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6)
16화. 악마 남작 (2)
푸르른 평원 위에 높다랗게 우뚝 선 성벽. 그 위로 봄볕이 갓 말린 이불처럼 포근하게 늘어졌다. 새 생명을 움트게 하는 빛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걸 도무지 반길 수가 없었다. 그늘 한 점 없는 성곽 위에서 햇볕은 그저 갈증을 부추기는 눈치 없는 조명에 불과했다. 병사들은 조그마한 습기라도 얻기 위해 저마다 입에 조약돌을 머금고 있었다.
돌을 두 개나 입에 집어넣은 선임 병사가 후임 병사를 발로 툭툭 찼다. 그러곤 웅얼웅얼 말문을 열었다.
“햐, 흐헬룐. 계쇽 안댜만 잇디 멀구 이려냐셔 바께 둄 바바라. 걉댜기 햬네갸 흡격햐믄 어혈랴교.”
넉 달째 가만히 있는데 습격은 뭔 얼어 죽을 습격…….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후임 병사는 굼뜨게 몸을 일으켜 성 밖을 살폈다.
바깥의 상황은 그대로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아들렌 가문의 깃발. 드문드문 흩어져 성을 둘러싼 사백여 명의 군사들. 한껏 나무늘보처럼 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문이 열릴 기미만 보여도 득달같이 달려들 터였다.
아들렌 자작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지 넉 달째. 몰덴의 전황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초창기엔 공성전 비슷한 게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아들렌 자작은 성을 포위하고 버티는 것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이쪽으로선 병사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모자라 선공을 가할 수가 없으니 교착 상태는 필연적이었다.
점차 불리해지는 건 몰덴 측이었다. 월동 식량은 진작에 바닥난 지 오래. 한동안 화창한 날씨만 이어져 식수도 넉넉하지 못했다. 거기다 한창 파종할 시기에 이러고 있다 보니 앞날이 더 걱정이었다.
그들의 영주만 아니었어도 병사들은 진작에 사기가 바닥나 투항해 버렸을 터.
밖을 살핀 김에 성안까지 둘러보던 후임 병사는 별안간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조약돌을 내뱉고 선임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퉷! 델톤 형님, 델톤 형님! 그 돌멩이 내뱉고 어서 일어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머야…… 며때매 그리 호오들걉…….”
“남작님! 남작님께서 성곽으로 올라오고 계십니다!”
“퉤, 퉤헷! 뭐, 뭣?”
늘어져 있던 병사들은 후다닥 일어나 일사불란하게 경계 태세를 갖췄다. 곧 계단 위로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명목상 최고 책임자인 델톤이 즉각 경례를 올렸다.
“충성, 근무 중 이상 무! 적군 측에서 별다른 동향은 없습니다! 이상징후를 포착하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남작님!”
“어, 그래, 그래, 하하하! 그사이 어엿한 군인이 다 됐군, 델톤. 부모님이 보시면 자랑스러워하시겠어. 아, 이렇게 찾아온 건 별건 아니고, 이것 좀 마시면서 쉬엄쉬엄 일하라고…….”
몰덴 남작은 손수 짊어지고 온 가죽 물부대를 풀썩 바닥에 내려놓았다. 병사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아니, 남작님. 이런 건 다른 병사들 시키셔도 되는데…….”
“어휴, 그 녀석들도 좀 쉬어야 되지 않겠나? 그리고 이까짓 물부대 짊어지고 오는 게 뭐 힘든 일이라고? 언제 적이 공격할지 모르는데 하루 종일 바짝 경계하는 게 훨씬 힘든 일이지. 안 그런가? 하하하!”
델톤과 병사들은 뜨끔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남작은 개의치 않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네들에겐 아주 미안하게 생각해. 나 하나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게 만들다니. 나처럼 덕망 없는 사람이 이곳의 영주가 아니었더라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아, 아닙니다, 남작님! 저 간악한 아들렌의 협잡배들이 잘못된 거지, 남작님의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희들로서는 남작님을 따를 수 있어 크나큰 영광일 따름입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네. 하지만 더 이상 자네 같은 젊은이들을 힘들게 해선 안 될 것 같아.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져야겠지.”
“예? 그게 무슨 말씀…….”
대답 대신 싱긋 웃는 미소만이 돌아왔다.
몰덴 남작은 이후 한 명 한 명 병사들을 독려하고 떠나갔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델톤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이신 거지? 스겔론, 뭔가 알고 있는 거 있어?”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후우, 이상한 생각 하시고 계신 건 아니면 좋겠는데……. 세상천지 어디서 저런 영주님을 또 만나겠냐?”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저, 저 빌어먹을 아들렌 놈들, 저리 사람 좋으신 분을 어떻게 ‘악마 남작’이라고 음해할 수 있는지…….”
후임 병사는 도끼눈을 치켜뜨고 아들렌 가문의 깃발을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선 저 위로 날벼락이라도 좀 떨어졌으면 했다.
그렇게 밖을 둘러보던 중 후임 병사가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굉장히 몸집이 큰 거한과 가방을 짊어진 왜소한 남자.
두 사람이 몰덴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어…… 델톤 형님? 저거 보이십니까?”
“뭐? 아들렌 새끼들 멍때리는 거?”
“아, 아뇨. 그 너머요.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냅둬, 떠돌이 아니면 눈치 없는 여행자겠지. 병력에 포위된 거 보면 알아서 피해서 갈걸?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과연 그들은 병사들의 진지를 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성을 둥글게 우회하는 두 사람. 델톤은 저 여행자들이 이제 뒤편으로 떠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떠나는 대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야. 무슨 생각인 거지?”
델톤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
몰덴 남작 부인의 방은 귀부인이 쓰는 방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출했다.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낡아빠진 가구와 침대. 성도와 대도시에선 진작 유행이 지나 아무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투박한 벽돌 벽에는 아무런 장식품도 걸려 있지 않았다. 흡사 귀부인의 방이라기보단 버려진 고성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똑, 똑, 똑.
그 단정한 폐허에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울리고.
‘들어가도 되겠소?’
출입을 허락하지도 않았건만 불청객은 태연하게 들어섰다.
한바탕 물부대를 나르고 오느라 몰덴 남작은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체면도 잊고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낡은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후우, 날도 이제 슬슬 더워지고 있군. 다행히 이제 땔감 모자랄 걱정은 없겠어.”
요 근래 부쩍 야윈 남작 부인이 슬며시 남편을 흘겼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새삼 날씨 얘기라도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아아, 별건 아니고. 그거, 작년에 당신이 튤립 사다가 심어 놓은 거 기억하시오?”
온 영지민이 기근에 허덕이고 있는 와중에 뜬금없이 튤립 얘기라니? 부인의 어이없단 눈길도 신경 쓰지 않고 남작은 말을 이었다.
“내성 주변의 조경이 너무 휑한 것 같다고, 동맹령에서 온 행상인에게 부탁해서 색깔 별로 구근을 스무 개씩이었나, 주문해서 사지 않았소?”
“……그랬었죠.”
“그거, 피었으면 아주 아름다웠을 거요. 나도 볼 때마다 주변이 너무 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나 모르겠어. 하여간 당신 미적 감각이 뛰어난 건 알아줘야 해. 여기가 아니라 대도시 같은데 살았으면 황궁 부럽지 않게 멋진 정원을 꾸렸을 텐데 말이야. 하하하!”
“…….”
“어디 보자……. 당신이 샀던 색깔이 빨간색, 보라색, 노란색, 그리고 또 무슨 색이었지? 파란색이었나? 다 피었으면 알록달록해서 참 볼만 했을 것 같았는데, 하하하…….”
“……거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먹먹한 우울감이 깃든 시선. 남작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돌아올 때 보니 성의 아이들이 꽃망울을 뜯고 구근을 캐 먹고 있더군.”
“…….”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삽 한 자루 없이, 손톱이 깨지도록 흙을 파헤쳐서 캐 먹고 있었어.”
“…….”
“내가 보이니까 깜짝 놀라 떨면서도 허겁지겁 덩어리를 입 안에 욱여넣더라고. 혼날 땐 혼나더라도 당장 주린 배를 채워야겠다, 그런 생각이었겠지.”
“그래서, 아이들을 혼내셨어요?”
남작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나 때문에 아이들이 그 고초를 겪고 있는 건데 어떻게 그러겠소. 멜딘을 불러다가 아이들이 탈 나는 게 아닌지나 봐주라고 했지.”
“잘하셨어요. 그런데 멜딘은…….”
“아아, 나도 알고 있소. 그치가 돌팔이인 거.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소? 유일한 의사였던 보르헨이 지난달에 명을 달리했는데.”
“…….”
노쇠한 보르헨은 배급으로 나온 쥐꼬리만 한 빵덩어리를 거듭 손주에게 넘기다 굶어 죽었다. 비단 보르헨뿐 아니라 수많은 부모와 노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식에게 식량을 양보하여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더 끔찍한 건 자식 몫의 배급을 빼앗아 주린 배를 채우는 부모도 있다는 것.
그러나 적발하고도 차마 벌할 수가 없었다. 남작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한참을 뜸 들인 끝에 비로소 본론을 꺼내놓았다.
“부인. 고백할 게 있소.”
“…….”
“나는 모자라고 부덕한 사람인지라, 늘 묫자리를 어디다 써야 할지 고민이었지. 그런데 오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묫자리가 눈앞에 있는 것 아니겠소?”
“…….”
“부인, 잘 들으시오. 오늘 나는, 모든 걸 종결시키고 명예롭게 죽을 것이오.”
남작 부인은 번뜩 시선을 치켜들었다. 남작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죽으면 더 이상 아들렌 자작도 이곳을 포위할 명분이 없소. 아이들은 흙투성이 구근 대신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을 테고, 젊은이들은 창칼 대신 쟁기를 손에 쥘 수 있을 거요. 이 지지부진한 전투는 ‘악마 남작’의 죽음과 함께 마무리되는 거지.”
“그렇지만, 저들이 습격한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잖아요. 당신은 악마 따위와는 전혀 관계없는데…….”
“…….”
순간 뺨이 작게 꿈틀거렸다. 남작은 재빨리 그 흔적을 감췄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오. 중요한 건 실리와 명분이지. 저들이 진실만을 추구했으면 진작에 교단의 성기사들을 부르지 않았겠소?”
“…….”
“내가 죽고도 아들렌 자작이 물러나지 않거든, 황제 폐하에게 파발을 보내고 소문을 퍼뜨리시오. 혹여 폐하가 그때 가서도 만행을 묵인하면 그냥 동맹 측으로 전향하여 도움을 받으시오.”
“…….”
“몰덴의 앞날을 당신에게 맡기겠소, 부인. 쉽지 않겠지만, 부디 이 어리석은 촌부보다 영지를 슬기롭게 이끌어 주길 바라오.”
달싹이는 입술. 부인은 할 말이 너무 많아 끝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남작은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부인의 방을 떠났다.
대답을 바라지 않은 선언. 사지로 걸어가는 자의 뒷모습. 홀연히 찾아왔던 불청객이 떠나간 방에는 벽돌의 싸늘한 냉기와 휑뎅그렁한 침묵만이 남았다.
남작 부인은 한동안 멀거니 시선을 흐렸다.
그러다 끝내 체념한 얼굴로 옷장을 열고 빛바랜 수의를 꺼내 들었다.
*
“나, 나으리?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
카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병력은 적당히 분산되어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어디 잠입할 만한 구멍이 없나 멀찍이서 둘러봤으나 소득은 없었다. 하기야 그런 데가 있었으면 진작에 몰덴이 함락됐겠지.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소 과격한 해결책을 쓰는 수밖에.
“행상인, 주변에 안전하게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거라.”
“예, 예?”
“몰덴에는 나 혼자 다녀오겠다. 지도에 적힌 보물을 찾는 대로 바로 나오도록 하지.”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던컨은 또 한 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은 즉, 병력을 정면돌파하여 성벽을 넘겠단 뜻 아닌가?
“하, 하지만 나으리……. 아, 아무리 그래도 몇백 명이나 되는 병사를 혼자 상대하시는 건…….”
“저 병력을 다 처죽이겠단 말이 아니다. 야음을 틈타 진지를 가로지르면 초병 정도만 처리해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네놈까지 같이 성벽을 넘긴 쉽지 않을 테니 너는 근처에서 대기…….”
……기기기기…….
미세한 진동. 카딤은 말을 하다 말고 돌연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던컨도 덩달아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믿기 힘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쇠창살이 올라가고 몰덴의 중앙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어? 어, 어째서 지금 성문이……?”
“…….”
“설마…… 몰덴 남작이 전면전을 벌이려는 걸까요, 나으리?”
카딤으로서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의아함에 물들어 사고가 굳어 버린 행상인과 달리 야만인은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수통을 열고 남은 피를 한입에 들이켰다. 그러곤 근육을 뚝뚝 풀고 던컨을 들어 올렸다.
“꽉 잡아라, 행상인. 조금 어지러울 거다.”
“……예?”
한쪽 옆구리에는 행상인을 끼고, 다른 쪽 손으로는 ‘모기’를 치켜들고.
콰앙!
카딤은 질풍처럼 바닥을 박차고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후우우우웅 –
그 어떤 준마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쾌속의 질주.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귓가가 얼얼했다. 시야를 스치는 풍경이 물감 번진 유화처럼 뭉개졌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성큼성큼 성문이 가까워졌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
행상인의 절규가 접근을 알렸다. 성문을 향해 집중되어 있던 이목이 돌아갔다. 진지에 있던 모든 병사들은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쇄도하는 야만인을 바라보았다.
쐐 – 액, 퍽!!!
내달려 온 가속도가 그대로 실린 칼날이 한 병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투구가 깡통처럼 찌그러지고 머리통은 짓이겨져 곤죽이 되고 말았다. 칼을 털며 뽑아내자 핏줄기는 검신으로 말끔히 빨려 들어갔다.
쩌 – 걱!!
거치적대는 병사를 또 하나 베어냈다. 끈적한 타격음이 터져 나오고 팔뚝과 상반신은 대번에 절단되었다. 토막 난 육편들이 붉은 자국을 그리며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퍽!
그 뒤에 있던 병사는 그냥 어깨로 들이받았다. 마치 공성추에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의 뼈가 조각조각 난 채로 한참이나 나가떨어졌다.
“…….”
피바람을 일으키는 무자비한 돌격. 저지는 불가능했다. 야만인이 지나간 자리마다 찢기고 뒤틀린 시체들이 잡동사니처럼 쌓여 갔다.
허나 이상하게도 병사들은 비켜설 기미가 없었다.
미동도 않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우두커니 야만인을 응시하기만 할 따름.
카딤은 꺼림칙한 위화감을 느꼈다.
‘……눈앞에서 동료가 저렇게 죽는데 아무런 동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성문이 언제 닫힐지 알 수 없었고, 옆구리에 끼인 행상인은 자지러질 듯 날뛰었기에.
“으아아아악, 으헉, 우웁, 욱!”
카딤은 결국 앞길을 막는 병사들만 해치우고 진지를 그냥 지나쳤다.
얼마 가지 않아 몰덴의 중앙 성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
“…….”
거기서 그를 맞이한 건 전면전을 준비하는 몰덴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그저 사슬 갑옷을 걸친,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인 한 명만이 있었을 뿐.
피칠갑을 한 야만인의 모습에 질린 중년인은 얼빠진 시선을 보냈다. 카딤은 슬며시 인상을 쓰고 물었다.
“너는 누구지.”
“어어, 음…… 이곳의 영주, 몰덴 남작이외만…….”
“아, 네가 그 ‘악마 남작’인가?”
“으음, 그…… 유감이지만, 내가 악마와 관련 있단 소문은 사실이 아니외다. 거기엔 사정이 좀 있는데…….”
“그런가? 자세한 건 안에 가서 듣도록 하지. 대화를 나누기엔 장소가 좋지 않군”
“아, 아니, 하하, 잠깐…… 댁이 누군진 모르겠다만, 난 지금 몰덴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나온 거라오. 그냥 돌아갈 순 없…….”
“나중에 죽어.”
남작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야만인은 갑옷 뒷부분을 잡고 남작을 덥썩 들어 올렸다. 그는 어미에게 물린 새끼 고양이처럼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진작에 잡혀 있던 던컨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하하하, 거참, 난감하군……. 아, 안녕하시오. 댁은 또 누구신가?”
“더, 던컨, 던컨 휠레드입니다, 남작님…….”
“아, 멋진 이름이군. 이쪽 지방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동맹 쪽에서 왔나?”
행상인은 생각했다. 내 살다 살다 야만인에게 짐짝처럼 들린 채 자살하러 나온 영주와 담소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고.
인생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