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9)
19화. 악마 남작 (5)
가까스로 혼미한 넋을 추슬렀다.
– …….
악마는 부득, 이를 악물었다. 고작 인간 앞에서 공포에 질려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굴욕감과 분노가 들불처럼 타올랐다.
지금까지 악마가 빙의에 실패했던 건 자신보다 강대한 고위 악마에게 시도했을 때뿐이었다. 때문에 저 모습이 고위 악마의 의태인 줄 알고 지레 겁먹고 말았다.
하지만 낱낱이 살펴보니 아니었다. 뒤늦게 예리한 직감이 일러바쳤다. 저 야만인은 보이는 게 다라고. 고작 덩치 큰 인간에 불과하다고. 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다만 왜 빙의에 실패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설렁설렁 상대하기엔 너무나 꺼림칙한 상대. 악마는 온 힘을 다해 훼방꾼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념을 그러모아 전신의 근육과 신경을 폭주시키는 악마.
쿠드득, 빠각, 빠각 –
보랏빛 멍울이 들더니 근육들이 순식간에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에 맞춰 골격이 재정립되며 뒤틀린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닫히지 않게 벌어진 아가리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아들렌 자작의 몸뚱이는 조금 풍채 좋은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젠 인간이라 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 크릃, 굳이 육신을 훔칠 필요도 없지……. 그냥 바로 죽여버리면…… 되는 거니까…….
“…….”
– ……곤죽처럼 짓이겨 주마.
비대한 팔뚝이 큼직한 철퇴를 들어 올렸다. 카딤은 낮게 숨을 고르며 악마의 동작을 살폈다.
부 – 웅!
파공음이 위협적으로 허공을 갈랐다. 드넓은 철퇴의 공격 범위는 천막 안을 거의 다 포괄하고 있었다. 피할 공간이 마땅찮으니 일단 막는 수밖에 없었다.
――――― 채앵!!
귓전을 때리는 금속성.
카딤은 멀찍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감전된 것처럼 뼈가 저릿했다. 앞으로 받쳐 막은 도끼는 단번에 머리가 쩍쩍 갈라지고 말았다.
부 – 웅!
저돌적으로 나아와 다시금 철퇴를 휘두르는 악마. 사선으로 내리치는 공격인 덕에 이번엔 피할 구석이 보였다. 카딤은 잽싸게 몸을 낮추고 반대편으로 발을 뺐다. 철퇴는 아슬아슬하게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악마는 이를 악물고 꿈틀, 눈썹을 떨었다. 팽창한 근육과 뼈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일말의 지연도 없이 또 한 번 철퇴가 위로 올라갔다. 철퇴머리가 천막의 들보에 걸린 것도 무시하고 일격필살의 기세로 내리찍었다.
―――――― 콰 – 앙!!
대지를 강타하는 충격. 기둥이 박살 나고 천막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몸을 뒤덮은 천막 가죽을 떨쳐버리며 악마는 흉흉한 안광을 빛냈다.
– 물러가란 내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한다는 게 고작 꼬리 말고 내빼는 것뿐이더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무맥한 황야의 들개야!
카딤은 대답 없이 악마를 흘겼다.
제대로 제어하진 못했어도 무려 사백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지배한 악마다. 아무리 등급을 낮게 잡아도 중급 이상일 터. 악마의 피도 없이 저만한 악마를 정면으로 상대한다는 건 설령 카딤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딤은 달아나지 않았다. 그저 성 쪽을 곁눈질로 한번 살폈을 뿐. 이후 망가진 도끼를 버리고 새로운 도끼를 쳐들며 다시 맞설 준비를 갖췄다.
악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 하, 무얼 덤비는 척하는 거냐? 그러다 다시 내빼려고? 이젠 그럴 수 없을 거다, 비굴한 녀석.
악마의 손바닥이 바닥을 향했다. 안개처럼 마기가 흐르고 쓰러져 있던 병사들이 기괴하게 육신을 비틀며 일어났다. 망령된 괴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커어어, 커허어어어!!”
“커어어어억!”
병사들은 일어나기 무섭게 카딤을 포위하고 병장기를 휘둘렀다.
챙 – !
카딤은 도끼와 칼을 교차하여 날아드는 창날을 막았다. 도끼날로 창대를 올려쳐 방어가 빈 사이, 깊숙이 검신을 휘둘러 병사의 메마른 복부를 갈라버렸다.
쩌 – 걱!
“크에엑!”
부웅, 피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창날이 날아들었다. 귓가를 스쳐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동요 없이 그대로 몸을 낮게 숙이고 도끼로 무릎을 후려치는 카딤. 관절이 거꾸로 꺾이며 으스러지자 병사는 부러진 장작개비처럼 허물어졌다.
카딤은 일단 포위를 뚫고 나아가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부 – 웅!
– 어디에 한눈을 파는 게냐, 들개야! 네 진짜 상대는 여기 있거늘!
기껏 퇴로를 뚫어놓은 방향에서 잔뜩 덩어리진 악마가 등장했다. 카딤은 하릴없이 성난 철퇴를 피해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렇게 숨 막히는 분전이 이어졌다.
챙, 챙, 쩌 – 걱! 퍼 – 걱!
“커어어어억!”
“크어어어어어억!”
“…….”
아무리 병사들을 처죽여도 퇴로는 뚫리지 않았다. 차근차근 처치하면 악마는 쓰러져 있던 다른 병사를 일으켰다. 무기를 크게 휘둘러 일거에 와해시키면 어김없이 악마가 그쪽에 서서 앞길을 가로막았다.
비단 악마뿐 아니라 악마가 소수 정예로 휘두르는 병력 또한 결코 얕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벌써 수십 명이나 쓰러뜨렸는데도 악마가 부릴 수 있는 병사는 아직도 삼백 명이 넘게 남아 있었다.
조금씩, 피로가 누적되며 근육이 굼떠지고.
“후우, 후우…….”
조금씩, 카딤에게 부상이 늘어갔다.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열상, 팔다리에 무수한 자상, 핏줄기가 질질 흐르는 귓가. 연기가 피어오르며 조금씩 치유되곤 있으나 너무 느렸다. 흡혈로 치유되는 것보다 부상을 입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후욱, 후욱, 후욱…….”
포위망은 점점 더 좁아졌다. 카딤은 어느덧 진지의 맨 구석에 다다랐다. 악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야만인을 마음껏 비웃었다.
– 크하하하하하!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구나! 남의 잔칫상 위에 올라와서 기세등등하게 뻗대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개새끼처럼 낑낑대는 꼴이라니!
“…….”
– 그러니까 분수를 알았어야지, 들개야. 이것이 격의 차이다. 네놈같이 가진 게 몸뚱이뿐인 인간은 결코 악마에게 맞설 수 없다. 나를 죽이려면 그 빌어먹을 엘가의 사냥개들이라도 데려왔어야지. 크흐흐흐…….
야만인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달이 지평선을 향해 저물고 있었다. 이런 오밤중까지 초승달을 볼 수 있다니. 새삼 현실과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게 실감 났다.
감상에 젖기엔 부적절한 때였다. 이만하면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성문 쪽을 다시 흘끗 내다보았다. 마침내 열심히 내달려오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카딤은 숨을 깊게 몰아쉬고 나직하게 말했다.
“후우, 그래……. 확실히 지금 내 힘으론 그 육신을 상대할 수 없는 것 같군.”
– 크하, 그래! 이제서야 그걸 깨닫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하지만, 네 본체라면 어떨까.”
– ……뭐?
“그건, 고블린 한 마리 못 죽이는 행상인이라도 처치할 수 있지 않을까.”
난데없는 얘기에 우뚝 멈춰 섰던 것도 잠시.
악마는 기겁하여 몰덴 성을 바라보았다.
– 네, 네놈, 설마…….
다급하게 손바닥을 성 쪽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사념을 담은 마기는 땅을 향해 흘러내릴 뿐, 결코 성에 있는 본체를 향해 흘러가지 않았다.
악마의 돌출된 안면 근육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야만인은 한쪽 입가를 길게 끌어올렸다.
카딤은 게임에서도, 1회차 때도 빙의종 악마를 상대해 보았다. 그 덕에 빙의종 악마를 상대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념의 발로이자 사령탑인 ‘본체’가 어디 있느냐.
빙의종 악마가 빙의한 육신을 처치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악마의 입장에선 사념만 다른 육신으로 옮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눈앞의 육신만을 처치하고 방심하다 또 다른 육신을 차지한 악마에게 의식을 빼앗기고 만다.
카딤은 처음 병사들을 봤을 때부터 악마의 정체를 어렴풋이 직감했다. ‘본체’의 위치는 어디에 있을지 골몰하던 와중에 뜻밖에도 몰덴 남작이 대놓고 단서를 주었다.
‘그럴 순 없소.’
‘…….’
‘지하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소이다.’
하지만 바로 성의 지하로 내려가 ‘본체’를 처치할 순 없었다.
악마는 필시 생존을 위해 본체에 일말의 사념을 남겨놓았을 터. 접근을 눈치챈 악마가 ‘본체’를 숨기거나 달아나면 기껏 위치를 알아낸 것도 허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카딤은 악마가 모든 사념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떠나기 전, 행상인에게 ‘본체’의 처치를 부탁하고.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내성의 지하가 나온다더군. 나는 악마의 정신을 빼앗고 있겠다. 너는 초승달이 절반쯤 기울면 내려가서 괴이하게 생긴 살덩이를 찾아 찢어발겨라.’
‘하, 하지만 나으리, 출입문이 이렇게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는뎁쇼?’
콰 – 강!! 철그렁 –
‘이젠 아냐.’
‘…….’
행상인은 그가 내린 지시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덕분에 ‘본체’를 잃은 악마는 사념을 제어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저 몸뚱이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 크릃, 크아아아아아아!!
괴물이 된 자작의 몸뚱이는 어떻게 처치할 것이냐.
‘본체’를 잃는다 해서 이미 빙의한 사념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즉, 저 육신을 쓰러뜨려야만 악마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
격노한 악마는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철퇴를 들어 올렸다.
– 크릃, 감히 내 본체를……. 네놈…… 네놈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하겠다……. 팔다리의 근육을 하나하나 터뜨려 주고, 내장을 뜯어내 주둥이에 쑤셔 박아 주마…….
카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본체를 죽이고 남은 육신을 처리할 해결책까지 이미 다 준비해 놓았다.
악마는 야만인이 수세에 몰려 진지의 구석까지 왔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아니었다. 카딤은 교묘하게 병사들을 처치하여 일부러 이쪽으로 나아온 것이었다.
“나, 나으리, 여기 가져왔습니다! 받으십시오!”
해결책을 가져온 행상인과 최대한 빨리 접촉하기 위해.
휙, 휙, 휙!
행상인이 던진 투척물이 빙빙 회전하며 목책 위로 날아왔다.
던지는 힘이 한없이 미약했는데도 불구, 기이하게도 그것은 드높은 포물선을 그렸다. 회전 속도 또한 오히려 행상인에게서 멀어질수록 더욱 빠르게 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책 너머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회전이 둔화되며 카딤의 손안에 안착했다.
턱!
마치 주인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듯 휘감기는 손잡이. 달뜬 눈길이 투척물의 형상을 재빠르게 훑었다.
몰아치는 눈보라 같은 한철(寒鐵)의 파형 무늬. 바라만 봐도 베일 듯 날카로운 도끼날. 짙은 묵빛으로 칠해진 자루. 적당한 무게감과 피어오르는 기묘한 예기(銳氣)까지.
드워프 장인의 피땀이 어린 고대의 보물, 드워프제 투척도끼.
대강 훑어 봐도 엄청난 정성이 들어간 무기였다. 야만인은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냥 악마만 감춰둘 것이지, 이런 걸작까지 같이 썩혀 두다니. 남작도 정말 어지간하군.”
악마도 야만인의 손에 들린 게 어떤 무기인지 알아차렸다. 부르르 어깨를 떨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 그, 그건…… 정신 나간 북부의 난쟁이들이 만든……. 그런 물건이 어떻게 여기에…….
악마의 말을 계속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카딤은 손바닥 마디로 짓누르며 견고하게 도낏자루를 휘어잡았다. 어떤 각도로 잡아도 무게감이 적절한 덕에 마치 무기가 스스로 균형을 조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체를 비틀어 최대한으로 힘을 축적하고 근육을 폭발적으로 가속하여 투척했다.
어둠을 가르며 쾌속으로 선회하는 섬광.
패래래래랙 – !
악마는 형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파멸의 원반은 찰나의 시간을 가로질러 악마의 머리통에 직격했다.
퍼거걱 – !
선뜩한 날이 돌출된 낯짝과 골통을 갈기갈기 찢었다. 진득한 핏방울과 물컹한 뇌수, 산산조각 난 두개골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흩뿌려졌다.
휙, 휙, 휙, 휙!
도끼는 그러고도 힘이 다하지 않아 한참을 더 날아갔다. 아마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답게 투척력을 강화하는 특수효과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 끄럻……. 꺼어…….
아래턱뼈 위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악마는 이미 재기불능의 상태였다. 핏물이 고인 목구멍으로 들끓는 소리를 내고는 풀썩 쓰러져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목책 뒤에서 조마조마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던컨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다, 다 처치하신 겁니까요, 나으리? 이제 완전히 악마는 죽은 겁니까?”
“…….”
카딤은 대답하는 대신 신속히 도끼를 회수하러 나섰다.
아직 처치해야 할 대상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후욱!
돌연 옆구리를 향해 찔러드는 일격.
카딤은 발길을 비틀어 가까스로 칼날을 피했다. 콧수염을 기르고 누비 갑옷을 걸친 중년인이 적의에 물든 시선을 보냈다.
– 크흐흐흐, 염치없는 들개인 줄 알았더니 아주 간교한 여우 새끼였군……. 그래,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척 뒤통수를 치는 것이 야만인들의 새로운 싸움 방식이더냐?
카딤은 묵묵히 악마에 빙의된 남작을 쏘아보았다.
‘……역시나 이미 몰덴 남작에게도 사념을 심어 두었군.’
예상대로의 일이었다.
악마가 보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터였다. 자신을 희생하여 몰덴을 구하려 했으나 결국 몰덴은 파괴되고 홀로 살아남아 절규하는 남작의 모습. 그걸 보기 위해선 일단 남작이 죽을 수 없게 육신의 제어권부터 손에 쥐고 있어야 했겠지.
빙의된 남작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념은 아들렌 자작의 육신과 함께 소멸했다. 지금 남작의 무력은 카딤이 수십 명이나 처죽인 병사들과 별반 다르지도 않을 터.
카딤은 칼을 치켜들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고 손수 처치하려고 남작을 데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난 일은 카딤으로서도 결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 크하흐흐흐, 허어, 어, 어어……?
남작이 칼을 자신 쪽으로 겨누고 힘껏 찔렀다.
푹!
갑옷을 꿰뚫고 복부까지 완전히 관통한 칼날이 등짝에서 가시처럼 솟아났다.
핏발 선 눈을 하고 읊조리는 남작.
“악마여, 너는 몰덴에……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 ……크허어어, 크헉, 크허……. 어, 어떻게 빙의를 풀 수가…….
“……너는 여기서, 나와 함께 죽을 것이다.”
살갗을 찢으며 칼자루가 세차게 비틀렸다.
몰덴의 영주는 악마를 스스로의 힘으로 몰아내곤 무너지는 탑처럼 쓰러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