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최후의 드래곤 (3)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한 인간이 드래곤의 보물을 탐내고 그 둥지에 들어섰다.
보통은 드래곤의 발톱에 찢겨 죽거나, 숨결에 불타 죽거나, 한 입 거리 먹잇감이 되어 죽는 것으로 종결될 사건이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 인간의 아버지였던 대부호가 어떤 야만인에게 아들을 구해달라 의뢰했기에.
야만인은 망설임 없이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갔다. 동료였던 소녀 마법사가 돌아버린 거냐고 떽떽 소리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강맹한 자라도 드래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퀘스트를 이미 ‘게임 속’에서 수십 번도 넘게 깨봤다는 것.
과연 게임과 마찬가지로, 유희에 굶주린 드래곤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야만인을 무작정 죽이는 대신 한 가지 내기를 제안했다.
– 본룡의 숨결을 10초 동안 정면으로 버텨낸다면, 네 일행과 네 목숨, 감히 본룡의 소유물을 탐낸 이 버러지의 목숨까지도 살려주겠다. 물론 버티지 못한다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
드래곤의 숨결은 대양마저 증발시킨다. 사실상 그냥 죽으라는 것과 같은 말. 이대로라면 내기가 성립하지 않는단 걸 드래곤도 잘 알았던지라, 야만인에게 한 가지 호조건을 주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자신의 ‘보물’ 중 한 가지를 골라 방어구로 삼게 해주겠단 것.
야만인은 게임과 똑같은 ‘보물’을 선택했다.
‘……이 방패로 고르도록 하지.’
그리고 정말 10초간 드래곤의 숨결을 견뎌, 모두의 목숨을 구했으나.
야만인은 그걸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드래곤이 보물이 상할까 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고작 이 정도 화력밖에 못 내냐고, 자신은 더 강한 불꽃도 버틸 수 있다며 드래곤을 도발했다. 그러곤 전력을 다한 숨결을 10초 버티면 이번엔 소원을 한 가지 들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정말 10초간 전력을 다한 숨결을 견뎌, 드래곤에게 소원을 빌 기회를 얻어냈다.
비록 막판에 방패가 거의 다 녹아 큰 부상을 입었고, 드래곤이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았지만…….
‘허억, 허억…… 끄으윽…… 조만간 대악마의 군세가 창궐하여…… 이 세계를 멸망시킬 거다……. 부디 그 대악마를 처치하는 데…… 힘을 빌려다오, 드래곤…….’
– ……그건 안 된다. 다른 소원을 빌어라.
……그래도 이후의 일은 그럭저럭 해피 엔딩이라 할 만했다.
야만인은 결국 게임의 선택지대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둥지를 옮겨달란 소원을 빌었다. 드래곤은 그것만큼은 흔쾌히 받아들여 은밀히 대수림으로 떠났다. 대부호는 야만인이 아들을 구한 데다 드래곤의 위협까지 뿌리 뽑아준 것에 감격하여, 정성껏 부상을 치유해주고 약속한 것보다 훨씬 큰 포상을 베풀었다.
여기까지가 야만인, 카딤이 알고 있는 드래곤과 대부호 댁 도련님에 관한 1회차의 기억이었다.
허나 방랑자가 떠날지라도 세월의 격류는 멈추지 않고, 그 흐름은 종잡기 힘든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니.
그 누가 예상했으랴. 그때 살려놓은 도련님이 대륙 동부를 통일한 위인이 되고, 다시 한번 드래곤을 찾아가 친우가 되어 버릴 줄은…….
그 과정은 대강 이러했다.
카딤이 떠난 이후 소문이 와전되어, 간신히 살아남은 도련님은 의도치 않게 ‘드래곤을 물리치고 되돌아온 자’라는 이명을 얻었다. 그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골칫거릴 해결해 주길 청탁했다.
도련님은 그 청탁을 외면하지 못했다. 드래곤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야만인의 투지가 내면의 무언갈 일깨웠기에. 철없는 망나니 짓을 졸업하고, 제 나름의 지혜를 쥐어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곤 그들을 제 사람으로 포섭해 또 다른 사람들을 돕고 더욱 큰 명성을 얻었다.
전란의 시대에 드높은 명성이란 자석과도 같은 것, 언젠가부터 물 밀듯이 인재들이 몰려들어 도련님은 절로 커다란 세력을 꾸리게 됐다.
서른을 넘겼을 때, 그는 어지간한 소왕국의 군주보다도 영향력이 커졌다. 마흔을 넘겼을 때, 그는 대륙 동부 최대의 세력가가 되었다. 쉰을 넘겼을 때, 그는 마침내 대륙 동부를 통일하고 ‘자유도시 동맹’을 건립하여 초대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예순을 넘길 때까진, 오로지 동맹의 통치자로서 본분을 다하는 데 집중했다. 한데 일흔을 넘겼을 때, 그는 문득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거대한 충동이 뇌리를 장악했다.
‘……죽기 전에 사과해야 된다, 그 드래곤에게. 그때 멋대로 둥지에 침입하고, 소중한 보물을 건드려서 진심으로 미안했다고…….’
그건 모든 은원을 갚고 모든 위업을 이룬 영웅에게 남은 최후의 부채감 중 하나였다.
혹자가 들었다면 노망난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이 일흔을 넘긴 도련님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모든 걸 내려놓고 잠적하여 홀로 드래곤을 찾아 떠났다. 거침없는 행동력의 기저에는 수천 년을 사는 드래곤이라면 저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할 거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드래곤에 관해 가진 단서는 오직 대수림으로 떠났다는 것뿐. 그가 죽지 않고 대수림에서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낸 건, 챙겨간 유물이나 마도구 덕도 있지만, 그보단 그냥 신이 도왔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터였다.
하여간 예상은 적중했다. 새파란 애송이에서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었으나, 드래곤은 그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 왜 또 찾아온 거지, 네놈? 이번에도 제 버릇을 못 잊고 좀도둑질을 하러 온 건가.
‘아닐세, 이번엔 지난 과오를 사과하러 왔다네.’
어차피 얼마 안 남은 목숨, 영혼마저 질리게 하는 드래곤의 서슬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사죄의 선물로 가져온 보물들을 끌러놓았다. 드래곤은 콧방귀를 뀌었다.
– 죽음을 앞둔 필멸자들이 미친 짓을 하는 건 익히 보아 왔다만, 이런 식의 광기는 또 처음이군. 모래밭에 적힌 글자보다 부질없이 흩어질 네놈의 하찮은 이름은 무엇이더냐?
‘내 이름은 레밀리온이라네. 죽음을 앞둔 필멸자들을 대표하여 감히 묻건대, 그 어떤 풍파에도 꺾이지 않고 설령 쓰러지더라도 천상의 별이 되어 남을 그대의 거룩한 존명은 어떻게 되는가?’
– 본룡의 존명은…… 롸ㅎ퓨흐-ㅅ트란이다.
‘……그렇군. 영 발음하기가 힘든데, 그냥 ’라퓨스트란’ 정도로 부르면 안 되겠나?’
– …….
수천 년을 산 드래곤과 백 년도 못 산 인간의 기묘한 교우 관계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
동굴의 심부에서 가장 깊은 심부, 드래곤의 둥지로 내려가는 통로.
아직 비늘 한 조각도 나타나지 않았건만, 그 존재감은 이미 통로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레밀리온이 팔뚝을 틀어쥐고 벌벌 떠는 던컨을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봤다.
“정 버티기 힘들면 올라가서 기다려도 좋네. 나도 저 친구의 서슬에 완전히 적응하기까진 시간이 꽤 오래 걸렸거든.”
“아, 아닙니다! 저, 최고의 길잡이, 던컨 휠레드! 이, 이 정돈 얼마든지 버틸 수 있습니다요!”
짐짓 괜찮은 척했으나 던컨은 끝까지 틀어쥔 팔뚝을 풀진 못했다. 카딤의 살기나 악마의 마기와는 또 다른 종류의 압박감. 근본적인 생물로서의 압도적 격차가 거듭 뼈와 근육을 시큰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런 의문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아니, 저런 존재가…… 바짝 겁먹고 쫄아 있다고……?’
상상이 가질 않았다. 시야 밖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발하는 전설적인 괴물이, 자신처럼 이렇게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다니? 그것도 고작 한 인간에게 패배했던 것 때문에? 그건 어떤 면에선 신성모독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였다.
릴리아는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라 오지도 못했다. 던컨만큼은 아니어도 일레니아 역시 긴장한 게 분명했다. 대수림에 오기 전 그토록 드래곤 타령을 했음에도 지금은 한마디 말이 없는 걸 보니.
드래곤을 처음 보는 자들 중 태연한 건 오직 카딤뿐이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도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니…… 초면에 평정을 지킨 자는 아무도 없다고 봐도 좋으리라.
일행은 이윽고 둥지의 입구에 다다랐다. 레밀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하네만, 괜한 행동이나 말로 라퓨스트란을 자극하진 말게나. 그가 겁먹었다 해서 온순하고 안전한 소동물이 된 건 아니라네. 오히려 우리같이 무력한 들쥐들에겐, 여유로운 사자보다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훨씬 위험한 법이지.”
“…….”
“그래도 뭐, 본질이 나쁜 친구인 건 아니다만……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좋겠지. 내가 차근차근 설득해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즉각 일러줄 터이니, 자네들은 물음에 답하거나 내 말을 거드는 정도만 해주게나.”
떫게 고갯짓하는 일행들. 긴장을 추스르곤 차례대로 입구로 들어섰다.
아득히 높은 층고를 가진 공동이 펼쳐졌다.
내려오는 동안 걸린 오랜 시간을 납득하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높이만 높은 게 아니라 넓이까지 광활했으나, 실제 평수에 비해 공간은 그렇게까지 넓어 보이지 않았다.
형형색색 금은보화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에.
보석과 귀금속, 드워프제 장비, 축병과 신병……. 은하수처럼 흐드러진 보물의 광휘가 홍채를 시큰하게 했다. 한 도시를 거머쥐었던 투기장의 제왕, 유빅의 창고도 세상의 모든 부를 쓸어모은 듯한 이 보물고에 비한다면 한낱 토호의 헛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행 중 보물을 보고 감탄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보다 금은보화에 관심이 많은 행상인, 던컨마저도 그러했다. 큼직하게 뜨인 시선들은 오직 한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저, 보물 무더기의 중앙, 그 어떤 보물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비늘 덮인 신영. 차마 한 생물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두 눈에 담기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신영. 존재만으로도 운명의 불합리함을 설파하고, 포식자를 피식자로 만들고, 두려움을 모르는 자에게 두려움을 가르치는 신영.
가까이서 대면하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면서 느낀 존재감은 딱 맛보기 정도에 불과했다는 걸.
상상을 초월하는 중압감이 밀려들었다. 전신의 힘줄이 풀리고 근육이 썩은 고기처럼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일레니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식은땀을 흘렸고, 던컨은 망가진 인형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허, 허억…….”
“…….”
설령 아무것도 모른 채 왔다 한들 절로 깨달았을 터였다. 저 존재가 바로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는 걸.
드래곤은 금빛 비늘로 뒤덮인 거체를 둥글게 말고 황금의 성채처럼 고고하게 웅크려 있었다. 일행의 기척을 느끼고도 눈꺼풀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서슬 퍼런 잇새로 무신경한 인사말을 내뱉었을 뿐.
– 꺼져라, 태워버리기 전에.
쿠르르릉…….
영혼의 의지마저 뒤흔드는 육성, 건조한 어휘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흉한의 협박보다 위협적이었다. 친우라는 레밀리온마저 한순간 평정을 잃을 뻔했다.
“흠흠…… 간만에 보는구만, 라퓨스트란. 그때 불꽃을 빌려간 이후로는 처음이지, 아마? 요즘 몸 상태는 좀 어떠한가?”
– 닥쳐라, 버러지만도 못한 필멸자여……. 또 무슨 헛소릴하러 왔는진 모르겠다만, 본룡이 네놈을 용인으로 만들어줬다 해서 계속 죽이지 않으리란 건 크나큰 착각이다.
“하하, 성미를 보아하니 아직 살 만한가 보군! 그보다 눈이나 좀 떠보게나. 내가 어떤 손님을 데려왔는지 보면 아마 자네도 깜짝 놀랄 걸세.”
월식이 끝나고 만월이 드러나듯, 비늘 틈새로 눈꺼풀이 뜨이고 파충류 특유의 순막이 걷혔다. 카딤은 담담하게 그 천체처럼 장엄한 눈동자를 마주봤다.
“오랜만이군, 드래곤.”
드래곤, 라퓨스트란이 미간을 꿈틀, 떨었다.
– ……우둔한 흙먼지 덩어리 신의, 졸개로군. 정말로 아직도 명줄을 부지하고 있었던가.
속내에 내포된 언짢음을 감지하고 레밀리온이 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하, 역시, 바로 알아 보는구만. 하기야 300년이 우리한테나 긴 시간이지, 자네에겐 그리 긴 시간도 아닐 테지. 그나저나 희소식이 있다네! 바로 이자가 ‘세상을 사르는 겁화’를 처단하는 걸 돕기로 했다는 걸세!”
– …….
“자네도 기억하지? 이자가 무려 전력을 다한 자네의 숨결까지도 버텼던 거? 예전에 ‘세상을 사르는 겁화’를 습격했을 때야 예기치 못한 불상사로 인해 아쉽게 됐다만, 이번엔 다를 걸세! 이토록 든든한 조력자가 도와준다면 틀림없이 지난 패배를 설욕할 수 있을 거…….”
――――――― 쾅 – !
태산만한 앞발이 바닥을 강타했다.
– ……한 번만 더 그 마법쟁이 얘길 꺼내면, 짓이겨 버리겠다.
움푹 가라앉은 지면, 우수수 쏟아지는 보물들. 일행 모두가 한끗 차이로 곤죽이 되는 꼴을 면했다.
용인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떻게든 넋을 추스르고 설득을 이어가려 했지만, 본론으로 방향을 틀 때마다 앞발이 들리는 걸 보니 영 조짐이 좋지 않았다. 오르내리는 죽음을 지켜보던 던컨은 극도의 긴장감을 못 이겨 결국 까무러쳤다.
한편 카딤은 드래곤의 자태를 유심히 살폈다.
부러진 한쪽 뿔, 간헐적으로 떨리는 날개와 등 근육, 방어적으로 웅크린 자세, 군데군데 비늘이 벗겨질 정도로 깊숙이 남은 상흔…….
‘궁지에 몰린 고양이’란 레밀리온의 표현은 정확했다. 위협적인 척 굴고 있지만, 드래곤은 옛 기억보다 확연히 위축된 모습이었다.
기이한 건 그 원인이 멜리사인 것 같진 않다는 점.
카딤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쩌다가 멜리사에게 패배한 거지, 드래곤.”
– ……입조심 하거라, 흙먼지만도 못한 것아. 본룡이 제힘만 발휘했어도, 그 미천한 마법쟁이는 벌써 세계수와 함께 잿가루가 되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가서 그 말을 증명해 보거라. 멜리사를 막지 못하면 조만간 균열이 붕괴하고 세상이 멸망한다더군.”
– 닥쳐라……. 미물들의 꾐질에 놀아난 건 한번으로 족하다. 그 마법쟁이를 처단하러 간 건, 본룡이 장구한 세월을 생영(生榮)하는 동안 한 일 중 가장 수지에 안 맞는 우행이었다.
“그렇군. 무언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방해물이 있었나? 예를 들면, 그 품속의 상흔을 새긴 것이라던지.”
– ……!
정곡을 찔렸는지, 드래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카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말해 보아라, 드래곤. 대체 무엇이, 이 땅 위에 비길 맞수가 없다는 그대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지.”
덩치야 개미만도 못한 미물에 불과했으나, 전사의 존재감은 황금빛 거룡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굳건한 시선과 웅혼한 목소리엔 지고의 존재조차도 무시 못 할 기백이 실려 있었다.
– …….
최후의 드래곤은 카딤을 뚫어져라 노려 보다가.
이윽고, 짓씹어 뱉듯이 이야기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일장 사연을 털어놓은 후.
– ……그래도 본룡은 네놈들을 도와줄 수 없다. 그 마법쟁이를 죽이든 구워삶든, 이제는 네놈들끼리 알아서 하거라.
드래곤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카딤은 들어오기 전 레밀리온에게 들었던 말을 되새겼다.
‘……괜한 행동이나 말로 라퓨스트란을 자극하진 말게나.’
그 진심 어린 경고를 감안하여, 최대한 자극적인 맛을 덜어낸 어휘로 담백하게 도발했다.
“예나 지금이나 뼛속까지 겁쟁이 새끼인 건 똑같군. 드래곤이란 이름값이 아까운데, 차라리 황금 땅딸이도마뱀붙이 정도로 개명하는 게 어떻겠나.”
“…….”
일레니아는 체온이 10도쯤 수직 하강하는 기분을 느꼈다.
“…….”
던컨은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까무러쳤다.
– …….
드래곤의 동공에 천불 같은 역정이 깃들었다.
“…….”
레밀리온은 그만 눈앞이 깜깜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