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미몽의 숲 (8)
카딤은 먼저 일행들을 찾아 합류했다.
어젯밤에 거하게 한잔했는지 둘 다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입가와 옷섶이 온통 피범벅이 된 자신 쪽도 만만치 않았지만.
두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입을 모아 물었다. 대충 멀리까지 숲을 살펴보고 왔다고 얼버무렸다. 던컨은 질문을 마치고도 고고학자의 눈치를 살피며 한참을 더 쭈뼛거렸다. 아무래도 부탁한 명을 수행한 기색. 결과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당장은 입단속을 시켰다.
비보가 있다면, 어제 그토록 과음을 했음에도 또 음주를 해야 했다는 것. 두 사람이 썩어들어가는 얼굴로 술을 홀짝 들이켜는 걸 본 후.
카딤은 일행을 자신이 찾아낸 것으로 인도했다.
―――― 우웅, 우웅, 우웅…….
“허어……? 이게 무슨…….”
“이건…….”
숙취마저 잊고 멍하니 찬탄을 흘리는 두 사람. 카딤은 일레니아 쪽으로 턱짓을 보냈다.
“내가 보기엔 저것이 이 숲을 이렇게 만든 근원 같은데. 내 생각이 맞나, 고고학자?”
“어…… 예…….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긴 한데…….”
일레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샛노란 눈동자가 못 박힌 듯이 고정됐다. 다른 일행들의 시선도 마찬가지로 한 곳에 고정됐다.
전방에 자라 있는 거대한 ‘나무’.
그냥 별다른 생각 없이 봐도 비범한 자태였다. 사람 키의 수십 배에 이르는 높이, 나이테를 수천 개는 품었을 둘레, 해무처럼 흘러내리는 청록빛 연기,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공명음……. 해초처럼 흐물대는 괴목(怪木)에 익숙해진 자들조차도 감탄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관찰력이 나쁘지 않은 자라면, 그것 외에도 이상한 점들을 찾을 수 있을 터.
던컨이 뒤늦게 그 사실들을 눈치채곤 당황하여 외쳤다.
“엇, 나, 나으리? 근데 이 나무, 나뭇잎이 너무 큰 것 아닙니까? 그리고 밑동 쪽도 뭔가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 말대로였다.
저 ‘나무’의 나뭇잎은 한 장 한 장이 굉장히 커서, 언뜻 봐선 깃발을 겹겹이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또한 저만한 거체를 지탱하려면 응당 뿌리가 굵직하여 밑둥이 도드라져야 하건만, 저 ‘나무’는 그냥 기둥을 꽂아놓은 것처럼 밑동이 맨숭맨숭했다.
단서를 갖고도 상식적으론 결론을 유추하기 힘들었다. 말을 꺼낸 던컨은 그저 의아하게만 여길 따름이었다. 반면 일레니아와 카딤은 무언갈 눈치채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저건…… ‘나무’가 아니라 ‘나뭇가지’네요.”
“……예?”
“아마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있는데…… 저건, 그 나무의 ‘가지’를 하나 잘라다가 심어놓은 거겠죠.”
“예엑?!”
던컨은 깜짝 놀라 자지러졌다.
저 ‘나무’는 그가 살면서 본 것 중 손에 꼽을 만큼 커다랬다. 그런데 저게 고작 ‘나뭇가지’에 불과하다니? 저 고고학자가 아직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게 아닌가 싶었다.
반면 카딤은 알만 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무언가 확실히 아는 정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바깥 세상에서 ‘엘프’ 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요소 하나가 드디어 등장했구나, 싶어서 그랬던 것일 뿐.
‘세계수(世界樹)’.
그 잎새는 궁창을 뒤덮고, 그 뿌리는 저승까지 닿으며, 그 기둥으로 세계를 지탱한다는 압도적인 크기의 거목. 대자연에 거하는 뭇 엘프들이 제 목숨보다 귀히 여기며 숭배한다는 신목(神木).
보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곤 직감했다. 저건 틀림없이 ‘세계수’ 비스무리한 나무의 가지일 거라고.
다만 따지고 보면 의문이긴 했다.
이 게임 속 세상에만 한정한다면, 엘프들과 세계수에 관한 전승 같은 건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다. 신화의 시대 이후 종적을 감췄다는 설정 탓에, 애초에 엘프들의 비중이 거의 없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만…….
‘……인간들이 엘프들을 무릎 꿇린 다음, 세계수는 그냥 좀 커다란 나무라고 서약시켰다는 전승도 없나.’
또한 이 모든 건 바깥세상에서 얻은 고정관념에 의한 추론일 뿐, 이 세상에선 ‘세계수’의 의미가 또 다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행 중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밖에 없을 터.
카딤은 일레니아를 응시했다.
초조하게 꼼질거리는 손가락. 샛노란 눈동자가 하늘 위의 태양을 훑었다. 일레니아는 질끈 눈꺼풀을 닫고 겨우 입술을 뗐다.
“그리고, 이 가지는 아마…… ‘신의 일부’일 거예요.”
“…….”
―――― 우웅, 우웅, 우웅…….
정적 위로 둔탁한 공명음이 덧씌워졌다.
일레니아는 별 다른 이변이 없다는 걸 깨닫고 숨을 돌리더니, 나무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보세요, 저기서 흘러내리는 저 녹색 안개 같은 거…… 저건 분명 헤실리아의 신기(神氣)일 거예요. 성유물은 대개 성력이나 신기를 담아 활용할 뿐인데, 저건 내부에서 끝없이 방출하고 있잖아요? 저 가지가 ‘신의 일부’가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저게, 엘프들의 신인 ‘헤실리아’의 쪼가리라는 건가?”
카딤의 질문. 일레니아는 잠시 멈칫했다가 수긍했다.
“예, 아마 그렇겠죠. 꿈과 환상은 헤실리아의 영역이니까요. 누군가 그녀의 일부를 꺾어 이곳에 심고…… 그 신기를 통해 악몽을 현실로 만드는 성법을 발동한 게 틀림없어요.”
“…….”
“후우, 이건 저로서도 예상치 못 했던 일이네요. 그냥 적당히 강력한 성유물이 근원의 정체일 줄 알았는데, 설마 저런 어마어마한 신물(神物)이 나타날 줄은…….”
뒤이어 저 ‘가지’가 이 앞에 있다는 건 여기가 숲의 중앙이란 뜻이니, 지금까지 온 만큼을 더 가야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모두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젠 남은 술도 충분치 않았고, 간 건강도 충분치 않았다. 던컨은 딸꾹질을 하며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카딤도 심각히 낯을 굳혔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저 가지가 신의 일부라니, 그럼 세계수가 즉 ‘헤실리아’라는 건가? 천상에 있어야 할 신이 왜 더럽게 큰 나무가 돼서 지상에 있다는 거지? 심지어 전에 들은 말도 종합해 보면, 저걸 꺾어 심은 게 드래곤 아니면 멜리사일 수 있다는 건데…….
해답 없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카딤은 그쯤 하고 단호히 잡념을 끊었다.
지금은 생각보단 행동이 앞서야 할 순간.
“어, 용병님……? 왜 그쪽으로 가세요?”
“그러니까, 어쨌든 저걸 없애야 숲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 아닌가.”
“예? 그, 그렇긴 한데…….”
“그러면 어서 잘라야지. 빌어먹을 환상들이 또 튀어나오기 전에.”
초연히 아탈라의 심판을 들어 올리는 전사. 일레니아는 식겁하여 두 눈을 치떴다.
“요, 용병님! 그건 불가능해요! 저건 고작 성유물 따위가 아니라 ‘신의 일부’라니까요? 인간의 힘으론, 절대로 흠집조차 내지 못할 거예요! 게, 게다가 분명 자른 순간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
흠집도 못 낼 거라며 잘려나갈 걸 걱정하는, 모순된 설득이 필사적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먹혔는지 당장 휘둘러질 것처럼 치솟았던 도끼머리가 조금씩 내려갔다. 일레니아는 한숨을 쉬며 십년감수했다는 내색을 했다.
하지만 카딤이 도낏자루를 놓은 건 아니었다.
“……저걸 잘라버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나?”
“예, 예! 신물은 그 강도가 압도적으로 강할 뿐 아니라, ‘격’이 낮은 존재가 입히는 피해를 극도로 경감시키기까지 해서…….”
“그럼 애초에 저게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예? 어, 그건….”
“저게 여기 심어져 있다는 건, 누군가는 이미 한 차례 꺾었단 것 아닌가.”
일레니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확실히 저 가지는 이미 꺾여 본신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였다. 지상에 머무는 존재가 감히 신체(神體)를 손상시키다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세상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는 법.
누군가 했다면 자신이라고 못 하리란 법은 없었다. 카딤은 결연히 기도문을 외웠다.
“[투쟁과 황야의 신, 아탈라시여. 당신의 대전사를 굽어살피소서, 횃불을 들어 전장으로 인도하소서, 부정한 적들에 대적할 힘을 주소서, 광풍이 몰아쳐도 꺾이지 않을 심지를 주소서…….]”
도낏자루를 꾹 쥐고, 기도에 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사명을 통감하며, 전사의 자아를 긍정했다. 과거를 되짚어보며, 고난에 굴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다. 압도적인 힘을 염원하며, 끝없이 신기를 방출시켰다. 2회차에서 처음으로 ‘신기’를 되찾은 순간, 그 순간의 광대한 폭발력을 재현하기 위해.
신기 제1형, ‘모래 폭풍’.
휘오오오오오오 – !!
흩날리는 싯누런 운무 속에서 카딤은 미소지었다. 그래, 빌어먹을 아탈라여. 온몸이 부서져도 좋으니, 어서 내게 저 거목을 쓰러뜨릴 힘을 다오.
―――― 우웅, 우웅, 우웅…….
그리하여 신의 일부를 꺾어 만든 ‘가지’가, 악몽을 현실로 만드는 이적을 발현하듯.
―――― 쿠호오오오오오오 – !
신의 축복이 파멸적으로 응축된 ‘신병’이, 거목을 잡초처럼 뒤흔들고 태산을 봉분처럼 흩어버릴 장엄한 모래 폭풍을 품고 휘둘러졌다.
*
햇살이 포근하게 흐드러진 황금빛 들판.
대포알처럼 커다란 불덩이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 쾅!
화르르륵, 화르르륵, 화르르륵 – !
불덩이는 도중에 폭발하여 세 갈래로 갈라지더니, 각각 다른 곳에 세워둔 세 허수아비에 적중했다. 가공할 화력이 눈 깜짝할 사이 허수아비를 뼈대까지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소녀 마법사, 멜리사는 환한 미소를 짓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꺄악! 성공했다! 봤어? 봤어? 셋 다 맞추는 거 똑똑히 봤지?”
허리까지 닿도록 땋은 붉은 머리칼이 융단처럼 찰랑였다. 대단한 성과에 비해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은 꽤나 방정맞았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관망하던 거한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래, 봤다. 제법 훌륭한 솜씨더군. 이제 마음만 먹으면, 여러 이웃집의 아궁이에 동시에 불을 붙여줄 수 있겠어.”
“흐흥, 뭐야? 칭찬을 고작 그런 식으로밖에 못해? 이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마법인데! 좀 더 성의있게 칭찬하라고!”
“그보다 불부터 꺼야 되는 것 아닌가? 저거, 가만뒀다간 잔디밭이 홀랑 다 탈 것 같은데.”
“앗! 맞다, 맞다! 어휴, 내 정신 좀 봐…….”
휘젓는 손길 한 번에 번져나가던 불길이 바로 파스스, 소화되었다. 멜리사는 후우, 한숨을 뱉으며 진땀을 닦았다.
뒷수습을 마친 후엔 냉큼 흙바닥에 엎어져 책을 펼쳤다. 끄적끄적, 그녀가 끼고 다니는 기록에 이번에 펼친 마법, ‘다중 분할 거대 화염구’에 대한 내용이 추가됐다. 꼬불꼬불 뒤얽힌 신비 문자들을 보고 거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지렁이 같은 글자는 암만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차라리 고대 문자가 더 쉬워 보일 정도야.”
“응? 생각보다 글자 자체는 배우기 쉬워, 이거! 그걸 활용해서 마법적인 힘을 발현하는 게 어려운 거지. 너도 한번 배워볼래?”
“……네 기준에서 쉽다고 다른 사람들도 쉬운 건 아니다. 그리고 난 어차피 마나를 못 느껴서 마법도 못 쓰는데 뭣 하러…….”
“아, 왜! 배워두면 나중에 또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흐흥, 내가 마법도 제대로 가르쳐 준다니까? 어디, 나만 한 마법사한테 배울 기회가 흔한 줄 알아?”
“…….”
“어서 이리 와, 카딤! 일단 우리 ‘마력구’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멜리사는 벌떡 일어나 굵은 팔뚝을 잡아끌었다. 거한, 카딤은 질색하는 시늉을 하며 설렁설렁 팔을 흔들었다. 마법사의 가녀린 몸뚱이가 종이 인형처럼 나풀나풀 흔들렸다.
이번엔 꼭 마법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설득하고,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단 답이 돌아오고, 그럼 도끼 던지는 법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하고, 발등 깨지기 싫으면 관두라는 답이 돌아오고…… 두 사람 사이로 늘상 일어나던 실랑이가 또다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실랑이가 예기치 못한 이변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두웅…….
수면에 물결이 퍼지듯, 잔잔하게 이지러지는 허공.
“…….”
멜리사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카딤이 걱정하는 어조로 물었다.
“왜 그러지, 멜리사? 무슨 일이냐.”
“……아, 아냐, 카딤……. 그…… 그게…….”
“혹시 아까 그 마법 때문에 몸에 무리가 왔나? 그렇다면 한숨 푹 자거라. 내가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켜주마.”
“아냐, 아냐. 그런 건 아닌데……. 그, 잠깐만. 나 잠깐만 어디 좀 갔다 올게, 카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 테니까…….”
애매한 미소와 함께 뒷걸음질치는 멜리사. 카딤은 미간을 슬쩍 좁혔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멜리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허공의 물결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손을 얹자, 세계가 일변했다.
후우우우우웅…….
덧없는 꿈처럼 황금 들판이 사라지고, 밀림처럼 초목과 덩굴로 뒤덮인 음침한 홀이 나타났다.
듬직한 야만인의 자태도 허상처럼 사라졌다. 대신 홀의 중앙,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늙수그레한 엘프 한 명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그, 세계수지기님……. 저,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긴급한 사안이 생겨서 피치 못하게 호출을…….”
“…….”
멜리사는 엘프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구우우웅 –
공간을 왜곡시켜 드높은 나무 계단을 한걸음에 올랐다. 덩굴로 뒤얽힌 옥좌 위로 올라가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엘프는 허둥지둥 뒤따라와 그 밑에 바짝 엎드렸다. 멜리사는 무기질적인 눈길을 보냈다.
“……‘꿈’ 속에 있을 땐 방해하지 말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
“등가죽을 태워 경고문을 새겨 주면, 앞으로는 잘 이해하려나.”
앳된 티가 나던 소녀 마법사는 그곳에 없었다.
오직 잿더미처럼 허망히 연소된 여인만이 있을 뿐.
그러나 그 서슬은 여전히 사나웠다. 화산이 두려운 이유는, 폭발 그 자체보다 이후에 덮쳐오는 쇄설류 때문이기 마련. 뾰족한 귀 끝까지 창백하게 질린 엘프는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히 고했다.
“소, 송구합니다, 세계수지기님. 그렇지만 정말로 중대한 사안인지라 꼬, 꼭 바로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됐고, 얘기해봐.”
“……예?”
“나를 깨울 정도로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어디 한번 얘기해보라고.”
“아, 아, 예. 그, 다름이 아니라…… 심어두셨던 ‘세계수의 가지’ 중 하나가 손상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현재 그 일대는 무방비하게 침입자들에게 노출된 상태입니다.”
끼긱, 갈라진 손톱이 팔걸이를 긁었다. 늙은 엘프는 심장 속을 긁힌 듯이 진저리를 쳤다.
“……그게 내 ‘꿈’을 도중에 깨울 만큼 중요한 일인가. 내 생각엔 그냥, 수호자 놈들에게 말해두는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게…… 일반적인 경우와는 손상된 방식이 매우 달라서…….”
“어떻게 손상됐길래 그러지. 무슨 수를 써도 아예 가지를 꺾진 못 했을 텐데.”
늙은 엘프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듯 망설였다.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었다. 그는 지금 불구덩이에 위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결국 들은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고했다.
“그…… 꺾였습니다.”
“……음?”
“심어 놓은 가지가 통째로, 꺾였습니다……. 누군가 어마어마한 물리력을 동원해 억지로 잘라낸 것 같은데…… 현재 정확한 원인 파악 및 일대 방호를 위해, 루샤도르 경의 인솔하에 조사단을 파견해놓았습니다.”
“……!”
잿더미 같은 여인의 눈동자 속에 맹렬한 불길이 일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