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최후의 드래곤 (2)
지옥에서,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
애초에 명제가 성립하질 않는 역설적인 화두다. 지옥은 살아있는 인간이 가는 장소가 아니니까.
그러나 만사에는 예외가 있는 법.
현세와 지옥을 이어버린 어느 대마법사는, 산 채로 지옥에 뛰어들어 저 화두의 답을 찾는 역할을 자처했다. 수십 년 동안 공기 대신 마기로 호흡하고, 지옥불이 들끓는 구덩이 사이를 헤매고, 악마들의 시체로 산등성이를 만들고 귀환한 대마법사가 내놓은 결론은 ‘그렇다’였다.
하지만 대마법사의 생환은 또 다른 화두를 낳았다.
영혼이 죽어 버린 인간은, 과연 온전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반백년 가까이 지옥을 헤매고 돌아온 멜리사는…… 절대적인 힘을 가졌으나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
“그렇군요……. 그래서…… 그녀가 ‘초월’의 문턱을 넘어 그만한 힘을 얻게 된 거군요…….”
일레니아의 혼잣말.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던 그녀는, 카딤과 눈을 맞추고 진중하게 말문을 텄다.
“카딤 님, 혹시 제가 지난번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천상의 신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 말입니다.”
“……신성, 신체, 그리고 신격이라고 했지, 아마.”
“예, 맞습니다. 그때 미처 설명드리지 못한 게 있다면, 바로 ‘격’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신적인 존재의 격을 ‘신격’이라 따로 일컫는 것일 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바로 이 ‘격’을 지니고 있거든요.”
‘신격’과 마찬가지로 ‘격’은 존재의 절대성을 나타내는 척도. 격이 높은 존재는 더 강력한 힘과 권능을 발휘하며, 격이 낮은 존재의 위협에는 대개 큰 해를 입지 않았다.
카딤은 당시 ‘신격’을 게임적으로 ‘신의 레벨’로 치환해서 해석했다. 마찬가지로 ‘격’은 ‘존재의 레벨’로 치환해서 해석하면 될 것 같았다.
아니,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정말로 게임의 ‘레벨’과 똑같은 개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도, 엘프도, 악마도, 괴물도, 모두 날 때부터 격을 타고나며, 특정한 조건을 통해 격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익히 아시다시피, 악마가 격을 높이는 조건은 ‘고통과 절망’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들은 격을 쌓은 증표로 뿔이 자라고 더 강한 힘과 능력을 얻게 되지요.”
“…….”
“마찬가지로 인간도 ‘격’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엔 카딤 님이나, 엘가의 성기사들이나, 마탑의 마법사들처럼,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초인들이 존재하지요. 그리고 오랜 조사 끝에 저희 교단이 유추한 결론에 따르면…… 인간이 격을 높이는 조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와 맞서 싸우고 죽여 승리하는 것.
악마가 고통과 절망을 취하면 ‘격’을 얻듯, 인간은 격이 높은 존재를 죽이면 ‘격’을 얻는다. 그러나 저보다 격이 높은 존재에 맞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인간 중엔 악마들처럼 높은 격의 존재가 흔히 나타나지 않았다.
……저마다의 이유로, 숨 쉬듯이 ‘악마’들을 사냥했던 극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격이 계속 높아지다 보면, 어느 순간 존재의 ‘격’이 ‘신격’으로 도약하는 ‘초월’이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때부터 그 존재는 존재로서의 이름을 얻고, 가히 신에 준할 만한 권능의 일각을 다루게 되지요. 예를 들자면, 뿔이 세 개 자란 고위 악마와 같이…….”
“…….”
“그러니까 즉, 현재 대마법사가 절대적인 강자가 된 것은…… 지옥에서 긴 세월을 지새는 동안 무수히 많은 악마들을 죽이고, 격을 높여 ‘초월’의 문턱을 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카딤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저 ‘격’이란 건 기이할 정도로 게임의 ‘레벨’ 시스템과 흡사했다.
모든 존재는 레벨을 올릴 수 있다, 저렙은 고렙에게 거의 피해를 줄 수 없다, 캐릭터가 낮은 레벨의 악마나 괴물을 죽이면 경험치를 적게 얻지만, 높은 레벨을 죽이면 많은 경험치를 얻는다, 레벨을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능력이 크게 도약하는 시점이 있다…….
그러고 보니 1회차에도, 2회차에도 자신의 육체는 악마와 강적들을 상대하며 초인적인 강함을 얻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 레벨과 스탯 포인트가 존재하지 않는단 건 착각이었던 모양.
게임이 나름 이 세계의 이치를 재현한 건지, 이 세계가 나름 게임의 시스템을 모방한 건지…… 전후관계는 불분명했다. 다만 이번에 멜리사에게 패배한 이유와 승리할 방법이 무엇인지는 명확해졌다.
패배한 이유는, 자신의 ‘격’이 낮았기에.
승리할 방법은, 자신의 ‘격’을 높이는 것.
……혹은, 대악마를 죽였을 때와 같이 누군가와 협력하는 것.
일레니아의 설명이 끝난 후, 릴리아도 그 말이 옳을 거라고 동의했다. 허나 카딤은 석연찮은 기미를 떨치지 못했다. 멜리사의 능력에 관해선 아직도 중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멜리사는 어떻게 지옥에서 살아남았고, 아직도 ‘마법’을 쓰고 있는 거지? 고대 마나는 대마법을 시전하고 완전히 고갈됐다고 들었는데.”
릴리아가 낮게 한숨을 쉬곤 이야기를 재개했다.
“세간에는 온 대륙의 마나가 고갈된 것으로 알려졌지요. 진실은 다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균열을 열며 절반이 사라졌고, 나머지 절반은 한 인간이 홀로 독점하였지요…….”
*
멜리사의 고유 특성, ‘마나의 그릇’.
대기에 떠도는 마나를 대거 응집하여 심장에 저장해 두는 특성이다. 게임에선 레벨이 오를수록 최대 마나와 마나 회복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식으로 구현됐다. 그런데 현실의 활용은 게임의 효과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멜리사는 온 세상의 마나를 전부 제 심장 속에 응집했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고, 긴 수련과 연구 끝에 특성을 발전시켜 가능했던 대업. 그만한 마나를 모은 건 처음엔 대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전을 마치고 절반이 남았음에도, 그녀는 마나를 세상에 환원하지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릴리아, 내가 지옥에 다녀올게. 거기서 최대한 악마들의 머릿수를 줄이고, 균열을 닫을 방법을 찾고 올게. 걱정 마, 남은 마나를 모조리 활용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직접 ‘지옥’으로 떠나 재앙을 수습하기 위해서.
지옥에는 마나가 없으니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비록 그로 인해 온 대륙의 정령이 사멸하고, 마법사들이 신비를 잃고, 마탑주가 마기를 ‘마나’의 대체재로 삼는 불상사가 벌어졌으나…… 필경 의도가 불순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좌우간 균열이 나타난 후 가장 큰 희소식은, 헤실리아가 지상에 강림한 것이었다.
목숨만 빼고 모든 걸 바친 릴리아의 염원은 끝끝내 저 천상에 닿았다. 세계수의 형상으로 현현한 엘프들의 신은 그 뿌리로 가장 위험한 균열의 중심을 봉쇄하고 세상의 멸망을 후일로 미뤘다.
그리고 균열이 나타난 후 가장 큰 비보는, 그 후에 멜리사가 지옥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무수한 악마들을 죽였으나, 끝내 균열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지옥에 들어가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꽃의 탕녀가 돌아왔다! 재앙을 일으키고, 온 세상의 마나를 도둑질하고, 제 한 몸 건사하겠다고 꽁지 빠지게 달아났던 불꽃의 탕녀가 돌아왔어!’
‘저년을 어서 찢어 죽여라! 저년은 갈기갈기 찢어 죽여, 그 시체를 어머니 세계수께 거름으로 바쳐 마땅하다!’
‘…….’
엘프들 중 일부가 돌아온 자신을 찢어 죽여야 한다고 지탄하자, 멜리사는 그들을 거꾸로 전부 다 찢어 죽였다. 샘물이라도 마시듯 아무렇지 않게 그 피로 목을 축이고는, 순식간에 세계수의 꼭대기에 올라 모든 엘프들 위에 군림했다.
엘프들의 극렬한 저항은 멜리사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지옥에서 쌓아 올린 압도적인 격, 셀 수 없는 악마들을 학살하고도 막대하게 남은 마나, 그리고 이것 때문에.
‘뭐, 뭐야, 분명히 심장을 맞췄는데…… 커헉!’
‘…….’
멜리사의 또 다른 고유 특성, ‘마나의 가호’.
피해를 받으면 외상을 입는 대신 심장에 저장한 마나를 소모하는 특성이다. 이 특성은 그녀가 온 세상의 마나를 독점했단 것과 어처구니없는 상승작용을 일으켜, 멜리사를 사실상 죽이는 게 불가능한 불사의 폭군으로 만들었다.
항거한 엘프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건 불 보듯 뻔한 일. 결국 대부분의 엘프들이 대마법사 앞에 굴복했다.
당시 세계수의 간택을 받아 세계수지기가 되었던 릴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매일같이 멜리사를 찾아가 대화와 설득을 시도했다.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렇게 엘프들을 학살해선 안 된다고, 지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해묵은 자매의 연과 그녀가 세계수의 제어권을 가졌단 사실 덕에 처음엔 그나마 대화가 통했다. 하지만 ‘세계수의 꿈’의 존재가 드러난 이후론 상황이 달라졌다.
‘……이 세계 안에선, 원하는 걸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그렇긴 한데…… 멜리사, 세계수의 꿈은 산 자의 도피처가 아닌 죽은 자의 휴식처야. 지금은 이런 데다 세계수의 힘을 낭비할 게 아니라, 균열을 봉쇄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때…….’
‘…….’
멜리사는 그 말을 무시했다. 어떻게든 강제로 ‘세계수의 꿈’을 손에 넣고 제 입맛에 맞는 이상향으로 만들려 시도했다. 뒤틀린 옛 자매의 폭거를 견디지 못한 세계수지기는 끝내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엘프들을 이끌고 세계수의 품을 떠났다.
릴리아가 박복한 운명을 타고났을언정, 신들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피치 못하게 세계수지기의 직분을 내려놓은 그녀를 이번엔 ‘잊힌 신’이 간택하여 사도로 삼았다. 그녀를 따르던 무리도 어둠의 신앙을 받아들여 일반적인 엘프들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다크 엘프’의 탄생이었다.
옛 동족들은 배교자라 손가락질했다만, 그들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잊힌 신의 인도가 없었다면 절대 대마법사의 추적을 따돌리지 못했을 테니. 다크 엘프들은 어둠의 옷자락에 숨어 얼마간 잠잠히 은둔 생활을 이어 나갔다.
안타깝게도 필연적으로 오래 가진 못할 평화였다.
멜리사는 세계수지기를 자칭했으나, 세계수와 그 꿈을 제어할 권한은 여전히 릴리아에게 있었다. 하릴없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떠나간 자매를 찾아다녔다. 세계수의 가지를 곳곳에 심어 퇴로를 차단하고, 세계수의 수호자들이라 불리는 친위대를 발족하고, 대수림 전역에 그들을 풀어 방방곡곡 수색하고…….
거짓된 세계수지기의 마수는 결국 다크 엘프들의 은신처에 닿았다. 간발의 차이로 릴리아가 납치당하는 건 막았으나,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고 거처를 버려야만 했다. 다크 엘프들은 정처 없이 오랜 방황과 도탄의 세월을 지새게 된다.
그러나 두 눈을 감고 나락을 헤매더라도 어둠은 어딘가에 출구를 마련해 두는 법.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돌던 다크 엘프들은 대수림의 어느 깊숙한 동굴에 이르러 상상도 못 한 존재와 마주하게 됐다.
– 또 어떤 미물들이…… 감히 본룡의 둥지에 발을 들이느냐.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목소리.
불길처럼 휘몰아치는 운명이, 은둔한 지고의 존재를 오랜 휴거에서 일깨웠다.
*
“……그렇게 다크 엘프들과 드래곤이 만나, 멜리사를 타도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는 건가?”
“예, 도중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만…… 종국엔 그렇게 되었지요.”
“결국은 졌다고 들었는데, 그 드래곤.”
시큰둥한 카딤의 발언. 릴리아와 레밀리온이 동시에 씁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옥에서 돌아온 대마법사 대 최후의 드래곤.
말만 들어선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세기의 대결이었으나, 그 승패는 매우 허망하게 가려졌다.
결과는 변변찮은 피해도 못 입힌 드래곤의 대패. 드래곤은 중상을 입고 긴 세월 칩거에 들어갔고, 조력자였던 릴리아는 유폐처에 감금됐고, 멜리사는 대적할 자가 없는 무소불위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모종의 이유로 드래곤이 전력을 다하진 못했다고 듣긴 했다만…….
카딤은 슬며시 턱을 쓸었다. 대결의 승패 자체도 의아하긴 한데 그보다 더 껄끄러운 의문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드래곤이 멜리사와 맞서도록 설득한 거지? 그 빌어먹을 드래곤은 세상사에 지극히도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대답이 나온 곳은 릴리아가 아니라 드래곤과 친우가 됐다는 레밀리온 쪽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뭐, 라퓨스트란을 설득하는 건 거의 다 내 몫이었다네. 그전에 릴리아와 다크 엘프들이 나를 설득하긴 했다만.”
“……그럼 그쪽은 드래곤을 어떻게 설득했지? 멜리사를 쓰러뜨린다고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 막을 수 있다네.”
무겁게 가라앉던 공기가 역전의 기류를 탔다.
레밀리온이 세로로 갈라진 동공을 치뜨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자네의 옛 동료, ‘세상을 사르는 겁화’를 격살하면 필시 우린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거라네. 엉덩이가 무거운 내 친우가 움직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지.”
“…….”
미묘한 알력, 기대감과 긴장감이 팽배한 정적.
카딤은 손길을 내리며 팔 근육을 당겼다. 저 말이 불확실한 추측에 의거한 것이라면, 아무리 자신을 구해줬다 한들 이들과는 뜻을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레밀리온의 말은 낭설이 아니었다. 릴리아가 증언을 보탰다.
“예, 드래곤의 친우께서 하신 말씀은 사실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멸망을 막는 건 아니고 또 한 번 훗날로 미루는 것이지만요.”
“……말해 보아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 분명 세계수의 힘도 한계에 다다랐다 들었는데.”
“아뇨, 세계수의 힘은 아직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단지…… 제 자매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유용된 게 문제였지요.”
멜리사는 장장 150년간 릴리아를 유폐처에 가둬놓고, 세계수의 여력을 대거 ‘세계수의 꿈’을 조작하는 데 쏟아붓도록 강제했다. 덕분에 멜리사는 그 세계에서 신과 같은 전능함을 누릴 수 있었으나…… 균열을 틀어막던 뿌리들은 생명력을 잃고 말라붙어 떨어지게 되었다.
“즉, 제 자매를 제압하여 세계수에서 떨어뜨려 놓으면, 제가 ‘세계수의 꿈’을 조작하는데 들어가는 힘을 재분배하여 뿌리들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흰 정말로 헤실리아 님의 여력이 다할 때까지, 균열의 붕괴를 막고 멸망을 유예하게 되겠지요.”
“…….”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충돌로 인해 세계수의 뿌리목에 큰 손상이 갔으니까요. 남은 뿌리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 떨어지기 전에 빨리 세계수의 힘을 돌려놓아야만 합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결연히 말하는 릴리아.
거짓을 말하는 걸론 보이지 않았다. 카딤의 동공에 무거운 회한이 어렸다.
거듭하여 드러난 추악한 진실이 어깨를 짓눌렀다. ‘세상을 사르는 겁화’라는 칭호는 허명이 아니었다. 멜리사는 진정 이 세계의 수명을 땔감으로 삼아 뒤틀린 제 욕망을 충족하고 있었다.
이를 지적하면, 멜리사가 그래 봤자 멸망은 불가피하다고 궤변을 일삼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뿌리를 되살리면, 멸망을 얼마나 미룰 수 있는 거지.”
“세계수의 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쓴다는 가정하에, 30년…… 아니, 아마 40년까진 버틸 겁니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균열을 완전히 닫을 방법을 찾아봐야겠지요.”
……그 정도면 멸망을 막기에 충분한 유예였다.
300년 전, 자신과 용사 일행은 그 10분의 1에 불과한 기간만으로도 세상을 구원하지 않았던가?
카딤은 결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뜻을 따라 멜리사를 제압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
“……!”
“수고 들여 구해준 값은 해야겠지. 어차피 나 혼자선 멜리사를 쓰러뜨리는 게 무리기도 했고.”
제각기 놀람과 반색을 표하는 일행들. 아무리 대마법사와 충돌이 있었다 해도 설득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렇게 선뜻 최대 전력이 합류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단, 카딤은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누군가 멜리사를 죽이는 건 허락지 않겠다.”
“…….”
“나는 아직 그녀에게 들어봐야 할 얘기가 남았다. 불구나 초주검으로 만드는 건 상관 않겠다만, 목숨까지 빼앗으려 들면 전력으로 저지하겠다. 불가피하게 죽여야 할 상황이 온다 해도 그 역할은 반드시 내가 맡겠다. 이 조건만 받아들이면 기꺼이 너희들과 힘을 합치도록 하지.”
일행은 고민 끝에 느릿하게 수긍했다.
걸리는 부분이 없진 않아도 납득할 만한 조건이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지었다 한들, 카딤에게 있어 멜리사는 한평생 진심으로 자신만을 기다렸던 옛 동료였으니…….
여하튼 ‘세상을 사르는 겁화’를 꺼뜨릴 양익 중 한쪽을 얻었으니, 이젠 또 다른 날개에게 협조를 얻을 차례였다.
지상 최강의 생물, 드래곤.
한데 드래곤의 친우가 난색을 표했다.
“어…… 그게 말일세. 음, 이게 내가 미처 말을 못 했는데…… 현재 라퓨스트란은…… 만나서 설득하기가 썩 쉽지 않을 거라네. 그게, 음, 왜 그러냐면 말이지…….”
중언부언 군소리를 하던 레밀리온은, 묵언의 독촉이 이어지자 결국 사정을 털어놓았다.
“후우……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는 절대 일러바치지 말게. 이건, 내가 진정, 그 드래곤과 막역한 친우라서 할 수 있는 말이네만…….”
“…….”
“라퓨스트란은 지금…… 바짝 겁먹고 쫄아 있다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