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세계수의 수호자들 (1)
멜리사가 폭발하는 불티처럼 옥좌에서 뛰쳐 올랐다.
“어느 쪽이야!”
“예?”
“어느 쪽이냐고! 잘린 가지가 있는 곳!! 남쪽이야, 북쪽이야!!”
“그, 그게…….”
“남쪽이야, 북쪽이야!!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말해!!!”
붉은 머리칼이 홍염처럼 치솟고, 격분한 마나가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화산과도 같은 열기에 그을려 홀 전체의 잎새들이 온통 까맣게 오그라들었다.
늙은 엘프는 경악했다. 저 여인이 이토록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관록 있는 노익장이라 해도 진정하기가 힘들었다. 벌렁벌렁 뛰는 심장을 추스르고, 산 채로 불타기 전에 서둘러 답을 고했다.
“나, 남쪽입니다, 남쪽! 남쪽에서 정확히 두 번째 자리, ‘미몽의 숲’의 중심에 있던 ‘세계수의 가지’가 잘려 나갔습니다!! 쿨럭, 쿨럭…….”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을 장악했던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멜리사는 풀썩, 옥좌에 도로 걸터앉았다. 온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들끓던 흥분이 허망하게 스러졌다. 오직 거친 알갱이 하나 없도록 잘근잘근 곱씹은, 잿더미처럼 쇠잔한 슬픔만이 남았을 뿐.
“남쪽 방향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잖아……. 그런 쪽으로…… 올 리가 없잖아……. 북쪽에, 북쪽에 있는 게 꺾였어야 했는데…… 왜 북쪽이 아닌 거야…….”
“…….”
여인의 목소리에 메마른 울음과 섧은 탄식이 뒤섞였다. 엘프는 숨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바짝 엎드렸다. 머리를 땅속에 처박은 새처럼, 별다른 소요 없이 이 격동의 잔재가 가라앉기만을 무력하게 기다렸다.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딱!
――――――――― 화르륵- !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나고, 섬화가 명멸했다.
엘프가 화들짝 놀라 몸을 들었다. 유성처럼 뻗어나간 불꼬리의 잔상이, 옥좌 바로 앞에서부터 시작해 머나먼 원경까지 이어져 있었다.
“메, 멜리사 님, 방금 그건 무슨…….”
“……북쪽에 심어 놓은 ‘세계수의 가지’도 몇 개 치웠어. 생각해보니, 이곳에도 드나들 입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
“…….”
엘프는 망연하게 입을 벌렸다.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먼 곳을 불태우다니? 아니, 그보다 수백 년간 공고히 침입자들을 막아 줬던 신체(神體)들을 고작 그런 이유로 치우다니? 그럼 이제부턴 이곳이 대수림 밖의 침입자들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된다는 것 아닌가?
한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중 그 어떤 것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가 여태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할 말을 삼키고 눈치를 살피는 재주 덕이었으니.
“그, 그러면 당분간 수호자들과 순찰대를 파견해 북부의 경계를 강화하도록 명하겠습니다. 누굴 파견할지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그런 건 알아서 하고, 당장 꺼져. 북쪽에서 소식이 있기 전까진 절대 다시 날 깨우지 말고.”
“예, 예, 알겠습니다……. 자비에 감사드리고, 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세계수지기님.”
늙은 엘프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인 다음, 부리나케 자리에서 달아났다.
허탈하게 뒤따르는 정적.
홀로 남은 멜리사는 망가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문득 처연히 눈길을 들어 바라봤다. 울창한 홀의 천장, 천상의 과실처럼 매달린 웅장하고 투명한 구체.
그 표면 위에서, 황금 들판을 등지고 자신만을 기다리는 거한의 자태가 꿈결처럼 어른거렸다.
*
카딤 일행은 여전히 얼떨떨한 여운에 젖어 있었다.
이쪽에서 힐끔, 저쪽에서 힐끔. 번갈아 흘기는 시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보다 못한 카딤이 쏘아붙였다.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거라. 그렇게 쥐새끼들처럼 곁눈질만 하지 말고.”
“…….”
“…….”
던컨과 일레니아는 뜨끔하여 시선을 거뒀다.
목구멍에 쌓인 말들은 참 많은데, 입 밖으로 꺼낼 엄두는 나질 않았다. 재차 말 못할 경악을 되새김질할 따름이었다. ‘신의 일부’라던 거대한 가지를, 저 전사가 모래 폭풍이 깃든 도끼로 일격에 끊어 버렸던 경이로운 장면을 회상하며.
미몽의 숲은 평범한 삼림으로 돌아왔다. 비록 모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 초목들이 초토화되었지만…… 이전에 비한다면 확실히 평범한 편이긴 했다.
더 이상 낯선 환경에 생경해할 필요도, 환상이 나타날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술을 마시고 현실감을 흐릴 필요도 없었다. 카딤도 굳이 신기의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기에, 일행이 나아가는 행군 속도는 전보다 월등히 빨라졌다.
평소에 이틀 걸리던 거리를 반나절 만에 주파했다. 길잡이가 마른세수를 하고 지도를 펼쳤다.
“참, 여러 우여곡절이 많긴 했다만…… 어쨌든 이젠 거의 다 와 가네요. 이 속도라면 이제 이틀 내로 목적지, ‘숲의 중앙’에 도착하게 될 거예요.”
“…….”
“제 직감이 말하길, 후우…… 아마 그곳에 여러분이 찾는 ‘대마법사’가 있을 거라네요.”
던컨이 흠칫, 몸을 떨더니 어떻게 그걸 알았냐는 듯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반면 카딤은 초연히 입매를 굳혔다. 슬슬 결정을 내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여자와 계속 동행할지, 아니면 이쯤 해서 떨쳐버릴지.
그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확인할 게 있었다.
이르게 찾아온 저녁, 적당한 핑계를 대고는 던컨만을 데리고 빠져나왔다. 던컨은 힐끔, 고고학자가 없는 걸 확인하고 눈치껏 알아낸 사실을 고하기 시작했다.
“……맡기신 명은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나으리. 저 여자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가방의 확인을 마쳤습니다.”
“그래, 안에서 뭔가 수상한 걸 찾아냈나.”
“예, 예…… 찾아내긴 했는데, 그…… 이걸 참, 뭐라 설명드려야 할지…….”
뜸 들이다 대뜸 밤그림자 망토를 끌러놓는 던컨.
“그, 이 망토랑 비슷한…… 옷감…….”
“……?”
“예, 다른 건 딱히 특별한 게 없었고…… 고문서들 밑에 이 망토처럼 ‘새까만 옷감’이 한가득 깔려 있었습니다요.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계속 가방에서 끌어내도 끝이 보이질 않더구만요…….”
전사의 콧잔등이 꿈틀 떨렸다.
그게 다였냐고 묻자, 그게 다였다는 답이 돌아왔다. 끝까지 다 꺼내 봤냐고 묻자, 너무 커서 그러진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카딤은 잠연히 숙고하다 그날의 정확한 정황을 털어놓아 보라고 추궁했다.
“예? 아, 그게…… 나으리가 떠나신 뒤에, 저 여자가 갑자기 목구멍에 물 마시듯 술을 쏟아붓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잔뜩 취해 가지고선 넋두리를 하는데…….”
“…….”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카딤은 던컨을 데리고 곧장 야영지로 돌아왔다.
일레니아는 간단한 요리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른 육포와 야채 따위의 건량을 포도주로 졸여 만든 간이 스튜. 건더기엔 케케묵은 먼지 같은 맛이 묻어났으나, 술이 좋은 술이었기에 그나마 먹을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첨예한 침묵이 흐르는데, 일레니아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아, 용병님? 예전에 가져가신 ‘망국의 은화’ 있잖아요. 그거 이따가 잠깐만 빌려주실 수 있나요? 뭔가 좀 연구해 볼 거리가 생겨서…….”
“…….”
잊힌 신의 성력을 담은 성유물, ‘망국의 은화’.
이 성유물은 어둠의 성법을 쓸 수 있게 해줄뿐더러, 갖고만 있어도 그에 대한 저항을 갖게 해준다고 했다. 지금 일레니아가 저걸 요구하는 의도는 필시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어둠의 성법으로 헛수작을 부리려는 것이거나, 혹은 지난번처럼 은신처를 만들려는 것이거나.
다만 ‘아큘라노스의 문신’과 ‘아탈라의 신기’가 있으니, 이젠 어둠의 성법에도 반격이 가능했다. 오히려 의중을 떠보기에 좋은 기회였다. 카딤은 한 손으론 도낏자루를 꾹 쥐고, 은화를 꺼내 일레니아에게 건넸다.
아마도, 오늘 밤에 모든 게 결판날 것 같다고 생각하며.
*
“[만물을 현혹하는 빛에 파묻혀 그 이름마저 잊힌 태초의 어둠이시여, 망향의 고통을 품고 이 땅을 헤매는 종복들을 잊지 마소서…….]”
잊힌 신의 사제는 ‘망국의 은화’를 사용하여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었다.
우우우웅 –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한 은신처.
여전히 이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함정이 아니라는 걸 밝히듯 일레니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뒤따라 들어가자 촛불처럼 희미한 불을 틔우곤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끼친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카딤 님. ‘굽어살피는 눈’의 주시를 피하려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되도록 곧바로 은신처를 조성하고 전언을 전하고자 했는데, 저희도 사정이 있어 급박하게 오느라 이제야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
적어도 이 여인이, 빌려준 은화로 헛수작을 부리려던 게 아니란 것만큼은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수작 하나는 이미 부려놓은 뒤였다. 카딤은 경박함의 가면을 벗고 무감정한 민낯을 드러낸 여인을 응시했다.
“던컨을 멋지게 속여넘겼더군.”
“…….”
“이쪽이 네 본모습이지 않나. 채신머리없는 고고학자가 아니라. 그날 정말로 만취해서 이성을 잃었다면, 술주정을 부릴 게 아니라 이렇게 목석처럼 정색하고 있었겠지.”
던컨에게 얘기를 들은 후, 카딤은 이런 판단을 내렸다.
이자는 이미 가방이 노려지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역으로 찔러 가방 속의 진짜 내용물은 꽁꽁 감추고 새까만 옷감으로 뒤덮었다. 그리고 그날, 일부러 만취한 척하여 던컨에게 기회를 주었다. 설마 직접 털어보고 확인한 물건을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
가느다란 입꼬리가 떨렸다. 기쁘다는 건지, 낭패했다는 건지, 일레니아는 그 저의가 모호한 미소를 떠올렸다.
“눈치채셨군요. 그렇지만, 정말로 조금도 취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적어도 현실감이 덜할 만큼은 정신을 흐리고 있었죠. 그래서 하마터면, 그대로 놓칠 뻔했고요.”
“……무얼 말이지?”
“던컨 님의 기척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취해서 인기척을 놓쳤다 한들, 그분의 종복인 제가 성유물인 ‘밤그림자 망토’의 기척까지 놓쳤단 건 이상한 일인데…….”
그러고는, 혹시 지금 던컨이 쓰는 ‘투명한 칼’은 어떤 경로로 얻었냐고 물었다. 카딤은 던컨의 고향에서 암흑가와 연루된 용병을 처치하고 얻었다고 답했다.
“그럼 그건 암흑가와 밀약을 맺은 ‘밤까마귀 분파’ 추종자가 쓰던 칼이, 모종의 경로로 그 용병의 손에 들어갔다가 던컨 님께 간 거라 봐야겠군요. 그토록 공교로운 일이 설마 우연이진 않을 테죠. 아무래도, 저희 일행 중 잊힌 신께서 눈여겨보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카딤은 작게 동요했다.
저 말은 자신과 일레니아뿐 아니라, 던컨도 무언가 잊힌 신의 영향을 받았단 뜻. 하기야 평범한 행상인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기척이 없긴 했다. 본디 행상인은 어딜 가나 사람을 모으고 눈길을 끌면서 먹고 사는 직업일 진데…….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던컨에 관한 게 아니었다. 카딤은 슬쩍 가볍게 고갯짓을 하고 주의를 환기했다.
“어찌 됐건, 허락 없이 짐짝에 손을 덴 건 사과하지. 그렇지만 이젠 엘가의 눈깔이 닿지 않는 곳에 왔으니, 슬슬 감춰둔 걸 다 밝혀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가방에 무얼 챙겨온 건지, 누가 ‘신의 일부’를 꺾어 미몽의 숲을 만든 건지, 왜 그토록 드래곤을 보러 가야 된다고 말했던 건지.
잊힌 신 교단은, 멜리사를 창궐의 원흉으로 여기고 처단하려는 건지.
일레니아의 얘기는 드래곤에 대한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롸ㅎ퓨흐-ㅅ트란…… 그러니까 ‘라퓨스트란’은, 사실상 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이죠. 다른 드래곤들은 신화의 시대의 막을 내리는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천벌의 밤’ 때 전부 절멸당하고 말았으니까요.”
……‘천벌의 밤’?
초장부터 낯선 사건이 튀어나왔다. 일레니아는 설명 없이 질문을 던졌다.
“카딤 님께선 이미 그 드래곤, 라퓨스트란을 만나 뵈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300년 전, 첫 번째 여정 때 말이죠.”
“……그랬지.”
드래곤에게 잡혀간 철없는 도련님을 구해달란 퀘스트 때문에 말이지.
“그럼 그때 혹여…… ‘대악마’가 곧 창궐하여 이 세계를 멸망시킬 테니, 드래곤에게 힘을 빌려달라 청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렇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요.”
확실히 그랬다.
드래곤과의 내기에서 이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후, 카딤은 간절히 도움을 청했다.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생물, 그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대악마’의 처치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터. 게임에선 시스템상 불가능한 청탁이었지만, 현실이 된 게임 속 세상에서 행동에 제한은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단호히 청을 물렸다.
자신의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진실이라고 믿었는데도 그랬다.
“예, 그 일로 짐작하실 수 있다시피…… 라퓨스트란은 세상사에 개입하길 지극히 꺼리고 있습니다. 설령 세상이 망할지도 모를 만한 위기라 해도, 정말 목전에 멸망이 도래한 게 아니면 관여하지 않을 정도로요. 아마도 그건…… ‘천벌의 밤’때 자신의 동족들이 무력하게 몰살당했던 기억 때문이겠죠.”
그래서 대체 ‘천벌의 밤’이 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일레니아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이 숲에서 라퓨스트란은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
“그리고 대패하여…… 크나큰 부상을 입었죠.”
전사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아직 햇병아리였을 때이긴 했으나, 카딤은 그 힘의 지극히 작은 편린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한데 그런 드래곤을 패배시켰다니? 아니, 애초에 드래곤이 목숨을 걸 만큼 큰 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니?
이 숲에서 그런 일을 가능케 할 존재는, 딱 하나밖에 짐작이 가질 않았다.
“모종의 이유로 드래곤이 전력을 다하진 못했으나…… 어쨌든 패배는 패배였죠. 드래곤은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긴 세월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지고의 존재를 쓰러뜨린 상대는, 무소불위의 자리에 올라 만사를 자신의 뜻대로 휘둘렀죠.”
“…….”
“그렇지만 아마…… 이번엔 그 결과가 다를 겁니다. 카딤 님께서도 홀로 가신다면 상대가 힘들겠지만…… 드래곤이 돕는다면 그 결과가 다를 테고요.”
혼자라면 불가능했겠지만, 누구보다 강력한 지원군이 왔으니까.
혼자라면 불가능했겠지만, 누구보다 강력한 조력자가 있으니까.
“……‘지고의 존재’와 ‘계시의 전사’가 힘을 합친다면, 아무리 초월의 문턱을 넘어선 ‘대마법사’라 해도 배겨낼 수 없을 테니까.”
일레니아의 눈동자가 결연한 빛을 발했다. 진심을 담아 무릎 꿇고, 창자가 끊어지는 간절함을 담아 고했다.
“그러니까 이 땅을 부정한 피로 물들이고, 언젠가 저 천공에 떠오른 광륜을 추락시킬, 피칠갑을 한 ‘계시의 전사’시여…….”
“…….”
“부디 드래곤과 힙을 합쳐…… 먼 옛날 세상을 구원한 불길이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세상을 사르는 겁화가 되어 버린 대마법사…… ‘멜리사’를 저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전사의 낯에, 촛불의 잔상마저 스러진 온전한 어둠이 깃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