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미몽의 숲 (5)
뿌리굴을 가로지른 지 어언 반나절.
카딤 일행은 비로소 출구 근처에 도착했다.
“…….”
“헥, 헤엑, 헥…….”
“훅, 후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행군에 일행들은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이었다. 한창 뿌리굴이 요동치며 자라날 땐, 무슨 세상 끝까지 뻗어갈 줄 알았으니까.
카딤은 뒤돌아서 일레니아를 흘겼다.
“꽤나 긴 통로였군. 원래 뿌리굴이 자라면 이만큼은 커지는 건가?”
“아뇨……. 후우…… 그, 아무리 길게 자라도 한 시진이면 빠져나와야 정상인데…….”
마지막으로 먹은 먹이 탓에 뿌리굴 벌레는 비정상적인 과성장을 겪었다. 일레니아는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으로 카딤의 팔뚝을 흘끔, 바라봤다. 아직도 저 팔이 절단되어 선홍빛 단면을 드러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카딤은 ‘분열종 악마의 피’를 마시고 자신의 팔을 잘랐다.
‘분열종 악마의 피’는 ‘분열’ 버프를 준다. 말만 들어선 무한정 분열해 분신을 만드는 사기 버프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악마의 경우와 달리, 절단된 신체는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분신이 아닌 그저 한없이 증식할 뿐인 살덩이가 돼 버리니까.
하다못해 그 살덩이를 비상 식량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마저 일반적으론 불가능했다. ‘분열’ 버프가 걸린 살점은 위액을 뒤집어써도 분해되지 않고 증식한다. 1회차의 마경에서 식량이 고갈됐을 때, 카딤은 궁여지책으로 이 살점을 삼켰다가 하마터면 위장이 터질 뻔 해 봤다.
그렇지만, 삼킨 먹이에 따라 끝없이 위장이 커지는 생물이 있다면 얘기가 다른 법.
‘뿌리굴 벌레’는 그 조건에 정확히 부합했다. 카딤은 일레니아에게 설명을 듣자마자 이 발상을 떠올렸다. 과연 증식하는 팔뚝을 먹이로 바치자, 벌레는 그걸 소화시켜 위장을 키우고, 그 키운 위장으로 또다시 팔뚝을 소화시켜, 살점의 버프가 떨어질 때까지 거의 무한한 성장을 이뤄냈다.
덕분에 어마어마하게 자라난 굴을 통해 긴 거리를 가로질렀지만…… 다른 일행들로선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제 팔을 끊어 먹이로 바치는 건 도무지 맨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니까. 굴을 통과하는 내내, 일레니아와 던컨은 틈만 나면 불안한 시선으로 카딤의 상태를 살폈다.
정작 당사자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카딤은 팔짱을 껴 재생한 왼팔을 감추곤, 일말의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지금 출구로 나가면 길을 잃는 것 아닌가, 고고학자? 이만큼 멀리 왔으면, 이미 인간이 가보지 못한 곳일지도 모르겠는데.”
일레니아는 정신을 부여잡곤, 곧바로 도리질을 치며 부인했다.
“아, 아뇨, 그럴 일은 없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대수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가져왔는지 보셨잖아요? 그게 다 보통 자료들이 아니에요! 현대의 인류가 남긴 자료뿐 아니라, 엘프와 드워프와 드래곤이 살던 신화의 시대부터 전승된 기록까지 모조리 집대성한 거라서…….”
뭐라고 더 했다간 일일이 자료를 꺼내 반박할 기세. 하기야 진정 보통 자료들은 아니겠지. 대학뿐 아니라, 잊힌 신 교단에서 가져온 자료들도 있을 테니.
카딤은 대강 납득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레니아는 걱정 말고 자신만 믿으라며 앞장섰다.
그렇게 출구로 빠져나오자, 기이한 정경이 펼쳐졌다.
“…….”
“……어.”
카딤과 던컨은 잠깐 멍한 표정을 했다.
판단 기준이 굉장히 너그러운 사람을 데려온다면, 그래도 ‘숲’이라고 부를만한 모습이었다. 어쨌든 나무도 있고, 잎사귀도 있고, 수풀도 있고, 흙도 있고, 벌레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론 이 꼬락서니를 보고 ‘숲’이라고 부르진 않을 것이었다. 세상천지 어디에 나무 기둥이 해초처럼 흐물거리고, 수풀이 연분홍빛으로 반짝이고, 날벌레 떼가 그늘에서 피어올라 연기처럼 흩어져버리는 숲이 있단 말인가?
마치 색맹인 화가가 만취하여 그린 유화 속에 들어온 기분. 척 봐도 탄탄해 보이는 흙바닥에 발을 내딛자 수렁처럼 움퍽 파였다. 대관절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막막했으나…… 다행히도 그들에겐 길잡이가 있었다. 대수림에 관해 누구보다 많은 자료를 독파한 고고학자.
그녀는 주의 깊게 일대를 관찰한 후, 갈피 잃은 일행들을 향해 이러한 안내를 베풀었다.
“……엑? 뭐야. 어디야, 여기……?”
“…….”
“…….”
카딤은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저 여자의 말대로 먼저 드래곤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그러면 적어도, 저 여자를 드래곤의 먹이로 줄 수는 있을 테니까.
*
그래도 길잡이는 길잡이였다.
일레니아는 흐물대는 나무를 타고 올라 하늘을 관찰하거나, 공터에 막대기를 세워 그림자를 살피거나, 기이한 골동품과 지도를 꺼내 지대를 측량하는 등, 이 제멋대로인 장소에서 질서를 찾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 저희…… 아무래도 중앙부를 뛰어넘어 아예 대수림의 남부로 온 모양인데요?”
“…….”
말없이 눈만 껌뻑이는 일행들. 일레니아는 지도를 펼치고 밑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자, 보세요. 여기 보시면, 대륙 밑쪽에 대수림이 커다랗게 있잖아요? 거기서 저희가 출발한 위치는 여기, 최북단에 있는 숲의 초입이었는데, 지금 저희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은 여기, 남쪽에 있는 숲의 최심부예요. 그러니까 저희가 벌써…… 대수림을 절반 넘게 종단했다는 거죠.”
두 지점은 지도상으로도 거의 한 뼘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카딤이 어처구니가 없단 듯이 물었다.
“그게 말이 되나? 그럼 고작 반나절 만에 수백 킬로미터를 건너뛰었단 건데.”
“당연히……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용병님이 그걸 말이 되게 만드셨잖아요? 뿌리굴 벌레가 저렇게까지 자라는 건 저로서도 상정 외의 일이었다고요!”
“…….”
구릿빛으로 그을린 낯짝이 팍 구겨졌다.
그냥 적당히 깊숙이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멀리 오게 올 줄은 몰랐다. 멜리사가 대수림으로 오라 해놓고 이만큼 깊이 숨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 굴로 돌아가 통로의 중간을 뚫고 나오는 건 안 되나, 고고학자? 이렇게 먼 곳 말고 적당한 곳에서 빠져나오게.”
“어…… 그건 별로 권장하고 싶은 일은 아니네요. 위장을 뚫고 나왔을 때야 출구가 막혀있어서 괜찮았지만, 이미 열린 상태에선 뿌리굴 벌레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어서…….”
“……그렇다면 다시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다른 벌레를 통해 숲으로 재진입하도록 하지.”
“예엑?! 나, 나으리, 다, 다시 거기로 돌아간다굽쇼?”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던컨이 펄쩍 뛰었다. 아니, 그 축축하고 께름칙한 벌레의 뱃속을 또 반나절이나 지나간다니? 그러느니 차라리 이 괴상한 숲을 하염없이 헤매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일레니아도 비슷한 판단을 내렸다.
“음, 아뇨……. 그래도 돌아가진 않는 편이 나을 거예요. 아무튼 그냥 가면 몇 달은 걸릴 거리를 건너뛰었고…… 방향과 위치도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까요. 비록 전혀 정보가 없는 곳에 왔다는 게 문제지만…… 제 목표나, 용병님의 목표나, 숲의 초입보단 이 부근에서 훨씬 가까울 테니까…….”
“…….”
전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운 서슬을 발했다. 역시나, 이자는 자신의 목표가 멜리사란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미 그녀의 위치까지도 알고 있는 기색.
본색을 일부 드러낸 고고학자는, 카딤의 눈치를 살피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용병님. 그, 제 생각엔…… 용병님께서 원하시는 건 아마 숲의 중앙부에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우선 저와 같이 다른 곳에서 ‘드래곤’을 먼저 찾아보길 권장하고 싶어요.”
“…….”
“그 전설로 남은 지고의 존재가, 어쩐지 이번에 용병님께도 큰 도움이 될 거란 예감이 들거든요. 그 행방을 찾아본 후에는 제가 목적지까지 바로 안내해드릴 테니까…….”
간곡한 설득이 이어졌다. 카딤은 무뚝뚝하게 일레니아를 내려다봤다. 그 저의는 불분명해도,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는 분명 진실된 걱정과 우려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막연한 낌새를 믿기에는 한 가지, 큰 장애물이 있었다.
“……그래서, 그 가방에 든 건 무엇이지? 이만하면 숲에는 충분히 깊숙이 들어온 것 같은데.”
초조하게 나뭇잎 틈새로 부서지는 햇빛을 바라보는 일레니아. 오래도록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끝내 돌아온 답변은 이러했다.
“죄송해요. 아직도…… 말씀드릴 만한 때가 아니라서.”
“……그럼, 내가 그걸 강제로 빼앗겠다면 어찌할 거지.”
“…….”
꿈틀, 달아날 것처럼 근육을 긴장시키는 낌새가 보였다. 강탈하는 것 자체가 어렵진 않겠지만, 그 후로 길잡이로서 협조를 기대하긴 힘들겠지.
카딤은 쯧, 혀를 차곤 결단을 내렸다.
“숲의 중앙으로 안내하거라. 조금이라도 허튼 방향으로 간다면, 그 즉시 동행은 끝이다.”
“…….”
일레니아는 아랫입술이 허옇게 되도록 꾹 깨물고 있다가, 힘없이 고갯짓을 하곤 안내를 시작했다.
*
지난 며칠간 카딤 일행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이곳은 산더미 같은 고고학자의 자료에도 기록되지 않은 전인미답의 야생. 기묘하게 비틀린 자연은 언제나 예측을 불허했다. 미지의 환경에 대한 경계심에다 첫날의 미묘한 알력까지 쭉 이어져, 구성원들 사이엔 늘상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행히도, 가면 갈수록 익숙한 숲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늘거리는 나무들 틈으로 딱딱한 활엽수들이 섞여들었다. 연분홍빛 수풀도 점차 범상한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사흘쯤 지나자, 괴수림은 기이한 초목과 늘 보던 초목들이 반반쯤 혼재된 풍경이 되었다.
덕분에 일행의 긴장감이 다소 느슨해졌다. 아직 방심하긴 이르지만, 적어도 예측이 쉬운 쪽으로 가고 있긴 했으니까. 숲에서 뭐가 튀어나오진 않을지, 두 사람이 또 마찰을 빚진 않을지, 늘상 노심초사했던 던컨은 이따금씩 꿉꿉한 숲 공기까지 만끽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바로 그때부터 발생했다.
“엇, 아가씨? 저, 저거 우리가 나왔던 뿌리굴 아닙니까?”
“……예?”
던컨이 가리킨 곳엔 우거진 관목과 덩굴뿐, 개미굴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일레니아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그런 건 없다고 말했다. 카딤까지 굴이 없다고 거들자, 던컨은 머리를 갸웃대다 자기가 잘못 본 것 같다고 수긍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어어, 나, 나으리, 저 바닥에 구멍 보이십니까? 나으리께서 며칠 전에 벌레의 위장에 뚫었던 구멍 같은데…….”
“저, 저건 진짜 뿌리굴 아닙니까, 아가씨? 그, 그때처럼 땅도 흔들리는 것 같은데…….”
“소,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요! 저기 좀 보십쇼, 나으리! 이번엔 진짜로 굴을 찾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던컨은 갈수록 뚜렷한 확신을 갖고 뿌리굴을 보았노라 호소했다. 곧잘 먹혔던 카딤의 설득도 조금씩 효력이 떨어져 갔다. 끝내 나머지 일행이 슬슬 행상인을 미친놈처럼 바라보기 시작할 즈음.
정말로 굴이 나타났다.
처음 그들이 지난 것과 똑같이 생긴 거대한 뿌리굴이.
쿠구구구구궁…….
던컨은 잔뜩 흥분하여 그곳을 가리켰다.
“제, 제가 뭐라고 했습디까? 이번엔 두 분도 똑똑히 보이시지요? 왜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믿질 않으셔 가지고…….”
“어? 뭐야, 이게 무슨…….”
“…….”
말이 되질 않았다.
길을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온 건 절대 아니었다. 여긴 출발 지점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니까. 허나 웅장하게 팽창한 입구와 그에 떠밀려 쓰러진 고목, 가장자리에 퍼진 균열과 잔뿌리까지, 뿌리굴은 숲의 문턱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과 완벽히 일치했다.
던컨은 비로소 억울함을 풀었다며 방방 날뛰었고, 일레니아는 멍하니 입만 벌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살피겠다며 걸음을 뗐다. 일행의 신경은 한동안 오롯이 난데없이 나타난 굴에만 집중되었다.
카딤은 굴을 잠깐 살피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꿋꿋이 없는 굴을 있다고 주장해 온 던컨.
“……던컨,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아, 예예! 무엇입니까, 나으리? 말씀만 하십쇼!”
“잠깐만, 기절해 있거라.”
“……예? 그, 그게 무슨…… 커헉!!”
두꺼운 손가락이 경동맥을 압박했다. 행상인의 낯짝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불과 몇 초 만에 고개가 픽, 밑으로 고꾸라졌다. 일레니아는 깜짝 놀라 토끼눈을 떴다.
우려와 달리, 카딤이 제정신을 잃고 아군을 해친 건 아니었다. 그는 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르르륵, 쿠르르르륵…….
던컨이 기절함과 동시에, 굴도 무너져내려 감쪽같이 사라졌다.
우연히 벌어진 일은 아니겠지, 역시나 그런 건가……. 카딤은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일레니아도 어렴풋이 무언갈 알아챈 눈치였다.
“용병님, 설마 이 숲은…….”
“그래, 아마 그런 곳이지 않을까 싶은데.”
“…….”
“누군가 헛것을 보고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점점 더 실체를 얻다가, 정말로 진짜가 돼 버리는 곳.”
일레니아는 두 눈을 흡, 치떴다.
노란 눈동자에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카딤의 말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신비와 이적에 익숙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불가사의로 가득한 대수림, 환상이 현실로 현현되는 것쯤은 크게 놀랄 만한 신비도 아니었다.
경악한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광전사.
던컨의 사례로 짐작건대, 저 환상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대악마를 처단한 전사는, 혈해(血海)처럼 참혹한 기억들을 내면에 흘러넘치도록 품고 있었다. 제 팔을 스스로 끊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정도로.
만에 하나, 그 핏물이 범람하여 현실을 침범한다면…… 고작 커다란 굴 하나가 나타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
카딤 본인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관자놀이가 지끈, 쑤셔왔다.
대처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탈라의 신기’를 받아들여 디버프를 제거하거나, ‘아큘라노스의 문신’을 사용해 신비를 삼키면 당장 위험한 환상이 나타나도 제압은 가능했다.
다만 둘 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신기는 부작용이 누적되고, 문신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하루 있으니까. 게다가 광증처럼 환각이 심해지면, 전혀 사리 분별이 안 될 수도 있고…….
카딤은 한숨을 토하곤 급히 던컨을 들쳐 맸다.
“골치 아픈 곳에 와버렸군. 여긴 최대한 빨리 떠나도록 하지. 그나마 착각하는 놈이 쓰러지면 헛것도 사라진다는 것만은 다행인데…….”
“…….”
“……고고학자, 명심해라. 혹여 내가 헛것을 진짜라 말하거든, 즉시 나를 이 행상인처럼 제압하도록.”
일레니아는 공연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디 그럴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원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정작, 우려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하아, 하아…… 용병님, 죄송한데…… 잠깐만 그늘 쪽으로 가면 안 될까요? 여기, 햇볕이 너무 뜨거운데…… 모래바람도 심하고…… 목이라도 축이고 좀 쉬었다 가는 게……”
“…….”
얼마 가지 않아, 메마른 황야를 헤매듯 더위와 갈증을 호소하는 일레니아.
말할 것도 없이 환각이었다. 여긴 빽빽이 활엽수들이 자라 볕이 잘 들지도 않는 음지였으니. 카딤은 앞서 수십 번이나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정신 차려라, 고고학자. 여긴 황야가 아니라 대수림이다. 햇볕도, 모래바람도, 전부 다 허상에 불과하다.”
“아, 아아……. 아, 그러네요! 죄, 죄송해요, 용병님. 제가 또 잠깐 방심했네요…….”
잠깐 방심한 게 아니었다. 벌써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데다, 피부가 불긋하게 그을리기까지 했으니. 환상을 진짜로 믿어 서서히 현실이 되고 있다는 증거.
일레니아는 허벅지를 꼬집고 찰싹찰싹 제 뺨을 때렸다. 그러다 의아하단 눈길로 카딤을 바라봤다.
“혹시 용병님은 환상이 안 보이세요? 아까랑 별 차이가 없어 보이시는데…….”
“아니, 보인다. 조금 전부터 계속 뭐가 덤벼들더군.”
“어? 저, 정말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세요? 정말로 공격당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렇진 않은데.”
카딤은 곁가의 수풀을 바라봤다. 스멀스멀 마기가 피어오르고 악마들이 튀어나왔다.
– 심장을 뽑아먹어 주마, 벌레 새끼야! 케헤헤……
퍼 – 걱!
– ……께헤엑!
하지만 악마들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싱거운 주먹질에 골통이 박살 났다. 미약한 발길질에 다리뼈가 으스러졌다. 애초에 그리 강하지도 않았는데, 가짜라는 걸 인지할수록 악마들은 더더욱 약해졌다. 나중엔 아예 대놓고 무시하고 지나갔는데, 저들이 알아서 몸통에 부딪히곤 썩은 두부처럼 뭉그러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카딤은 오히려 되물어보고 싶었다.
“네놈들은 어떻게, 저런 조잡한 허깨비 따위에 속을 수가 있는 거냐?”
“…….”
지독한 광증의 환각에 비하면, 분간하기가 너무 쉬운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