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세계수의 수호자들 (10)
머리가 토막난 시체들이 널브러진 피의 아수라장.
살아남은 수호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급히 몸을 숙여 참격을 피한, ‘푸른 독니’ 보르두엘.
“흐, 흐흐흐, 흐흐흐…….”
1위계 수호자들이 약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이 세계수 안에선 한 명 한 명이 상급 악마도 너끈히 압살할 만한 강자들이었다. 단지 고위 악마의 권능에 가장 강력한 무장인 의태가 벗겨지고, 불식간에 ‘역린’을 찔려 이토록 허망하게 몰살당한 것일 뿐.
“흐, 흐흐, 내가, 내가 방심했군……. 그 괴물 같은 계집의 동료란 걸 너무 우습게 봤어…… 당연히 사특한 수작 한두 개쯤 부릴 것은 예상했어야 했는데…….”
“…….”
“혹여…… 남쪽에 있는 세계수의 가지를 부러뜨린 것도 네놈이 한 짓인가?”
시체 더미를 배회하는 눈동자가 처연하게 떨렸다. 카딤은 후련한 울림을 발하는 철혈귀를 허리춤에 걸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좋을 대로 생각하고, 몇 가지만 물어보지, 귀쟁이.”
“…….”
“아까 말한 걸로 봐선, 멜리사가 엘프들의 수명을 빼앗고 헤실리아의 힘까지 강탈한 것 같은데……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자세한 과정을 설명해 보아라.”
“…….”
“그리고 왜 헤실리아가 이 땅에 강림했는지, 왜 하필 거꾸로 된 형태로 강림했는지도 아는 대로 말해줬으면 한다만.”
보르네오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재차 실소를 흘렸다.
“흐, 흐흐…… 호기심도 참 많구만……. 그래서 그것들을 말해 주면, 정말로 그 계집이 앞으론 그러지 못하게 설득해 줄 텐가……?”
“물론이다.”
“흐흐흐, 흐흐……. 그런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아탈라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지. 누구와 달리, 신의 이름을 건 맹세를 어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 작자의 면상을 꼭 봐야 할 사정이 있어서.”
“…….”
아픈 곳을 찔린 듯 인상을 와락 구기는 세계수의 수호자.
저 말은 절대로 진실이어선 안 됐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쭙잖은 잔꾀를 부리다가 무고한 동족들만 몰살시킨 셈 아닌가? 얼굴에 실없는 기색은 가시고 표독스런 독기만이 남았다.
“아니, 아니, 아니……. 나는 짧은 귀의 말은 믿지 않는다. 네놈들의 혓바닥엔 꿀 바른 가시가 돋쳐 있고, 네놈들의 머릿속엔 만복을 모르는 황충들이 들끓는다…….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 모르는데, 하마터면 또 아둔하게 속아 넘어갈 뻔했군…….”
치르르륵, 피부가 미끈한 비늘로 뒤덮였다. ‘푸른 독니’는 두 팔 달린 시퍼런 뱀처럼 의태하고는 신속히 구석으로 기어갔다. 그러곤 품에서 고동빛 나무 열쇠를 하나 꺼내 들었다.
– 쉬르륵…… 이게 무엇인지 아나, 어리석은 짧은 귀여?”
“…….”
– 이건 세계수지기의 거처, ‘영원한 꿈의 홀’로 들어가는 열쇠다. 이게 없으면 절대로 그곳으로 가는 통로는 열리지 않지. ‘하얀 거북’이 갖고 있던 여분은 진작 빼앗아 폐기했으니, 이것만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열쇠인데…….
“…….”
– 내가 말야, 지금 살짝 허기가 져서…… 자칫하면 이걸 삼킬 것 같단 말이지……? 쉬르르륵…….
보르두엘이 농축된 독액을 끌어올려 퉷, 한 모금 바닥에 뱉었다. 기포가 바글바글 끓어오르며 세계수의 목피가 한 꺼풀 융해됐다.
푸쉬이이이익…….
– 그런데 내 몸뚱이엔 이런 독액이 잔뜩 들끓어서, 암만 생각해도 열쇠가 바로 녹지 않을까 싶더군. 아, 이럴 수가, ‘영원한 꿈의 홀’로 통하는 유일한 열쇠가 사라진다니……. 세계수지기를 보고자 하는 누군가는 매우 유감이겠구만……? 쉭, 쉬익, 쉭…….
푸른 뱀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게 아닌, 상황의 주도권을 잡은 거라 자기 최면을 걸었다. 혀를 늘름거리며 어떤 식으로 상대를 요리할지 천천히 고민해 보는데.
야만인은 전혀 원하던 반응을 보여 주질 않았다.
전전긍긍하며 낭패감을 드러내는 대신, 시큰둥하게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 유심히 눈을 치뜨고 턱을 한 번 쓸고, 피식, 헛웃음을 터뜨린 다음 여유롭게 답하는 카딤.
“삼켜보거라.”
– ……뭣?
“어서 삼켜보거라. 나도 궁금하군. 그 열쇠란 게 대관절 얼마나 빨리 녹아내릴지.”
– 쉭, 쉬익, 멍청한 짧은 귀 녀석……! 내가 다시 거짓말을 한다 생각한 건가? 안타깝게도, 이번엔 비늘 한 점만큼도 거짓 없는 명백한 진실…….
“아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그거 아나?”
– ……?
“제 손에 없는 열쇠는 삼킬 수 없다는 것.”
– 그게 무슨 헛소…… 엇.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부릅, 팽창했다.
방금 전까지 손 위에 있었던 열쇠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 황급히 혀를 늘름대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돌연 목선에 스산한 감촉이 드리워졌다. 이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기합이 내이로 파고들었다.
“뒤, 뒤져랏, 시발!”
츠즈즈즉 – !
– 쉬릭 – !
모가지를 죽 긁어내리는 칼질. 기습의 시기나 공격 부위는 더없이 깔끔했지만, 아쉽게도 위력이 모자랐다. 보이지 않는 칼날은 그저 푸른 비늘 위에 긴 흠집을 내는 데 그쳤다.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열쇠는 기습하기 전에 미리 훔쳐뒀으니까. 카딤이 협박 수단을 잃은 뱀을 향해 가차 없이 투척도끼를 내던졌다.
패래래래래래랙, 퍼 – 걱!!
– 쉬익 – !!
흉곽이 움푹 가라앉으며 몸뚱이가 뒤로 떠밀렸다. 벽면에 세차게 충돌하며 곧장 의태가 풀렸다.
쿵 – !
행상인은 그제야 망토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만신창이가 된 수호자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핏물을 울컥 토하며, 던컨이 훔쳐 간 열쇠를 충혈된 눈깔로 노려봤다.
“커헉, 짧은 귀…… 비열한, 짧은 귀 새끼들 같으니라고……. 언제 그렇게 쥐새끼처럼 다가와서 좀도둑질을……. 고목을 좀먹는 버러지만도 못한, 장작에 쌓아놓고 싸그리 불태워도 시원찮을, 빌어먹을, 짧은 귀 새끼들…….”
“…….”
카딤은 보르두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약속을 지키기로 맹세할 때, 다른 놈들은 대가리를 걸었다. 하지만 이놈만큼은 분명 다른 걸 걸었다. 길쭉한 양쪽 귀를 꾹 움켜쥐자,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낯짝이 대번에 해쓱하게 질렸다.
역시, 귀쟁이들에겐 이 귀때기가 아주 중요한 부위인가 보군.
그렇게 생각하며, 카딤은 양팔을 힘껏 벌렸다.
찌거거거거걱 – !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는 연골부 조직, 외이가 통째로 뜯겨져 나왔다. 귀뿌리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맨숭맨숭한 옆머리를 바라보며, 카딤은 선뜩하게 입가를 찢었다.
“자…… 이제 누가 짧은 귀지?”
“아아아아아악! 끄으으아아아아악!! 내, 내 귀!! 내 귀!! 돌려 줘어어어!! 돌려 줘어어!! 어서 돌려 ㅈ…….”
부탁대로 돌려줬다. 다만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콧잔등 쪽으로.
퍼 – 걱!
함몰된 얼굴 중앙에 뾰족이 귀 쪼가리가 솟은 몰골이 됐다. ‘푸른 독니’ 보르두엘은 거짓말처럼 비명을 뚝 그치고 풀썩 허물어졌다. 고꾸라진 낯짝 밑으로 체액이 줄줄 쏟아져 질퍽한 웅덩이를 이뤘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기만자의 최후.
앞서 이자를 암살하려 했던 던컨마저도 질겁하여 굳어버렸다. 카딤은 그런 행상인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던컨, 이제 날 기습해 보거라.”
“……예?”
“딱 5초 동안 가만히 있겠다. 이다음부턴 절대 방심하지 않을 테니, 기습에 성공하기가 썩 쉽지 않을 거다.”
“허억, 업, 예에?”
“5, 4, 3…….”
쯔걱 –
엉겁결에 뻗은 칼질이 팔뚝에 생채기를 냈다. 카딤은 흘러나오는 핏방울을 쓱, 문질러 닦고는 던컨의 손에서 나무 열쇠를 회수했다.
“잘했다. 눈치 좋게 열쇠도 회수했고, 그 여자의 가방도 확인했고, 나를 기습하는 것도 성공했고…… 한동안 성공적으로 네 가치를 증명했군. 약속대로 다시 달이 뜨지 않는 밤이 오면, 그땐 너의 무기에 이름을 벼려주마.”
“…….”
던컨은 말문이 턱 막혔다.
기쁘긴 한데…… 아니, 참, 기쁘긴 한데…… 이 와중에 그런 감정을 내색해도 되는 건지…….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둘러보며 뒤숭숭하게 눈초리를 떨었다. 수차례나 손에 피를 묻혔음에도 이렇게 참혹한 도살의 현장은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반면 카딤은 말을 마친 다음, 디딤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체들을 짓밟고 출구로 향했다.
이제 방해물은 전부 치웠다. 헛수작을 부리는 훼방꾼들은 전부 죽였고, 거처로 통하는 열쇠도 얻었다. 이 위로는 복잡한 갈림길도 없다고 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멜리사를 만나러 갈 때가 됐다.
*
기분 좋게 미풍이 부는 황금 들판.
쪼그린 채 손을 모으고 있던 거한이 퉁명스레 소녀에게 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헛수고를 해야 하지?”
“앗,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말도 벌써 수십 번 넘게 했단 것 아나? 후우, 내가 마나를 못 느낀다고 계속 이렇게 거짓말하면…….”
“아, 아냐, 아냐! 이번엔 진짜라고! 잠깐만 손 좀 줘봐!”
멜리사가 성큼 다가와 손등에 손을 겹쳤다. 그러자 거한의 손바닥 안에 자그마한 빛이 영글더니, 이내 새파랗고 반투명한 구체가 만들어졌다.
“짠! 봐봐, ‘마력구’ 완성! 짝짝짝, 축하해, 카딤! 와, 드디어 처음으로 마법에 성공했네? 너도 이제부턴 어엿한 마법사야!”
“…….”
거한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대신 만들어줬단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같잖은 사기를 치는 마법 선생을 향해 휙, 마력구를 집어던졌다. 펑, 마나가 폭발하며 붉은 머리칼이 헝클어졌고, 제자의 하극상을 고깝게 받아들인 마법 선생이 그에 수십 개의 마력구로 응하며, 둘 사이로 한동안 유치찬란한 소란이 벌어졌다.
그런데, 다시금 전과 같은 이변이 일어났다.
두웅…….
허공에 잔잔하게 퍼져가는 파문.
멜리사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흉신악살처럼 험악한 살기가 깃들었다. 카딤은 흠칫 놀라 눈시울을 치떴다.
“뭐지. 왜 그러는 거냐, 멜리사?”
“……카딤, 미안해. 나, 잠깐만 또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아.”
“무슨 일이지. 무언가 문제가 생겼나? 이유를 말해 보거라. 내가 도와줄 테니…….”
“아냐, 너무 걱정하진 마……. 앞으론, 절대 다시 이럴 일 없을 거야. 이번에 방해한 녀석은…… 뼛가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지근지근 태워버리고 올 테니까…….”
“……!”
말릴 틈도 없이, 멜리사는 격앙된 걸음으로 나아갔다. 거친 손길로 파문을 짚고 ‘세계수의 꿈’을 벗어났다.
후우우우우웅…….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언제나 쓰라리기 그지없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모든 것들이 한낱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아야 되니까. 자신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취한 허황된 몽유병자라는 걸 자각해야 하니까. 살갗을 박피하는 심정으로 사라지는 황금 들판을 우두커니 바라봐야 하니까.
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드넓고 음침한 홀.
진물처럼 지독한 풀의 냄새, 꿉꿉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이곳만이 올바른 진실이며,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임을 상기시키는 공기였다. 가슴에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뚫고 지독한 허탈감을 선사하는 공기였다.
그러나 이번엔 평소처럼 바로 허탈감에 침잠하지 않았다. 꿈을 깨운 훼방꾼에 대한 진노가 그보다 몇 배는 더 앞섰으니.
멜리사는 악착같이 마나를 응집하여, 지옥불보다 뜨거운 불길을 피워올렸다.
――――― 화르르르르르륵 – !!
하나 금세 그 불길을 꺼뜨릴 수밖에 없었다.
화르르르르르…….
홀의 한 가운데, 어째서인지 꿈에서만 있어야 할 거한이 서 있는 걸 목격했기에.
한순간 심장이 아릿하게 떨렸다. 입가에 스며드는 쓰디쓴 미소. 헛것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차마 헛것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걱정된다고 아예 꿈 밖까지 따라온 거야, 카딤?”
“…….”
“괜찮아. 금방 다시 돌아간다니까? 훼방꾼만 빨리 처리한 다음에…….”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자의 모습이 없었다.
홀 안에는 오직 거한의 신영뿐,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훼방꾼은 보이질 않았다.
멜리사는 슬며시 아미를 좁혔다. 헛것이 꿈을 깨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혹시 수호자 놈들이 일단 자신을 깨워놓고 후환이 두려워 숨은 건가 싶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지난번에 ‘하얀 거북’이 곤욕을 치른 얘기가 벌써 다 퍼졌겠지. 그렇지만 참으로 접시물처럼 얕은 수작이었다. 어서 탐지 마법을 사용해 근처에 숨어있을 원흉을 찾아내려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멜리사.”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던 목소리가.
잠시 시간이 멈췄다.
멜리사는 미동도 없이 정지했다.
“…….”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왜곡하고 나서야, 겨우 거한의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얼굴이 천 근처럼 무거웠다. 고개를 숙인 채로 겨우 숨통만을 틔웠다. 가쁘게 한 모금 숨을 들이켰다. 익숙한 내음이 흘러들었다. 언제나 적들과 맞서느라 사라지질 않는 피비린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뻣뻣하게 굳은 목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간신히 떨리는 시선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수천 번, 수만 번, 수억 번도 넘게 그려왔던.
어느 전사의 얼굴이, 눈에 담겼다.
“아, 아아, 아, 아아아…….”
믿기질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그을린 낯을 다급한 손길로 더듬었다. 투박한 턱선, 다부진 콧등, 흉터로 얼룩진 거친 살결. 처음으로 눈을 뜬 사람처럼, 다시는 못 만날 연인을 그리는 것처럼, 이 모든 감각을 영원히 손끝에 새길 것처럼 하염없이 매만진 끝에야 기어이 확신했다.
틀림없었다.
헛것이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헛것이 아니었다.
“아, 흐아, 아아, 흐아아, 아, 흐아아아…….”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동자가 아득한 눈물들을 머금고 일렁였다. 억눌린 말과 울음과 비명과 설움이 목구멍 너머에서 들끓었다. 끝 모를 세월을 지새우는 동안 지층처럼 꾹꾹 쌓여 억눌렸던 감정들이, 일시에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거대한 해일처럼 범람했다.
멜리사는 끝내 바닥에 허물어졌다. 행여 놓치면 다시 사라질까, 사내의 바짓단을 움켜쥔 채 서럽게 울음을 토했다.
“흐어어어어엉……. 왜, 왜 이제 온 거야아아……. 흐흑, 끄흑, 흑, 흐어어어엉……. 왜, 왜 이제, 이제 온 거야아아……. 끅, 흐윽, 왜 이제 온 거야……. 왜 이제야, 왜 이제서야, 왜, 왜, 이렇게 늦게, 어째서……. 끄흑, 흐어어어어어엉…….”
“…….”
“흐윽, 끄흑, 왜 떠난 거야, 멍청아아아……. 곁에 있기로 약속했잖아……. 흐어어어어어엉……. 왜, 왜…… 계속 곁에 있기로, 약속해놓고……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나서…… 흐어어어어엉…….”
“……미안하다. 이제는, 다시 가지 않으마. 내가 여기에 있다.”
카딤이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여 주는 동안.
잿더미처럼 연소된 여인은, 야만인을 처음 만났던 앳된 소녀 마법사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한없이 목 놓아 통곡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