은 피식 실소를 터뜨리곤 짐가방을 고쳐맸다. 어느덧 동이 터올라, 밤새 세상의 저편에 잠겨 있던 태양이 지평선 위로 슬그머니 그 눈길을 치켜들고 있었다.
일출을 마주한 두 사람의 앞으로 희붐한 볕이 내리깔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