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미몽의 숲 (6)
카딤은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일행들을 죄다 기절시키고 홀로 이 숲을 통과하고 싶다고.
안타깝게도 그럴 순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길잡이 노릇을 할 사람은 일레니아뿐이었다. 행상인은 몰라도, 저 고고학자로 위장한 사제만큼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앞길을 안내해줘야 했다.
그러나 달밤이 이슥하게 기울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황야의 환상에 고통받는 중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땀방울에 흠뻑 젖어 뺨에 들러붙은 머리칼, 축축한 튜닉은 벗어 던지고 얇은 민소매 천 옷만 걸친 차림. 샛노란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가는 입술은 바짝 부르텄다. 피멍이 들도록 허벅지를 꼬집고도 저런 꼴을 면치 못했다.
카딤은 밤하늘을 바라봤다. 일레니아의 착각에 동조해, 어스름한 달빛이 태양처럼 희붐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가만두면 조만간 이곳을 정말 황야처럼 바꿔버리겠군.
어쩔 수 없이, 일레니아도 던컨처럼 기절시켜두려는데……
……그녀가 황급히 손바닥을 쳐들고 만류했다.
“하아, 자, 잠시만요, 용병님……. 하아, 제가…… 제가 오는 길에 생각해 둔 게 있는데요…….”
“……뭐지.”
“하아, 그게…… 검증하려면 실험부터 해봐야겠는데…… 하아, 제, 제 가방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카딤은 일단 가방을 전달하고 봤다. 혹시 숨겨뒀던 ‘무언가’를 꺼내려는 건가 싶었다. 막상 가방으로부터 튀어나온 것은 전혀 뜬금없는 물건이었지만.
향긋한 과실주가 가득 찬 술병.
일언반구의 첨언도 없이, 고고학자는 마개를 뽑고 병나발을 불었다.
“우읍, 우읍, 우읍, 우읍…….”
카딤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덜 아프게 기절하겠다고 저러는 건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아,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숲의 풍경이 변했다.
쿠르륵, 쿠륵, 쿠르르르…….
단단한 고목 기둥이 무르게 풀어지고, 초록 이파리가 밝은 빛깔로 물들었다. 고고학자가 술병을 다 비우자, 평범한 초목들은 사라지고 주변엔 흐물거리는 나무와 연분홍빛 수풀들만이 가득해졌다. 마치 처음 이 숲에 들어왔을 때처럼.
일레니아는 발그레 뺨을 붉히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후우우…… 끅, 다행이다. 제 추측이 들어맞았네요…….”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숲이 바뀐 건지 설명해보거라.”
“흡, 잠시만요……. 어우, 과음을 했더니 속이 안 좋아서…….”
잠자코 속을 추스르곤 설명을 주절거리는 일레니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숲은 ‘현실감’을 가져선 안 되는 곳이라고 했다.
카딤의 추측은 반쪽짜리 정답이었다. 여기서 ‘환상’을 진짜라고 믿으면 현실이 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정말로 믿어선 안 되는 대상은 ‘환상’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한 더 커다란 개념이었다.
“예, 그러니까…… 여기서는 ‘현실’, 그 자체를 믿으면 안 된다는 거죠……. 이 숲에서 ‘현실감’을 느끼면, 환상들이 나타나서 저들까지 현실이 되어요. 반대로 이 숲에서 ‘현실감’을 안 느끼면, 환상이 나타날 일도 없고, 나타나봤자 별 의미 없는 허깨비가 되는 거고요…….”
악질적인 건, 이 숲에 들어선 자들은 ‘현실감’과 ‘환상’을 공유하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홀로 현실감을 부인해도, 다른 자들이 현실감을 느끼면 허사였다. 환상은 처음엔 본인에게만 영향을 미치지만, 착각이 커지면 결국 실물이 되어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치니까.
일행이 인식하는 ‘현실감’의 척도는 숲의 풍경을 보고 확인 가능했다. 약한 현실감을 느끼면, 지금처럼 비현실적인 숲의 풍경으로. 강한 현실감을 느끼면, 익숙하게 보아온 현실적인 숲의 풍경으로.
즉, 처음엔 생경한 풍경에 아무도 ‘현실감’을 못 느끼겠지만…… 다들 이곳에 익숙해져 ‘현실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치명적인 환상이 난입하여 저들까지 실체를 얻고…… 결국은 정말 현실이 되어 모두에게 해를 끼친단 것.
“처음엔 용병님의 말을 믿었는데, 갈수록 이상하다 싶었어요……. 막 환상이 나타났을 땐, 전 그걸 ‘가짜’라고 생각하고 믿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환상이 조금씩 강해지다…… 결국은 제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더라고요.”
“…….”
“그래서 생각했죠. 뭔가 다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다 지쳐서 잠깐 꾸벅 졸았는데…… 환상이 사라지고, 지금 같은 광경이 아주 잠깐, 보인 거예요? 그걸 가지고 생각을 좀 해본 끝에…… 이런 결론에 닿은 거죠…….”
미몽(迷夢)의 숲.
이 숲은 명징히 깨어난 정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현실로 자각하는 순간 내면에 품은 악몽마저 현실이 되어 이빨을 드러냈다. 모두가 항시 꿈결과도 같은 몽롱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이곳을 가장 안전하게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근데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잠에서 깨면 빤히 ‘현실감’이 느껴지는데……. 아무리 풍경이 비현실적이어도 어떻게 여길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나가요? 무슨 몽유병 환자도 아니고…….”
“……그래서, ‘현실감’을 흐리려고 그렇게 술을 마셨단 건가?”
“흐흐,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아요, 적당한 취기의 도움을 받으면…… 깨어난 채로도 몽롱해질 수 있으니까……. 뭐, 하면서도 반신반의하긴 했는데…… 다행히 성공하긴 한 것 같네요…….”
일레니아는 나른한 미소를 짓고 벚꽃색으로 빛나는 수풀을 매만졌다. 얼근한 취기로 환상을 닦아 비로소 여유를 되찾은 기색.
반면 카딤의 낯은 변함없이 어두웠다.
“대체 누가 이 숲에 이딴 수작을 부린 거지? 마기가 안 느껴지니 악마는 아니고. 그냥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거지 같은 악의가 느껴지는데.”
눈꺼풀을 닫고 어둠 속을 헤아리더니.
잊힌 신의 사제는 뜻밖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세상엔 별처럼 많은 신비와 이적들이 있지만…… 이토록 광활하게 현실과 비현실을 뒤얽고 유지하려면, 결국 신의 권능을 빌릴 수밖에 없을 테죠…….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꿈과 환상이 누구의 주관인 지를 감안하면…… 어떤 신의 권능을 빌린 걸지는 뻔하고요.”
“…….”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꿈을 꾸는 어머니. 자연과 안식을 관장하는 엘프들의 신, ‘헤실리아’.”
공허한 눈동자가 팽창했다.
모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분명 이 게임 속 세상에는 엘가와 아탈라, 잊힌 신 외에도 엘프와 드워프들의 신이 존재했다. 비록 신화의 시대 이후 신도들이 종적을 감췄단 설정 탓에, 게임일 때나 1회차 때나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그럼 엘프들이 신의 힘을 빌어 여길 이렇게 만들었단 건가? 침입자들을 막으려고?”
“으음…… 글쎄요? 꼭 엘프들이란 법은 없죠……. 누군가…… 그 힘을 허락 없이 빌렸을 수도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요, 만약 신이 지닌 초월적인 신비…… 신성(神性)을 도용할 만큼 고등한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가 어쩌다가 신과 접촉하게 된다면…… 굳이 엘프가 아니더라도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였어요.”
“……!”
그 말을 듣자마자, 유력한 두 후보가 뇌리를 스쳤다.
드래곤, 그리고 멜리사.
드래곤은 태생적으로 불가해한 신비에 능통했다. 설사 신의 신비를 해석해 제 뜻대로 썼다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멜리사도 신비의 활용에 있어선 정점에 이른 대마법사였다. 불신론자이긴 하지만, 탐구심이 왕성한 만큼 신의 권능에 학문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게다가 문득, 그녀가 베스타나에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과거의 환상’을 남겨두었던 사실도 떠올랐고…….
‘……1회차에 멜리사가 환상 마법을 잘 써먹는 편은 아니었지. 뭐, 300년이 흘렀으니 그사이 통달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호했다. 진상은 이 잊힌 신의 사제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설마 아무 근거도 없이 저런 추측을 꺼냈을 리가? 하지만 이후론 아무리 떠봐도, 취해서 한 헛소리였다며 유야무야 말을 돌릴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아직 덜 취했군. 카딤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하릴없이 현 상황에 대한 대처법이나 물었다.
“얼른 다 같이 만취해서 빠져나가거나…… 성법의 근원을 찾아야죠. 숲 어딘가에 분명 이 환상의 성법을 유지하는 성유물 같은 게 있을 거예요……. 그걸 부수면 여기는 아마 평범한 숲으로 돌아오겠죠…….”
“…….”
“아, 그리고 이따가 저 아저씨 깨어나면…… 다시 기절시키시거나, 술 좀 멕여 주세요……. 이번엔 막, 또, 뿌리굴보다 더한 게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그 말을 듣자, 큰 의문이 하나 더 떠올랐다. 카딤은 눈매를 날카롭게 좁혔다.
“고고학자, 아까 분명 ‘현실감’만 느껴도 숲이 변하고 환상이 강해진다 추측하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왜, 술도 안 마셨는데 환상에 거의 영향을 안 받은 거지?”
일레니아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이번엔 정말로 취기가 올라온 기색.
“으음, 그러게요……? 왜 그랬지……? 환상도 어쨌든 현실의 일부인데…… 워낙 단호하게 안 믿어서인가? 아니면, 끅…… 용병님이 맨정신으로 자기 팔도 자를 만큼…… 이상한 분이어서인가아아…….”
“…….”
거기까지 말하곤, 지쳐서 좀 쉬어야겠다며 풀썩 드러누웠다. 제 가방을 베개 삼아 눕자마자 숨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카딤은 헝클어진 흑발에 가리어진 얼굴을 뚫어져라 살피다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러나 일레니아가 바로 잠든 건 아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실눈을 뜨고 전사의 등을 응시했다. 몽환적인 색채로 일렁거리는 숲, 취기와 피로로 얼룩진 의식의 틈새에서, 차마 털어놓지 못한 대답을 속으로 곱씹으며.
그건 카딤 님, 당신이 마음속 깊숙한 무의식으로는.
이 세계 자체를 ‘현실’이라 여기지 않고 있어서일 거라고.
*
대처법을 찾은 덕에, 이후로 카딤 일행이 환상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비록 행상인이 깨어난 순간, 숲이 원래대로 돌아올 뻔한 위기가 있긴 했지만……
“선택해라, 던컨. 다시 기절하던지, 이 술을 다 마시던지.”
“……예?”
“기절하는 것도 썩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이번엔 전보다 깔끔히 보내주도록 하지.”
“술을 마시겠습니다요!!”
……즉시 죽음의 양자택일을 강권해 위기를 넘겼다.
영문 모를 상황에 벌벌 떨던 던컨도, 자초지종 사정을 전해 듣고는 납득했다. 도중에 취기가 떨어져 누군가에게 ‘현실감’이 생길 걱정은 없었다. 왜인지 일레니아가 술을 매우 넉넉하게 챙겨왔기에.
문제는, 넉넉해도 너무 넉넉하게 챙겨왔다는 것.
“이건요, 북부에서 난 술인데, 만년설 맞은 은빛 포도로 담근 포도주에요! 이건 요르펜이라고 제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에서 난 보리로 만든 맥주고, 이건 백 가지 야생 과일을 농축했다는 과실주…….”
대륙 곳곳에서 온 진기한 명주들의 향연. 대수림에 온 목적이 드래곤을 상대로 술장사를 하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여간 좋은 술도 넘치겠다, 불가피한 핑계도 있겠다…… 일행들은 위장 속에 양조장을 차릴 기세로 술을 쏟아부었다. 굳이 마실 필요가 없는 카딤도 간간이 맛을 봤다. 입에 달고 몸에 편한 걸 기피하는 그가, 유일하게 즐기는 기호품이 바로 술이 있으니.
과음하진 않았다. 길은 일레니아가 안내했지만, 혹시 모를 위협이나 성법의 근원을 찾으려면 정신을 일깨워둬야 했다. 애초에 그가 취하려면, 술독을 몇 통은 비워야 할 정도로 주량이 많기도 했고…….
그렇게 고주망태들 사이의 유일한 정상인이 되어 숲을 헤쳐 나가던 중, 카딤은 불현듯 느꼈다.
“…….”
욱씬, 뇌리를 찌르는 피를 향한 충동, 그리고 머나먼 숲의 저편에서 서성이는 낯선 기척들.
나머지 일행은 야영지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아직 둘 다 만취하진 않았지만, 신속히 거동하긴 힘들어 보였다. 카딤은 던컨의 어깨를 짚고는 나직이 고했다.
“……던컨,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조금 멀리 다녀오겠다. 그동안 고고학자의 상대를 부탁하지.”
“어, 예에, 나으리…….”
“기회가 되면, 내가 했던 부탁도 잊지 말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던컨은 술병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기골이 장대한 신영이 일렁이는 나무들 틈으로 떠나갔다.
술판에 잠시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우두커니 카딤이 떠난 쪽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술을 홀짝이는 일레니아. 던컨은 우물쭈물할 말을 찾다가, 그런데 왜 이렇게 술을 많이 가져온 거냐고 물었다.
“그거…… 원래 용병님이 술 좋아하신다길래…… 같이 마시면서 좀 친해질까 해서 가져온 건데…… 휴우…….”
“…….”
울적한 여인은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렇게 한 모금이 두 모금이 되고, 두 모금이 세 모금을 부르고, 네 모금을 지나 어느덧 한 병, 두 병, 세 병…….
그렇게 절제 없는 폭음 끝에, 난데없는 넋두리가 시작됐다.
“아저씨, 저어, 저어도 답답해요! 그냥, 히끅, 저어도 그냥, 아는 대로 다 말해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그러면 끅, 큰일 나요! 저, 저 ‘굽어살피는 눈’ 땜에 계획을 다 망칠 거라고요! 무,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아저씨?”
“어…… 모르겠습니다만.”
“아, 아뇨, 아저씨, 그러니까요……. 저는, 그동안 아, 알게 모르게, 카딤 님 마, 많이 도와드렸고, 황야도 가, 가보고, 대수림, 여, 열심히 공부해서, 길도 안내하고 있고, 끅, 여, 여기, 숲의 비밀도 알아냈고, 그…… 그랬잖아요?”
“어…… 그, 그렇지요……?”
“그런데 카딤 님은 왜, 왜, 저 맨날 안 믿어요? 드, 드래, 드래곤 보러 가야 되는데, 진짜……. 맨날 자, 잘했다고 저한테 칭찬도 안 해주고…… 막, 무슨, 사기꾼 대하듯 히끅, 쌀쌀맞게 굴기만 하고……. 그, 그러면 제가, 말은 안 해도 얼마, 얼마나 끅, 속상한지 아세요, 아저씨?”
“어…… 예……. 그, 그건 저도 잘 압디다. 나으리 처음 모실 때 저한테도 그랬고…… 그, 우리 안사람도 저 처음 만났을 때 그랬고…….”
“어? 아, 아저씨 결혼, 결혼했어요? 히끅, 왜, 왜 저는 혼인 잔치에 초대 안 했어요?”
“……아가씨 만나기 훨씬 전에 결혼했는데 어떻게 초대를 합디까?”
“아…… 그, 그러게요……. 나, 나 바보 같네……. 그래도 나중에 히끅, 또 결혼하면 꼭 참석할 테니까, 그, 그땐 꼭 불러주세요……?”
“…….”
……맙소사, 레밀리온이시여.
상상도 못 한 고고학자의 일면을 본 던컨은 넋이 반쯤 나가 버렸다. 경악을 추스르며 어떻게든 맞장구를 쳐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발치에는 한 사람이 비운 술병만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가슴에 쌓인 게 많은 고고학자는, 결국 술을 혼자 일곱 병이나 비우고 나서야 까무룩 곯아떨어졌다. 비뚤어진 입술에서 의미 불명의 잠꼬대가 웅얼웅얼 흘러나왔다.
“흐흐, 흥, 알ㄱ-레ㅍㅌ…… 크페ㅅ-드레ㅂ 마그ㄴ-시ㅎ렌……. 람바ㄹㅋ-타 프-시헤ㅂㅎ라, 흐흐, 흐흐흐, 흥…….”
“…….”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지켜지던 가방이 비로소 무방비하게 놓였다.
던컨은 머리를 흔들고 퍼뜩 정신을 다잡았다.
지켜본 바론, 두 사람이 처음 상상했던 것처럼 애틋한 관계는 확실히 아니었다. 아마 일레니아는 나름대로 돕고 있는데, 카딤은 수상쩍은 면 때문에 불신하는…… 대충 그런 관계인 것 같은데……. 푸념한 걸로 봐선, 저 여자가 그래도 큰 악의를 품은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가방을 몰래 수색하란 카딤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순 없었다.
약속받은 보상 때문이 아니었다. 한동안 자신은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앞길을 안내하고 카딤을 돕진 못할망정, 헛것을 보고 착각하여 훼방이나 놓다니……. ‘최고의 길잡이’를 자처하던 자존심은, 이미 걸레짝처럼 무참히 구겨져 시큰해진 마음속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래선 가족까지 등지고 온 체면이 서질 않았다. 이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반드시 저 여자의 비밀을 성공적으로 밝히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던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망토를 뒤집어썼다.
“……후웁.”
펄럭 – !
유령보다도 은밀한 기척이 일레니아의 가방으로 향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