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최후의 드래곤 (5)
엉망진창 녹아내린 보물이 어질러진 드래곤의 둥지.
“하하하, 그것참……. 참으로, 참으로…… 걸물이지 않던가?”
아직도 여운을 털어내지 못한 얼굴로 레밀리온이 말했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위층으로 돌아간 뒤. 자리에 남은 건 오직 그와 드래곤, 라퓨스트란뿐이었다.
이번에도, 카딤은 드래곤과의 내기에서 승리했다.
다 망가진 방패로 10초나 숨결을 막아 낸 건 아니었다. 숨결이 닿기 직전, 카딤은 있는 힘껏 방패를 집어던졌다. 맹렬한 풍압에 설핏 불꽃이 갈라지자, 그 틈새로 미끄러져 내려와 드래곤에게로 돌격했다. 그러곤 아탈라의 심판으로 아래턱을 강타해 발산되는 숨결을 도중에 틀어막았다.
그 어떤 강심장도 차마 흉내 내지 못할, 초인적인 묘기이긴 했다. 문제는 내기의 내용이 10초간 숨결을 막아 내는 것이었단 점.
라퓨스트란이 격노하여 그에 대해 지적하자, 카딤은 이렇게 답했다.
‘10초가 지났군.’
– ……뭐?
‘10초간 숨결을 뿜으라고만 했지, 전처럼 가만히 막고 있겠다곤 한 적 없다. 10초가 지났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내기는 내가 이긴 듯하군.’
– …….
되짚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쭙잖은 수작질에 넘어갔단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라퓨스트란은 순순이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말이 좋아 숨결을 피한 거지, 카딤은 1천 도에 가까운 잔열을 고스란히 다 뒤집어썼다. 살가죽이 죄다 짓무르고 벗겨진 와중에 덤덤히 제가 이겼다고 말하는 꼴을 보자니, 도무지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 내기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도 않았고.
자신이, 용기 내어 한 걸음 나아갈 구실을 만들어주는 것.
“하하, 물론 300년 전에도 대단한 자였다만, 이젠 정말 차원이 다른 인물이 된 것 같아. 나도 자네 앞에 서면 가끔씩 떨리는데, 어떻게 그리 대범할 수 있는지 참……. 아마 저자는 천상의 신들과 맞서게 되어도 눈 하나 깜빡 않고 덤벼들지 않을까 싶군, 하하하…….”
연신 카딤의 배포를 칭송하며 호탕하게 웃는 레밀리온. 그동안 라퓨스트란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뒤늦게 분위기를 읽은 레밀리온이 아까 얻어맞은 턱은 괜찮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드래곤이 신경 쓰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숨결에 녹아내린 보물들을 흘기며 말했다.
– ……혹시 기억하느냐, 레밀리온.
“음? 무얼 말이지?”
– 본룡이 둥지에 수많은 보물들을 모아둔 이유 말이다. 이전에 한번 지나가듯 말해 준 것 같다만.
레밀리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시야는 인간과 다르다. 그들의 눈은 ‘가치’와 ‘위험’을 간파하여 본다. 고결하고 가치 있는 존재는 황금빛, 불길하고 위험한 존재는 붉은빛으로 보이는 식으로. 그중 황금빛은 드래곤에게 본능적인 충족감을 주기에 저렇게 많은 보물을 모아둔 거라고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 그때 말하지 못한 게 있다면…… 본룡이 바로 저것들로 사라진 ‘동족’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단 것이다.
“……!”
– 고귀한 성품과 강맹한 용력을 갖춘 본룡의 동족들은……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찬란한 빛을 발했지. 그 빛무리 사이에 있노라면, 어떤 깊숙한 영혼의 공허함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천벌의 밤’ 이후론 다신 그 빛을 볼 수 없게 됐다. 동족들이 남긴 보물을 쓸어모아 간신히 그 빛을 대신해 봤으나, 천착된 공허함은 충족되질 않더군…….
거친 목청소리에 아릿한 여운이 깃들었다. 레밀리온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그, 험험…… 미안하게 됐네. 자네의 보물에 그런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내, 소싯적에 보물을 훔치려고 했던 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
– 아니, 이젠 상관없다. 저 보물들보다 네놈의 빛이 한결 더 나으니까.
“……음?”
– 네놈이 다시 본룡을 찾아왔을 때,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땐 돌멩이만도 못한 애송이였는데, 재회했을 땐 본룡의 동족에 버금가는 광채를 발하고 있더군. 그런 놈이 죽는 꼴을 볼 순 없어서 곁에 두고 피까지 나눠줬던 거고…….
드래곤의 피를 장기간 복용하면, 인간은 용인(龍人)이 된다. 용인은 드래곤의 권능을 일부나마 다루고, 신체 또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건해진다.
다만 면역력이 강해지고 노화의 영향을 덜 받을 뿐, 절대적인 수명 자체가 극적으로 늘어나는 건 아니었다. 레밀리온이 여태껏 살아남은 건 순전히 ‘다크 엘프들의 피’ 덕분이었다.
레밀리온도 잘 알고 있었다. 150년 전, 이 드래곤이 천벌의 위험까지 감수하고 다크 엘프들을 도와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죽어 가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걸.
라퓨스트란은 극구 부인했으나, 다크 엘프들과 그런 식의 물밑 협상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선 생면부지의 자신을 위해 다크 엘프들이 자진해서 피를 나눠줄 리가 없었으니. 그들의 피 역시 엘프의 것과 같은 효능이 있어, 임종을 앞두고 있던 용인은 오늘날까지 수명을 연장하게 됐다.
어째서 드래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특별 취급해준 건지 오랫동안 의문이었는데…… 방금, 그 해묵은 의문이 해소됐다. 그는, 동맹을 건립한 영웅은, 최후의 드래곤 곁에 남은 최후의 광채였다.
레밀리온은 일견 먹먹한 눈빛으로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이보게나, 라퓨스트란.”
– 왜 그러지.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함께 ‘산맥’에나 가보도록 하지.”
– ……무슨 소리냐.
“왜, 자네도 오랫동안 그곳에 못 가봤을 것 아닌가. 간만에 바깥바람도 쐬고, 고결하고 위대했던 자네의 동족들을 추모할 겸 해서 말일세.”
– ……됐다. 괜한 소리를 했군. 필멸자에게 알량한 동정을 받을 만큼 본룡의 심지가 나약하진 않다.
“하하, 사양할 필요 없네. 그 잊힌 신의 사제에게 미리 암막을 좀 빌려달라고 말해놓겠네. 내친김에 뭐, 나도 간만에 동맹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순회도 좀 해보고…….”
거듭 거절의 의사를 밝히면서도, 라퓨트스란은 내심 그 제안이 썩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흐리터분했던 눈동자에 잔불 같은 기대감이 일렁이는 걸 보니. 기구한 운명으로 친우가 된 인간과 드래곤은, 그렇게 인간의 주도와 드래곤의 묵시적 허락하에 첫 동반 여행의 얼개를 짰다.
그러던 중, 레밀리온은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어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말일세, 혹시 자네의 눈에 그자, 카딤 공은 어떻게 보였나? 틀림없이 나보다도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을 것 같은데?”
– …….
라퓨스트란은 지그시 순막으로 눈을 덮었다.
선뜻 답하긴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야, 그자는 제대로 살피는 게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대충 겉만 훑어보면 그럭저럭 마주할 만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려면, 일부러 시력을 낮추고 초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수천 년을 사는 동안 그렇게 괴이한 광채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라진 동족들이나 지옥에서 되돌아온 대마법사, 지상에 강림한 엘프들의 신, 심지어 천벌을 내리는 가짜 엘가를 보았을 때조차도.
동공의 어둠을 몰아낼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 그리고 각막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강렬한 붉은빛.
그 안에는 초월적인 ‘가치’와 ‘위험’이 공존하고 있었다.
– …….
최후의 드래곤은 착잡한 침묵을 머금고 그 정체불명의 인간이 있을 윗방향을 흘겼다.
*
“……너무 무모한 짓이셨어요.”
한탄처럼 내리깔리는 미성.
어둑한 방에는 ‘히드라의 문신’이 밝힌 적광만이 만연했다. 카딤은 잠자코 화상이 재생되며 밀려 나온 거스러미나 떼어냈다. 일레니아가 걱정스런 어조로 다시금 말했다.
“조금이라도 드래곤의 숨결을 피하는 게 늦었다면, 손 쓸 수 없이 크게 다치셨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이렇게 부상을 다 치유하셨다 해도 마모된 정신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을 테고요. 카딤 님께선 좀 더 자신의 귀체를 아끼실 필요가…….”
“너는 잊힌 신을 믿나.”
“예?”
“잊힌 신이 하는 말을 믿냐고.”
“……예, 티끌만 한 의심도 없이 믿고 있습니다. 근데 그런 말씀은 왜 갑자기…….”
“그렇다면 뭐가 걱정이지. 그 신은 내가 악마들과 가짜 엘가를 멸할 거라 하지 않았나. 그럼 그전까지 죽을 일은 없단 거겠지.”
“…….”
정작 카딤은 그 계시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만, 일레니아로선 반박이 불가능한 말이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푸후, 길게 한숨을 내뱉는 일레니아. 결국 염려하는 말들은 다 집어삼키고, 카딤 님 덕에 드래곤을 설득할 수 있었다며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카딤은 설레설레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사과한다는 걸 잊었군.”
“……예?”
“네 말이 옳았다. 그렇게 준비 없이 멜리사를 만나선 안 됐어. 진상을 먼저 파악한 다음 철저히 대비하고 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무작정 찾아간 건 확실히 내 실책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구하러 와준 것 역시, 감사를 표하지.”
“…….”
황옥처럼 노란 눈빛에 오묘한 이채가 섞여들었다.
그건, 던컨이 처음으로 제 가치를 인정받았을 때와 비슷한 빛이었다. 고생으로 얼룩진 지난날을 지워버리는 감격의 빛깔.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입꼬리가 절로 꿈틀대며 황홀감에 젖은 곡선을 그렸다. 귓전에는 아까 둥지에서 들었던 전사의 말이 연신 메아리처럼 울렸다.
‘저 여인은, 네놈처럼 ‘천벌’을 받았는데도 태양을 두려워 않고 나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인정받은 걸 마음 놓고 기뻐하긴 일렀다. 이대로 온전히 신뢰를 사기 위해선 큰 산을 하나 더 넘어야만 했다.
장고 끝에 결단을 내리고 말하는 일레니아.
“원치 않으신다면, 폐기하겠습니다.”
“……무얼 말이지?”
“제가 이전에 보여드렸던 ‘하사품’, 만일 카딤 님께서 사용을 원치 않으신다면 즉각 폐기하겠습니다. 교단을 이끄시는 분께서 주신 중대한 하사품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역시, 계시의 전사인 카딤 님의 의사겠지요.”
“…….”
카딤은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일레니아의 입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래, 사실 사용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 저런 게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카딤에겐 비분강개할 일이었을 테니.
다만, 그새 감정의 앙금을 한 움큼 덜어낸 카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시지요.”
“그건,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거지? 그것도 예전에 갈렌타나에서 보았던 그 ‘분신’과 비슷한 건가.”
“예,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단 훨씬 더 진화된 형태라 해야겠지요. 이 하사품은 겉모습뿐 아니라 대상의 능력까지도 비슷하게 재현하니까요.”
“……그럼 그냥 그걸 수십 개쯤 만들어서 멜리사를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
“아뇨……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 하사품을 빚으려면 막대한 성력을 들여 ‘대성법’을 시전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잊힌 신께선 추종자들에게 넉넉히 성력을 베풀 만한 여건이 되지 않으십니다. 또 시전자의 ‘기억’에서 대상을 추출해야 한다는 강력한 제약도 붙어있어서…….”
그 순간, 카딤의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어렴풋이 널브러져 있던 단서들이 조립됐다. 묘연했던 옛 동료의 발자국이 장막에 숨은 배후의 윤곽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걸 만드는 게 가능한 자는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라보던 빛이 거짓된 광명임을 깨닫고, 빛을 등진 사제.
“고든이, 잊힌 신 교단에 있나.”
“…….”
일레니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을 하고, 손으로 얼굴을 뒤덮어 성호와 같은 몸짓을 하고,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뿐.
카딤은 그 어둠보다도 어둑한 눈동자로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눈을 뜨자 보이는, 울퉁불퉁한 동굴 천장.
그리고 둥글게 주위를 둘러싼 다크 엘프들의 면면.
“기이한 일이군…….”
“허어, 그러게 말일세. 참으로 기이하군…….”
“흐음, 진실로 기이한 일이야, 진실로…….”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던컨은 눈꺼풀만 끔벅거렸다. 간신히 자신이 드래곤을 만나러 갔다 까무러쳤다는 걸 떠올렸다.
“저…… 선생님들? 여, 여기가 어딥디까? 드래곤은 어디에…….”
“허어, 우리와 같은 말도 하는군…….”
“기이해, 기이해…….”
“태초의 어둠께 맹세코, 진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네…….”
“…….”
아무리 물어봐도 기이하다며 탄복만 할 뿐, 다크 엘프들은 도통 질문에 답해주질 않았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누워있길 잠시. 결국 던컨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을 찾아보려고 했다.
다크 엘프 하나가 그를 도로 눕히며 물었다.
“이보게나, 자네도 혹시…… 우리와 같이 어둠을 섬기는 형제인가?”
“……예?”
“왜, 그 대수림 밖에서 온 노란 눈을 가진 인간 자매처럼 말일세. 자네도 그녀와 같은 분파에서 온 겐가?”
“예에? 아, 아닙니다. 전 그냥 평범한 행상인입디다만…….”
“그럼 이 망토와 칼은 무엇이지? 이것들은 분명 잊힌 신의 축복이 깃든 성유물로 보이네만.”
“아, 아, 그건…….”
던컨은 밤그림자 망토와 보이지 않는 칼을 얻게 된 사연을 떠듬떠듬 설명했다.
그 후로는 방금 전까지 일어나던 일의 반복이었다.
“허어, 기이하군……. 정말, 정말 기이하군…….”
“그분께서 성유물을 불신자에게로 인도하시다니…….”
“게다가 그분을 모시는 종복도 아니거늘, 어찌 이리 기척이 없을 수가…….”
“기이하군, 기이해……. 대체 이 깊은 암흑의 끝에는 어떤 놀라운 진실이 감추어져 있는지…….”
……아니, 어쩐지 갈수록 분위기가 더 고조되는 것 같았다.
그냥 무시하고 떠나기는 어려운 상황. 던컨은 필사적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옆자리 침대에서 흑표범으로 변신할 줄 아는 엘프 소년을 발견하긴 했다만, 불운하게도 기절해있어서 도움을 청하긴 무리였다.
다행히도 곧 입구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검은 사제복을 걸친, 초췌하지만 강파른 인상의 다크 엘프 소녀.
“여러분,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리, 릴리아 님!”
“릴리아 사도님! 여긴 무슨 일로…….”
방 안의 모든 자들이 그녀를 주목하며 반색했다. 마침내 도움을 청할 자를 찾아낸 던컨 역시도. 갑자기 저 여인의 어마어마한 정체들이 떠올라 입이 얼어붙었지만…….
그 망설임을 틈타 한 다크 엘프가 선수를 쳤다.
“릴리아 사도님? 그, 잠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예, 무슨 일이시죠?”
다크 엘프와 릴리아는 한쪽 구석으로 가 은밀히 밀담을 나누었다. 때때로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심상찮은 눈으로 던컨 쪽을 흘기면서.
그렇게 한 차례 대화를 마친 후, 릴리아는 던컨에게 다가오더니 다른 자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음, 이건…… 확실히 기이하네요. 유폐처에 함께 계셨던 동안은 잘 몰랐는데…….”
“예, 정말로 기이합니다, 사도님.”
“맞습니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도님.”
“…….”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해탈한 표정을 짓는 던컨.
릴리아는 면밀히 그 모습을 훑다가, 별안간 앙상한 제 손을 내밀었다.
“행상인 님, 잠깐 제게 손을 좀 줘보시겠어요?’
“예……? 손은 왜 갑자기…….”
“잠깐, 잠깐이면 돼요. 예…… 됐어요. 이제 그 손을 저쪽 벽에다 펼쳐 보시겠어요?”
“…….”
참으로 뚱딴지같은 지시였다만…… 던컨은 이미 마음을 놓은 상태였다. 순순히 그 말을 따라 릴리아가 쥐었던 손을 벽에다 펼쳤다.
그러자 벽면에 구멍이 뚫렸다.
우웅 –
“……어?”
새카맣게 일렁거리는 구멍.
일레니아가 세계수에서 펼쳤던, 공간을 왜곡하는 구멍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다. 다크 엘프들이 일제히 경탄을 터뜨리고, 릴리아가 슬며시 입매를 짚었다. 던컨은 헛숨을 삼키고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저, 저거…… 제가 만든 겁니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