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최후의 드래곤 (4)
드래곤의 이야기는 상당히 뜬금없는 부분으로부터 시작했다.
– ‘산맥’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필멸자들이여.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대륙에 이런저런 산들은 많지만, ‘산맥’이라 불리는 지형은 오로지 한 곳 뿐이니까. 일직선으로 대륙 중앙과 대륙 서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지.
그곳을 넘어서야만 ‘황야’와 ‘마경’에 이를 수 있다.
설정상 산맥 너머의 황야에서 왔고, 직접 산맥을 넘어보기도 했던 야만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런 질문을 던진 건진 감도 안 왔다만.
– 그렇다면, 그 ‘산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알고 있는가?
현실적으로 따지면 대륙판 따위의 충돌 때문이겠지. 하지만 카딤의 직감은 절대 그리 범상한 원인일 리가 없다고 일러바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상치도 못한 얘기가 튀어나왔다.
– ‘산맥’은, 내 동족들의 시체가 쌓여 생겨난 것이다.
“…….”
– 천 마리에 이르는 드래곤의 뼈와 살점. 그것들이 첩첩이 쌓여 퇴적되고 부패되고 풍화된 잔해물, 그 위로 무정한 세월의 사토가 뒤덮여 형성된 무덤이 바로 대륙을 가로지르는 ‘산맥’의 정체다…….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생물. 한 마리의 드래곤은 능히 도시를 멸망시키며, 열 마리의 드래곤은 능히 나라를 멸망시키며, 백 마리의 드래곤은 능히 대륙을 멸망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불가해한 세상의 섭리는, 때때로 피조물의 이지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참변을 일으키기 마련이니.
어느 날, 고작 하룻밤만에 천 마리의 드래곤이 무력하게 절멸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천벌의 밤’.
인간과 엘프와 드워프가 대륙의 패권을 두고 맞서고, 신들이 직접 지상의 질서에 관여하며, 드래곤들이 천상의 아성을 넘보았던 ‘신화의 시대’의 막을 내리는 대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엘가를 추종하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이종족들이 변방으로 종적을 감추고, 살아 숨 쉬는 파멸로 군림하던 드래곤들은 영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현재 공식적으로 ‘천벌의 밤’에 관해 남아 있는 사료는 없다. 그저 드래곤들이 오만함에 취해 신의 자리에 도전했다가, 진노한 신에 의해 멸종했단 정도의 얘기만이 알음알음 구전됐을 뿐.
그러나 몸소 겪어보았던 드래곤의 술회에 따르면 진상은 이러했다.
– 본룡들은 어느 날, 엘가의 ‘신성’이 바뀌었단 걸 깨달았다.
“……!”
– 신격과 신체…… 절대적인 권능의 근간이 되는 껍데기는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 있던 ‘빛과 질서의 신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지. 대신, 형언할 수 없이 꺼림칙한 무언가의 ‘신성’이 그 모습을 차지하고 절대신 행세를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천상의 권좌를 차지한 ‘가짜 엘가’는 공정하고 자비로운 진짜 엘가와는 달랐다. 제 추종자들에게 과도하게 강력한 축복을 내리고, 태양을 제 눈으로 삼아 만물을 감시하고, 제 정체를 간파하거나 부정하는 자들을 척살하며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드래곤들은 그 폭거를 좌시하지 않았다. 피조물 중 가장 강력한 존재들로서 책임을 지고, 모든 드래곤이 한날한시에 모여 엘가의 눈동자, ‘태양’을 향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그리고 결과는 더없이 참혹했다.
– 그날은 밤이 되어도 태양이 저물지 않았다……. 천벌, 천벌, 천벌……. 순리를 거스른 태양은, 세계를 멸망시킬 폭우처럼 ‘천벌’의 세례를 쏟아부었다……. 거짓된 신의 불벼락이 굳건한 본룡들의 갑피와 날개를 백지장처럼 꿰뚫었다……. 그럼에도 최후의 최후까지 모든 드래곤들이 포기하지 않고 사투했으나…… 끝내 저 가증스러운 눈동자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무참히 전멸하고 말았다…….
드래곤은 신이 아니면 대적할 자가 없다는 지상 최강의 생물. 그러나, 신의 격노 앞에선 드래곤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했다.
모든 드래곤이 절멸당했다. 일절의 문학적 수사 없이, 시체들이 산맥을 이뤘다. 오직 단 하나, 시체 무더기에 깔려있다 회생한 라퓨스트란만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사했다.
살았다한들 최후의 드래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위세를 누릴 수 없었다. 엘가의 눈 밖에 나, 잊힌 신의 추종자들과 같이 양지에서 힘을 발휘하면 ‘천벌’을 받게 되었기에.
라퓨스트란은 불가피하게 제 둥지에 은둔했다. 모든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 침입자를 불 태우며 보물이나 수집하는 삶을 영위했다. 대악마가 나타나건, 균열이 생겨나건, 악마들이 창궐하건 관여하지 않고…….
수천 년의 은둔 생활 중 단 한번의 예외는, ‘세상을 사르는 겁화’에 맞선 것.
그것도 기실 멸망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아득한 세월이 흘렀으니 ‘천벌’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고.
그러나 결과는 변함없이 참혹했다.
– 그 마법쟁이의 불꽃은 위협적이긴 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지. 하지만 저 저주받을 엘가 놈의 ‘천벌’은 그토록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버틸 수가 없더군……. 제대로 힘을 발휘할 틈도 없이…… 세계수에 닿자마자 집중포화를 당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갈라진 동공에 막막한 공포가 어렸다. 웅크린 자세가 느슨해져, 아직까지도 몸통에 남은 천벌의 상흔이 뚜렷이 드러났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지고의 존재가 왜 두려움에 떠는지, 왜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았는지, 왜 대마법사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대패했는지…….
카딤은 슬쩍 인상을 구겼다. 무려 천 마리의 드래곤을 몰살시켰다니, ‘천벌’의 위력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다시금 멜리사와 맞서도록 드래곤의 협조를 얻는 건 쉽지 않을 터.
그러나.
“위대한 지고의 존재, 롸ㅎ퓨흐-ㅅ트란이시여. 잠시 이걸 봐주십시오.”
이번엔 해결책이 있었다.
일레니아가 커다란 암막을 꺼내 펼쳐 보였다. 교단에서 하사받은 성유물, ‘밤그림자 암막’. 어둠의 대성법이 깃든 이 암막으로 태양을 가리면 일시적으로 천벌을 피하는 게 가능했다.
라퓨스트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팽창했다. 대낮에 어둠의 성법을 쓰고도 무사했단 증언을 듣자, 팽창은 최고조에 이르고 달뜬 열기가 어렸다.
하지만 그 열기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드래곤은 고뇌 끝에 부탁을 거절했다. 그 많던 드래곤도 천벌에 무력하게 당했는데, 이름도 잃은 잡신 따위의 성유물을 믿긴 힘들단 이유. 이미 효과는 입증됐다고, 이건 천벌을 막는 게 아니라 눈을 속이는 거라고, 이번엔 태양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아니니 괜찮을 거라고, 일레니아가 간곡히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
– ……그래도 본룡은 네놈들을 도와줄 수 없다. 그 마법쟁이를 죽이든 구워삶든, 이제는 네놈들끼리 알아서 하거라.
카딤은 그쯤 해서 참지 못하고 담백하게 도발했다.
“예나 지금이나 뼛속까지 겁쟁이 새끼인 건 똑같군. 드래곤이란 이름값이 아까운데, 차라리 황금 땅딸이도마뱀붙이 정도로 개명하는 게 어떻겠나.”
““…….””
– …….
일동이 충격에 잠기고.
드래곤의 동공에 천불이 어렸다.
저 불꽃은 사방의 온기를 흡수하여 만들어진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렇게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으니.
– ……방금, 뭐라고 했느냐.
“겁쟁이 새끼라고 했다. 그리고 황금 땅딸이도마뱀붙이로 개명하는 게 어떻겠냐고.”
– [다 – 시 – 한 – 번 – 말 – 해 – 봐 – 라 – !!!!]
―――――― 콰과과과과 – !!!
용언(龍言), 광포한 드래곤의 포효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충격파가 보물 무더기를 일거에 갈라버리고, 천장 한 귀퉁이를 무너뜨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육신에서 깡그리 생기를 앗아갔다.
카딤만은 동요를 내색하지 않았다. 이미 저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바. 세포 한 톨 한 톨이 오그라드는 중압감을 딛고 준열하게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천벌’에 대책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지. 허나 증명된 대책이 있는데도 내빼는 건, 그건 그냥 네놈이 덩치만 큰 겁쟁이란 뜻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구차하게 살 거면 차라리 동족들과 같이 죽고 산맥에 능선이나 하나 늘려주지 그랬나?”
– [닥 – 쳐 – 라!!!] 네놈, 네까짓 버러지만도 못한 것이 무얼 안다고……!
“그 버러지만도 못한 것이, 이미 한 차례 세상을 구했다. 네놈이 이 안온한 보금자리에 처박혀 세월을 썩히고 있는 동안, 나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역경을 악착같이 견뎌내고 대악마의 모가지를 끊었다.”
– …….
폭발하던 거룡의 격노가 일순간 멎었다. 카딤은 비장한 눈매로 뒤에 선 일행들을 눈짓했다.
“아니, 비단 나만 그런 것도 아니지.”
– …….
“저 여인은, 네놈처럼 ‘천벌’을 받았는데도 태양을 두려워 않고 나를 돕고 있다. 저 사내는, 그 어떤 신의 도움도 없이 엘가쟁이들의 제국에 견줄 만한 세력을 만들었다. 심지어 저기 바닥에 까무러친 행상인도, 제 가족들마저 등지는 각오로 나를 쫓아 몇 번이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지.”
진노를 토하던 아가리는 꾹 닫혀 열리지 않았다. 드래곤의 눈에 어렸던 기염은 어느새 야만인의 눈 속으로 옮겨져 있었다. 카딤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짧디 짧은 수명과 한미한 힘을 가진 이 버러지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동안, ‘지고의 존재’라는 네놈은 대체 무얼 했지? 보물을 수집한 것? 심심풀이 삼아 인간 하나를 용인으로 만든 것? 잠깐 외출했다가 불에 덴 듯 돌아와 도로 둥지에 처박힌 것?”
– …….
“언제부터 드래곤이 골방에 처박혀 시시덕대고 골동품이나 긁어모으는 존재가 된 거지? 언제까지 벌벌 떨면서 저 빌어먹을 가짜 엘가 놈의 눈을 피하고만 있을 거냐? 장렬히 산화하여 산맥을 이룬 동족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더냐? 도대체 살아 숨 쉬는 파멸로 군림하며, 감히 천상의 신에게까지 대항하던 드래곤은 어디 가고, 비대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파충류만 남은 것이더냐?”
– …….
“날갯짓하지 않는 새는 땅에 고꾸라진다. 헤엄치지 않는 물고기는 물살에 떠밀려 사라진다. 둥지를 벗어나지 않는 드래곤은, 영원히 세월의 사토에 파묻혀 잊혀진다. 그러니까 내 말은.”
– …….
“……투쟁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다, 드래곤.”
명징하게 울려 퍼지는, 투신을 대행하는 대전사의 선언.
메아리가 아스라이 잦아들며 정적이 내리깔리고.
드래곤의 낯에 혼돈이 어렸다.
그것은, 차마 한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분노, 격정, 열패, 굴욕, 수치, 참회, 회한, 해소, 용기……. 삼라만상의 감정들이 비늘 덮인 낯짝을 도화지 삼아 뒤죽박죽 추상화를 그렸다. 워낙 그 규모가 크다 보니 표정의 변화보단 어떤 기상의 변화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은 결국 ‘수락’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은 한 가닥 두려움이 마지막 한 걸음을 가로막았다.
카딤은 할 수 없이 드래곤의 등을 떠밀어주기로 했다.
“옛 추억을 되살려 내기 한번 하지 않겠나, 드래곤.”
– ……무슨 내기 말이지.
“10초간, 전력을 다해 내게 숨결을 뿜어보거라. 만일 10초가 지났을 때 내가 살아있다면, 부탁한 대로 멜리사를 제압하는 데 힘을 보태면 된다. 물론 그러지 못하고 내가 죽는다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네놈이 알아서 하고.”
허무하게 죽을 뻔한 도련님을 드래곤을 물리친 영웅으로 만들어줬던 전설의 재현.
레밀리온은 한순간 그때 그, 구세주처럼 등장한 야만인을 올려다보던 도련님의 심정으로 되돌아가 입을 쩍 벌렸다. 드래곤의 표정에도 언뜻 유희에 굶주렸던 그 시절의 잔영이 어렸다.
– 보물을 하나 고르게 해주는 조건도…… 그때와 같이 말인가?
“그렇다. 하지만, 굳이 새로운 걸 고를 필요는 없겠지.”
카딤은 보물 무더기의 꼭대기, 눈에 익은 새카만 쇳덩이를 턱짓했다.
“저 방패, 보물은 그때와 똑같이 저 방패로 고르겠다.”
– ……!
““……!!””
야만인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딤이 고른 보물의 이름은 ‘서리 어머니의 포옹’. 장착 캐릭터의 레벨이 낮을수록 강력한 열기 저항을 부여하는 괴이한 효과를 가진 에픽 등급 방패였다.
게임에선 함정 아이템 취급받는 장비지만 딱 한 군데, 드래곤과 내기를 하는 퀘스트에서만큼은 절륜한 성능을 발휘했다. 파멸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드래곤의 숨결을 극초반에도 거의 완벽히 막게 해줬으니까. 그 실효성은 풋내기였던 1회차 초반부의 카딤이 드래곤의 숨결을 버티고 생존함으로써 현실에서도 입증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와 같은 성능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카딤이 전보다 월등히 강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드래곤의 숨결을 두 차례나 막아낸 후 방패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까맣게 녹아내리고 뒤틀려 방패라기보단 고철에 가까워진 이 흉물로 또다시 드래곤의 숨결을 막는 건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 카딤 님……? 정말로 그런 내기를 하실 거라면…… 저것보단 다른 보물을 택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허어…… 그러는 편이 좋겠군. 그땐, 그땐 확실히 저 방패가 인상적인 성능을 보여줬네만…… 지금은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네…….”
– ……내기란 양측이 모두 승리할 확률이 있을 때만 성립하는 것이다. 다른 보물을 고르거라, 필멸자.
일행이 대경실색하여 만류했음에도, 심지어 드래곤마저도 재고하길 권했음에도, 카딤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칠흑의 도끼를 짊어지고 굳건히 보물 무더기에 올랐다.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녹아내린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귀기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담대히 읊조렸다.
“숨결을 뱉어라, 드래곤. 네놈의 영혼에 응축된 울분만큼 뜨겁게.”
– …….
300년 전과 다름없이, 견고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눈길을 마주 보길 잠시.
드래곤은 결단을 내리고 훅, 숨을 들이켰다.
서늘한 공기, 팽창하는 흉부, 단전에서 치밀어오르는 치명적인 인화지물, 그것이 증발하여 형성된 매캐한 기체, 그 기체와 뒤섞여 기도를 따라 흘러나오는 날숨, 날숨을 점화하며 화력을 돋우는 권능, 잇새 안에서 부풀고, 부풀고, 부풀어오르는 찬연한 황금빛 구체.
마침내, 화력을 양껏 끌어모은 입아귀가 쩍 벌려진 순간.
―――――――― 콰과과과과과과과과 – !!!
대양마저 불사르는 숨결이 눈부신 폭발을 일으키며 카딤에게로 쇄도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