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뜻밖의 재회 (3)
멜리사가 초점 잃은 눈길을 흩뿌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아, 아냐, 아냐……. 이거, 이거, 내가 한 일이 아닌데……. 나, 난 이런 걸 바란 적 없는……. 내, 내가 한 일이 아닌데…….”
“…….”
카딤은 일그러진 얼굴로 정지해 있었다. 적나라하게 잔디밭 위에 번져 있는, 한때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이었던 짓눌린 육편과 핏물을 바라보며.
“자, 잠깐, 기다려봐. 되돌릴 수 있어, 되돌릴 수 있어, 되돌릴 수 있으니까…….”
그 말대로였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육편이 피를 흠뻑 빨아들이며 도로 거한의 형상을 빚어냈다.
쿠르르륵, 쿠르르륵 –
……과연 그게 올바른 수습안이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허억, 허억……. 무엇이냐, 멜리사? 왜, 왜, 날 공격한 거지? 나와 똑같이 생긴 그놈은 대체 누구고…….”
“아, 아냐, 카딤……. 내, 내가 널 그렇게 만든 게 아니, 아냐……. 내가, 내가 널 어떻게 공격하겠어?”
“……허억, 그놈이 널 속인 건가? 속지 마라, 멜리사……. 그건, 악마나 괴물이 내 모습을 훔친 게 분명해…….”
“어, 어어? 아, 아냐, 이건, 아, 악마가 아냐……. 이, 이건, 카, 카딤이야……. 이게, 지, 진짜 카딤인데…… 저,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서, 겨우, 겨우, 다시 만났는데…….”
“후욱……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대체……? 나는, 한시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
“…….”
카딤은 비로소 전말을 파악했다.
‘세계수의 꿈’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이상향. 그리워하는 자와의 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멜리사는 저 ‘가짜 카딤’을 만들어 위안을 삼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진짜에게 보이면 안 된단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죽여 버렸을 테고…….
멜리사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다. 가짜라곤 하나, 그동안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여겨 왔을 존재. 그런 걸 제 손으로 죽였다가 살렸으니 저토록 충격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데 이번엔 되살아난 가짜가 집요하게 제가 진짜라 주장하고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다음에 육편이 되는 건 이쪽일지도 몰랐다.
카딤은 멜리사에게 다가가며 단호하게 말했다.
“……멜리사, 당장 여길 벗어나도록 하지. 이곳은 너무 위험하다.”
“후욱,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네놈……? 혹시, 매번 여기서 멜리사를 떠나게 했던 것도 네놈이 한 짓인가?”
가짜 카딤이 사납게 도끼를 치켜들었다. 카딤은 지그시 그 모습을 훑었다. 아직 덜 여문 1회차 시점의 자신이니, 제압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그 행동이 멜리사에게 미칠 여파.
다행히도 나 자신과의 혈투를 벌이기 전에, 멜리사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쿠구구구구 –
손길을 휘젓자, 석상처럼 굳어버리는 가짜 카딤.
“후욱, 후욱, 미, 미안해……. 죽여서 정말 미안해, 카딤……. 잠시만 그렇게 있어 줘……. 우욱, 끅, 끄웨에엑…….”
멜리사는 눈물을 흘리며 토악질을 했다. 굳어버린 가짜를 향해 읍소하다가, 납작하게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평정을 되찾으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카딤은 섣불리 그녀를 건드려 자극하는 대신, 묵묵히 옆자리에 서서 진정하기만을 기다려줬다.
저물지 않는 태양이 시계추처럼 중천을 오가고.
흙바닥을 축축이 적셨던 눈물과 핏물이 완전히 마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떨림이 멎었다.
멜리사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일어났다. 이제는 굳어버린 가짜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후우, 내 실수야……. 언젠가 진짜로 네가 돌아오면…… 이런,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예측했어야 했는데…….”
“……조금 진정이 됐나.”
“응, 이젠 괜찮아……. 미안, 못 볼 꼴을 보였네.”
“그럼 어서 여기서 나가도록 하지. 자세한 사정은 밖에 나가서 듣도록 하겠다.”
“그건 안돼, 카딤.”
카딤은 흠칫, 시선을 치켜들었다.
멜리사의 표정이 돌변했다.
옛 동료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소녀도, 본의 아니게 참상을 일으키고 충격받은 여인도 아닌, 의미를 알 수 없는 무표정한 공백, 그 위로 어그러진 뒤틀림이 덧씌워진 형상으로.
멜리사는 잿구덩이처럼 뻥 뚫린 눈길을 보내며,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그게, 밖에 나가면 다시 광증이 생기잖아……? 여기서 조금만 더 쉬다 가. 이렇게 맘 편히 쉴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글쎄. 맘 편히 쉬기엔, 썩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다만.”
“아, 아아, 미안. ‘이것’ 때문에 그래? 알았어, 다시 치워줄 테니까…….”
구우웅, 콰르르륵 – !
공간의 중앙이 왜곡되더니, 가짜 카딤의 육신이 소용돌이에 빨려가듯 사라졌다. 멜리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공을 가리키며 샐쭉 웃어 보였다.
완전히 제거한 건지, 다른 곳으로 보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멜리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정신 차려라, 멜리사.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강제로 제압해서라도 여길 빠져나가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빠져나간다니? 어디로? 여기, ‘세계수의 꿈’이 앞으로 우리가 쭉 함께 지낼 이상향인데…….”
“내가, 아직 밖에서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냐, 아냐, 아냐, 카딤……. 사명이나, 희생이나, 투쟁이나…… 바깥에 대한 미련은 전부 내려놓아도 돼. 넌, 그 세계를 위해 할 만큼 했어. 이제는 네가 이룬 위업들을 보답받고 편히 쉴 차례야.”
“…….”
“그리고 난, 거짓말은 안 했어. 봐봐. 여기에 계속 머무는 한, 네가 미칠 일 따윈 전혀 없어. 광증의 ‘완벽한 해결책’이 맞잖아?”
그 주장에 대한 대전사의 대답은 도낏자루를 꾹 움켜쥐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도리질을 쳤다.
“후우, 안 되겠다……. 미안, 정말 미안해, 카딤. 아무래도, 내가 이곳의 첫인상을 거하게 망친 것 같으니까…….”
“…….”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쐐 – 액! 패래래래래 –
불길한 직감을 느낀 카딤이 도끼를 내던지고, 멜리사가 짝, 손뼉을 치는 순간.
세상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웅 –
도끼가 거꾸로 되돌아왔다. 바람이 거꾸로 불었다. 잔디가 거꾸로 흔들렸다. 태양이 거꾸로 일주했다. 왜곡되어 사라졌던 가짜 카딤마저 다시 나타나고, 했던 행동을 거꾸로 되풀이하다, 육편이 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어 머나먼 들판 끝으로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만물을 처음처럼 되돌린 후, 멜리사는 다시 한번 짝, 손뼉을 쳤다.
후우우우웅…….
그러자 도로 정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멜리사는 태연하게 미소 짓고, 이곳에 들어와 처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카딤! 내가 지금 바로 광증을 사라지게 해줄 테니까!”
“…….”
하지만 딱 하나, 이 세상에서 되돌아가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카딤은 낯을 일그러뜨리고, 벽력처럼 달려들어 멜리사의 팔뚝을 붙들었다.
“……어?”
후웅, 화르르륵 – !
들어올려 메치는 찰나, 육신이 허깨비 같은 불꽃으로 뒤바뀌어 사라졌다. 카딤은 지체 없이 주변을 훑었다. 멜리사의 본신은 멀지 않은 곳으로 순간 이동해 당황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왜 그래, 카딤? 설마…… 기억이 되돌아가지 않은 거야?”
“…….”
비단 기억만 영향을 벗어난 게 아니었다. 심장을 옥죄는 불안감, 피를 향한 갈망. 육신에 개입하는 이물감을 떨치자 광증까지 원상 복구되었다.
하나 되레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자신의 육신만큼은 이 세계를 조작하는 권능에 저항이 가능하단 거니까. 인간을 육편으로 만드는 외압으로부턴 안전하지 않겠지만…….
최대한 서둘러 멜리사를 제압하고 여길 벗어나야 했다. 카딤은 뇌격을 내던지며, 철혈귀를 들고 돌격했다.
“흐어어어어어어업!!”
패래래래래래, 우 – 웅!
안타깝게도 그 서슬은 목표물에 닿지 못했다.
도끼는 궤적이 제멋대로 왜곡되었고, 칼날은 투명한 방벽에 틀어막혔다. 가까스로 신영에 접근해 급습해 봐도, 노호한 맹격은 매번 허깨비 같은 불꽃만을 가를 뿐이었다. 전사의 막강한 무위도 세계를 틀어쥔 마법사 앞에선 저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화르르륵 – !
멜리사는 회피와 방어를 일삼는 동시에, 카딤의 육신을 심부까지 샅샅이 훑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저리치며 눈시울을 부릅 치떴다.
“카, 카딤? 너, 몸에 무얼 담아 둔……. 그 새빨간 건 대체 무슨……?”
공허하게 풀어졌던 눈동자에 경악이 차올랐다. 멜리사는 여유를 잃고 충격에 빠져 중언부언 뇌까렸다.
“이럴 수가, 왜, 왜 카딤의 몸속에 저만한 ‘격’을 가진 존재가……. 기억, 기억을 되돌리려면…… 아니, 이 꿈을 유지하려면…… 저것부터, 저것부터 빨리 어떻게 해야…… 해결책, 해결책, 해결책…… ‘세계수의 꿈’을 더 강력히 조작할…… 해결책이…….”
“…….”
“……릴리아.”
정색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속삭이곤,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멜리사.
두우우웅…….
허공에 물결무늬가 번졌다. 들판 위로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꿈 밖의 세상에서 전해진 전언이 먼 하늘로부터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 [……조금만 기다려 줘, 카딤. ‘해결책’만 찾고 금방 돌아올게. 걱정 마. 네 몸속에 있는 걸 적출하고, 기억만 되돌리면, 전부 다…… 다시 괜찮아질 거야.]
퍽 – !
“……멜리사.”
홀로 남겨진 전사는 칼끝을 땅에 처박고, 뿌드득, 부러져라 이빨을 갈았다.
*
칼질과 도끼질로 엉망진창 초토화된 들판
카딤은 우두커니 중천에 드리운 태양을 바라봤다.
이 자리까지 이르기 전, 반복적으로 들었던 경고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굴러다녔다.
‘200년 넘게 그런 데 숨어 살았다면, 그 마법사도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지 않을깝쇼?’
‘……어쩌면 그 정신은 이미 악마에 홀린 자나 광인의 것처럼 엉망진창 뒤틀리고, 썩고, 문드러졌을지도 모릅니다.’
‘작금의 대마법사는, 카딤 님이 기억하는 그런 분이 아닐 확률이 현격히 높습니다…….’
“…….”
알고 있었다. 모르지 않았다. 아마도 저 말들이 옳을 거라는 걸. 홀로 고위 악마를 빚어낼 정도의 고통과 절망을 겪고서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들어오기 전 대화를 나누면서도 몇 차례나 꺼림칙한 조짐을 포착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먼저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고자 한 게 실수였던 걸까.
혹은, ‘광증’의 해결책을 찾았단 말을 덜컥 믿은 게 실수였던 걸까.
아니면, 애초에…… 자신 때문에 그녀의 삶이 망가졌다고 자책감을 가진 게 실수였던 걸까.
어느 쪽이건 이미 늦은 후회였다. 그녀의 정신은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뒤틀리고, 썩고, 문드러진 게 명백했으니. 그나마 바깥이었다면 물리적으로라도 폭주를 막았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이젠 손쓸 방법이 전무했다.
‘멜리사……. 정말 네 뜻대로만 돌아가는 이 가짜 천국에서, 나를 꼭두각시 삼아 영원토록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 진정 네가 바라는 것인가?’
광증으로부터의 해방은 꽤나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안주하며 머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세계의 절대자는 저도 모르게 생과 사를 농락하고, 시간과 기억마저 거리낌 없이 주무르는 미치광이였으니.
그나마 이번에도 몸속에 있다는 ‘정체불명의 존재’ 덕을 봤다. 만일 이게 없었더라면, 벌써 기억을 조작당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어 버렸을 터.
그러나 계속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멜리사는 분명 무언가 ‘해결책’을 찾으러 간다 했으니까.
그전에 어서 여길 탈출해야 하는데…… 사방을 초토화시켰는데도 공간은 멀쩡했고…… 이렇다 할 출구도 보이지 않았고…… 신비를 파괴하는 수단도 통하지 않는다 했고…… 그럼 하릴없이 멜리……̸̧̮̞̝̠͕̲̓̅́̀̽̿͝͝͠……̷̪͊̉̊́……̴̺̜͙̱̠̦́̍͌͒̃͆͗……̷̡̢̧̨̧̫͓̼̊̎̓̉͛͊̚͜ 그미친년의얼굴가죽을도려내고두개골을으스러뜨리고모가지를꺾어버리고사지를갈기갈기찢어버리고심장을물어뜯어죽여버리고즐겁게여길빠져나가야…….
찌걱 –
카딤은 새끼손톱을 들어내 뽑았다. 그 정도론 진정되지 않아, 연달아 다른 손톱 두 개를 더 뽑았다.
쯔그걱, 쯔그그걱 –
핏방울이 흘러내려 손끝에 송글송글 맺혔다. 옛 동료와 재회하고, 지나치게 평온한 상태를 겪고, 동료의 망가진 일면을 목도하고……. 감정의 풍파가 격하게 몰아치는 바람에 방어기제가 얄팍해졌다. 밀려드는 고통으로 광증을 억누르고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에도.
멜리사의 곁을 떠나거나, 그녀를 죽일 순 없다고.
‘흐윽, 끄흑, 왜 떠난 거야, 멍청아아아……. 곁에 있기로 약속했잖아……. 흐어어어어어엉……. 왜, 왜…… 계속 곁에 있기로, 약속해놓고……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나서…… 흐어어어어엉…….’
그녀의 내면에, 여전히 그 먼 옛날의 소녀 마법사가 남아있는 걸 보았기에.
그러므로 처분을 내리는 건, 반드시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본 뒤.
어떤 수단을 써도 그릇된 횡포를 멈추지 못하고…… 설득도, 회유도, 협박도, 제압도, 구속도, 폭력도 통하지 않을 경우에만……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서 자신의 손으로 안식을 선사해준다.
그것이, 아탈라의 대전사가 300년간 자신만을 기다리다 미쳐버린 옛 동료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자비였다.
“……하.”
……물론 현재 상황으로선 우스운 얘기였다.
꼼짝도 못 하고 이 아름다운 꿈동산에 감금된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더구나 어느 누구 못지않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놈이……. 어쩌면 300년을 몇 번이나 더 건너뛰도록 갇혀, 제가 누구인지조차 까먹고 대마법사의 노리개가 되는 게 자신의 미래일지도 몰랐다.
한데 구원의 손길은 의외로 빨리 나타났다.
두우웅…….
허공에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파문.
멜리사가 꿈을 떠날 때도 저런 현상이 나타났었다. 혹여 밖으로 나가게 해 줄지도 모를 이변. 근육을 긴장시키며 천천히 다가가는데, 하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나으리……? 혹시 그 안에 계신 게 맞습니까……?]
“…….”
카딤은 입가를 씩 찢으며 생각했다.
앞으론 저 친구를 ‘꽤나’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유능한 친구라 소개해야겠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