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뜻밖의 재회 (5)
세상이 멸망해 버렸다.
아마도 헤실리아드의 엘프들은 그렇게 착각할지도 몰랐다. 그럴 만도 했다. 그야, 그들이 목숨보다도 중히 여기는 세계수가 이 꼴이 되어 버렸으니.
피어오르는 짙은 매연, 그을리고 움푹 팬 웅장한 상흔.
―――― 구 – 웅, 쿠구구구…….
세계수는 뿌리목이 반파되어, 당장 땅으로 추락할 듯 위태로운 몰골이 되었다.
경이로운 참상이긴 했다. 무려 드래곤이 습격했을 당시에도 세계수는 목피가 불타고 큰 가지가 꺾이는 정도의 피해만 입었으니까. 이 참상을 만든 게 천상의 신도, 지옥의 대악마도 아닌, 고작 두 명의 인간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물론 평범한 인간과는 아득하게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다.
한쪽은 세계수를 손아귀에 넣고 신비의 극의를 뛰어넘은 대마법사, 다른 한쪽은 대악마를 도끼 한 자루로 참수했던 전성기로 되돌아간 광전사.
현존하는 인간 중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존재가 맞붙은 끝에 가려진 승자는…….
“……내가 말했잖아, 카딤.”
대마법사 쪽이었다.
반파된 현장의 중앙, 멜리사는 흰자까지 붉게 물든 눈을 치뜨고 혼절한 카딤을 씁쓸하게 내려다봤다.
“악마의 권능을 써도, ‘네 힘’만으론 절대 나에게 대적 못 한다고.”
살가죽이 탄화되고 근육이 올올이 파열되어, 카딤은 숨이 붙어있다는 것 말곤 불 구덩이에서 건진 시체와 큰 차이도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 멜리사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끔한 모습.
다만 ‘고유 특성’ 덕에 외상만 면했을 뿐, 멜리사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대마법을 숱하게 발동하고 막대한 피해를 방어하느라 속으론 큰 부담이 누적됐다. 더구나 그녀가 압도할 수 있었던 건 딱 카딤의 본신까지였다.
“……네 몸속에 있는 ‘그것의 힘’은 정말 의외였지만.”
카딤이 광증에 먹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순간, ‘정체불명의 존재’가 일각을 드러냈다.
그건, 아주 작은 편린을 대면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듯한 불길함을 발했다. 드래곤을 대면했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인 위압감. 뿌리목을 반파시킨 참상의 절반은 그 존재가 만들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 존재를 제압하느라 멜리사가 만든 것이었다.
만일 카딤의 육신이 부하를 감당 못하고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멜리사, 자신도 목숨을 걸고 맞서야만 했을 터.
‘그런데 그건 정말 정체가 뭐지? 한낱 인간의 몸에 기거하기엔 ‘격’이 너무 높은 존재였는데……. 맞아, 이제 보니 낯설진 않아. 분명, 분명히…… 300년 전에 마경에서도…….’
과거를 되짚어보는 찰나, 갑작스레 내꽂히는 잔상.
철퇴로 뒤통수를 맞은 듯 끔찍한 두통이 일고, 맹독처럼 쓰라린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멜리사는 새하얗게 질린 채 머리칼을 바득바득 쥐어뜯으며 웅크렸다.
“아아, 아아아, 흐아아, 흐아악…….”
기억의 창고, 가장 내밀한 구석에 수많은 자물쇠로 꽁꽁 묶어 감춰놨던 악몽이 풀려났다. 충격을 못 이겨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대다, 거한의 몸뚱이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통곡했다.
노을이 저물고, 달밤이 저물고, 동틀 무렵이 돼서야 가까스로 진정하고 일어나는 멜리사.
“빨리, 빨리 찾아봐야겠어……. 그 존재를 카딤과 분리할 방법을……. 아, 일단 ‘세계수의 꿈’으로 가서 카딤을 치유하고…… 나도 며칠만 회복한 다음에…….”
멜리사는 만신창이가 된 카딤을 부유시키고, 떨리는 입매를 어렵사리 끌어올렸다.
“걱정 마, 카딤. 아무리 네가 날 떠나고, 잊어버리고, 상처 입혀도…… 나는 절대 널 버리지 않을 테니까.”
*
던컨은 세계수의 유폐처에 구금되었다.
얼마 전, 스쳐 가듯 잠깐 보았던 다크 엘프 소녀의 옆자리에.
“당신은…….”
“…….”
“……가족들을 버린 행상인이시군요. 이곳으로 오게 되실 줄 알았습니다.”
“저, 저 가족 안 버렸습니다……. 휴우…….”
들어오기 무섭게 날아든 악의 없는 시비에, 던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유폐처로 오게 된 전말은 이러했다. 카딤의 명을 따라 은밀히 세계수를 빠져나가는데, 개미굴 같은 구역에 이르러 완전히 길을 잃었고, 자포자기하여 앉아있다 멜리사의 지시를 받은 수호자들에게 붙잡혀 구금된 것.
사실 무사히 세계수를 탈출했어도 막막하긴 매한가지였을 터였다. 대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조만간 지옥의 균열이 열리고 이 세계 자체가 멸망할 거라 했으니…….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그나마 걸어볼 만한 희망은 카딤뿐이었는데, 그는 다시 대마법사에게 사로잡힌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자를 구출할 ‘최고의 길잡이’도 이렇게 구속당하고 말았으니…… 이젠 모든 게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함께 갇힌 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너무 근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행상인님.”
“……예?”
“두 눈을 감고 나락을 헤매더라도, 어둠께선 출구를 예비해 놓으시는 법이니까요. 저희는 며칠 내로 이곳을 빠져나가게 될 겁니다.”
던컨은 눈망울을 끔뻑였다. 아무리 봐도 장기 복역수로 보이는 소녀를 향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 그쪽은 성함이……?”
“릴리아.”
“예, 그, 릴리아…… 양? 꽤 오랫동안 여기에 갇혀계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며칠 내로 빠져나간단 겁니까?”
“저는 꿈을 통해 미래를 엿본답니다. 그에 따르면 제가 여길 탈출할 기회는 총 두 번이 있는데, 지난번엔 제 자매에게 들킬 우려가 있어 일부러 택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계시의 전사’와의 혈투로 제 자매가 많이 지쳤으니…… 며칠 뒤 찾아올 기회를 붙잡으면, 틀림없이 무사히 여길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
던컨은 말없이 굳어 있다가, 이내 측은하단 눈길을 보냈다.
아이고, 딱하기도 하지……. 그래, 여기가 많이 안 좋은 환경이긴 했다. 저 어린 것이 볕 한 줌 안 드는 곳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홀로 갇혀 있었으니…… 안 미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말은 미치광이의 허언이 아니었다.
정확히 사흘 뒤, 유폐처의 입구 쪽에서 정체 모를 소음이 들려왔다.
‘……자님! 앞으로…… 들어오실 수…….’
‘……허억! 지금 뭐, 뭐 하시는…….’
– 크르르릉, 크허어어엉 – !!
‘……으아아아아아악!!’
문지기의 비명이 멀어짐과 동시에, 쿵쿵, 땅을 울리는 육중한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새카만 거체는 어둠에 녹아들어 윤곽이 흐릿한 가운데, 형형한 안광만이 재앙을 예고하는 별처럼 빛났다.
거대한 야수가 발톱으로 무자비하게 쇠창살을 부쉈다.
– 크허어어어어엉 – !!
콰가가가강 – !
“흐아아아아아악!!”
던컨이 혼비백산하여 자지러졌다. 릴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고 탁하게 물든 눈동자를 들었다.
“오셨군요, 파르네오 님.”
– 크르릉, 크릉…….
2위계 수호자, ‘검은 표범’ 파르네오는 그르렁대며 창살 안으로 들어섰다.
“……에?”
던컨은 얼빠진 표정으로, 소년 드루이드와 소녀 예언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파르네오는 한동안 실의에 젖어 있었다
‘아탈라의 대전사’와 나눈 대화는 소년을 성장하게 했으나, 동시에 꿈으로부턴 멀어지게 만들었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이상에 족쇄를 매달았다. 설상가상, 1위계 수호자들이 절반 넘게 죽고 세계수가 반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며, 도저히 유폐처의 소녀 따윈 돌아볼 수 없는 숨 막히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 상황에 전환점이 되어준 건 놀랍게도, 스승인 ‘하얀 거북’ 테비오였다.
‘파르네오, 그분을 구하거라.’
‘예?’
‘유폐처에 계신 릴리아 님을 구하거라. 세계수지기는 요양 중이라 당분간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다.’
왜 스승이 릴리아에게 존칭을 붙이는지, 왜 규율을 깨고 저런 과오를 범하라 하는지…… 의문이 밀려들었으나 일단 이런 우려부터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스승님의 명성에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해온 행실만 해도 스승님께 많은 오점을 남겼는데…….’
‘부질없는 고민은 하지 말 거라. 노구는 살 만큼 살았고…… 어차피 이대로 가면 모든 엘프들이 몰락하게 될 게다.’
‘……예?’
‘장생의 축복은 사라졌고, 수호자들은 학살당했고, 세계수는 무너졌고, 세계수지기는 그 모든 걸 수습할 마음이 없다. 전부 엘프들이 불의에 굴종함으로써 벌어진 일이지. 모든 내막을 밝힐 순 없으나,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파국이 머지않았단 것만은 알아두거라.’
‘그, 그렇지만, 스승님, 그 와중에 파국을 막기 위해 힘쓰는 게 아니라, 제 욕심만 채우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
‘네 개인의 욕심을 채우라는 게 아니다. 그것이 ‘올바른 일’이니까 하라는 게다. 죄 없는 한 생명의 존엄을 완전히 짓밟고 긴긴 세월 병든 가축처럼 가둬놓는 게…… 너는 진정 어머니 세계수께서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
‘너무 늦었지만, 끝까지 바로잡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 가라, 파르네오. 밤하늘에 부는 삭풍보다 날랜 맹수여. 부디 한 평생 등껍질에 숨어 산 비굴한 스승보단, 한결 나은 제자가 되어다오.’
그리하여 소년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걸 잃을 것을 각오하고, 유폐처를 급습했다.
– 크허어어어엉 – !
콰가각, 콰가각 – !
강력한 흑표범으로 의태한 덕에 어렵사리 세계수의 잔뿌리까지 끊어냈다. 릴리아 옆에 던컨까지 있어 드는 수고가 두 배가 됐다만…… 물어뜯고 할퀴고 악전고투한 끝에 어떻게든 해결했다. 파르네오는 등 뒤에 둘을 태우고 유폐처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내달려온 수호자들이 이미 개미굴처럼 뚫린 길목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파르네오 경! 당장 의태를 풀고 투항하시오!”
“그렇잖아도 혼란한 시국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오!”
다행히, 스승이 또 한 번 힘을 실어주었다.
쿵, 쿵, 쿵 – !
“끄아아아악!”
“흐어어억!! 테, 테비오 경? 이게 무슨……!”
집채만 한 하얀 거북이 포위망을 뚫고 한쪽 길을 터줬다. 흑표범은 득달같이 도약하여 그 너머로 들어섰다. 떠나기 전, 눈짓으로 스승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고.
“……테비오, 그 사이 너도 많이 늙었구나.”
한순간, 등 위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 건 착각이었을까.
거북은 흑표범이 지나간 길을 틀어막고 살아있는 방벽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덕분에 파르네오 일행은 수호자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수월히 복잡한 구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데 하층부로 내려가기 직전, 릴리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파르네오 님, 여기서부턴 위로 올라가셔야 돼요.”
– 크르르르……?
“위로 가시다 보면 저희들의 조력자분들이 나타날 거예요. 여길 빠져나가기 전에 그분들과 합류하고, ‘계시의 전사’…… 그러니까, 아탈라의 대전사님을 반드시 구출해야만 해요.”
– 크르륵, 크르르륵…….
쉽게 납득하긴 힘든 조언이었다. 당장 출구로 내려가도 탈출이 만만찮을 텐데 거꾸로 위로 올라가라니? 조력자의 정체나, 아탈라의 대전사를 ‘반드시’ 구출해야 하는 이유도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고…….
하나, 파르네오는 큰 망설임 없이 릴리아의 말을 따랐다.
– 크르륵, 크허어엉 – !
릴리아가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 건, 오늘 광경을 꿈에서 보았기 때문일 터. 그녀의 꿈은 언제나 적중했으니, 아무리 비상식적인 지시라 해도 믿고 따를 만했다.
한편 던컨도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어떻게 카딤을 구출해야 하나 막막하던 차에, 예기치 못한 도움의 손길을 받게 되었다. 이게 뭔 상황인지는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그, 리, 릴리아 양? 그런데 왜 릴리아 양이 나으리까지 도와주시는 겁니까? 방금 얘기한 조력자분들은 또 누구시고…….”
“……금방 알게 되실 거예요. 아마, 한 분은 지금 저쪽 하늘에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
릴리아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옹이구멍 너머, 세계수의 바깥을 가리켰다. 흑표범과 행상인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갔다.
릴리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쪽 하늘에서 번뜩이는 금색 광채가 보였다. 새처럼 날면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는데, 비행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는 내내 급횡전과 완횡전, 급상승과 급하강을 수시로 일삼는데도 속도와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광채가 아찔한 곡예 비행을 펼친 이유는 머지않아 드러났다. 땅에서 역행하는 빗줄기처럼 빽빽이 치솟는 청록빛 빛살. 일대의 모든 수호자와 순찰대가 그 하나만을 노리고 활을 쏘고 있었다.
그러나 표적을 맞춘 화살은 하나도 없었다. 광채는 현란한 기동으로 화살비 사이를 가로질러, 무사히 파르네오 일행이 있는 세계수의 상층부에 닿았다.
착륙하는 순간까지도 화살 한 발이 배후로 날아들었지만……
쐐 – 액, 턱 – !
……그는 쏜살처럼 손을 뒤로 휘저어 화살대를 낚아챘다. 던컨은 카딤 말고도 저걸 손으로 잡아내는 자가 있단 것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가까이서 본 조력자는 의외로 새가 아니라 인간 같은 형상이었다. 등짝에 피막으로 덮인 날개를 달고 있고, 스스로 빛나는 기이한 황금 판금 갑옷으로 무장했고, 아가리를 벌린 드래곤처럼 생긴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어쨌든 형상만큼은 인간과 흡사했다.
조력자가 날개를 접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흑표범은 본능적으로 경계했으나, 릴리아는 담담하기만 했다. 휘황한 면갑 너머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굉장히 오랜만이군, 릴리아. 한 150년만인가?”
“……오랜만이군요, 드래곤의 친우시여. 갇혀 있느라 세월을 제대로 가늠치 못 했다만, 아마 그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흐음, 안색이 많이 안 좋아졌군. 돌아가면 당분간은 푹 쉬는 편이 좋겠어. 아, 거기 계신 늠름한 표범과 멋진 수염을 기른 신사께서는 누구신가?”
말투는 호의적이었으나, 기묘한 존재감과 대화의 내용이 심사를 어지럽혔다. 드래곤의 친우라니? 그리고 150년 만이라니?
“그, 그러는 선생님께선 누구십니까? 사, 사람은 맞으신 겁니까……?”
던컨의 물음에 조력자는 골똘히 턱을 쓸었다.
“음…… 절반쯤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네. 그보다 자네, 대수림 밖에서 왔지? 혹시 어디 출신인가?”
“예? 자, 자유도시 동맹의 몰타나 출신입니다만…….”
“아, 아, 다행이군! 그럼 날 모르진 않겠구만.”
조력자가 드래곤 모양의 투구를 벗었다. 덥수룩한 금발과 쾌남형으로 시원시원하게 생긴 중년인의 얼굴, 그리고 뒤 뺨과 목을 뒤덮은 금빛 비늘이 드러났다.
“레밀리온이라고 한다네. 대표적인 업적으론 자네가 태어난 자유도시 동맹을 건립한 게 있지. 황금의 맹주나, 금화 한 닢으로 도시를 구한 자나…… 후대에 붙은 별명이 이것저것 많긴 한데, 그냥 담백하게 드래곤의 친우라고 불러도 좋네.”
“……예?”
“음? 뭐야,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나? 그럼 좀 멋쩍은데.”
그럴 리가 없었다. 던컨은 목이 부러져라 도리질을 쳤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정말로 오래전 갈래갈래 찢어져 있던 대륙 동부를 규합하고,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세력인 자유도시 동맹을 세웠던 전설적인 초대 맹주, 레밀리온 본인이 맞냐고 수도 없이 되물어 보았다.
그렇다는 대답을 수도 없이 듣고, 몇 차례 레밀리온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질의응답을 주고 받은 후, 정말로 당사자가 맞을지도 모른단 결론에 다다른 던컨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레밀리온이시여…….”
레밀리온이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답했다.
“왜 부르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