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세상을 사르는 겁화 (8)
드래곤의 맹격이 대마법사를 무참히 찢어발겼다.
―――――― 콰과과과과과 – !!
“큭…….”
팽팽하게 유지됐던 승부의 저울은 이젠 돌이킬 수 없이 기울어버렸다. 멜리사는 공격 대신 회피와 방어에만 치중하여, 공간을 왜곡하고 불의 장벽을 펼치기 급급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공격에 대처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뒤집어썼다.
물론 여전히 외상은 없었다. 마나로 피해를 막는 ‘마나의 가호’ 덕에. 그렇지만 마법을 난사하며 육신에 큰 부담이 누적됐고, 남은 마나가 소진되는 속도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라퓨스트란은 상대의 변화를 즉각 눈치챘다.
– 발버둥이 아까 같지가 않구나. 그 알량한 마나는 이제 얼마나 남았더냐?
“…….”
남은 마나는 절반 정도. 이 추세라면 정말 오늘이 지나기 전에 온 세상의 모든 마나를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암막을 뚫으려는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은밀히 검은 하늘로 지옥불을 날려보낼 때마다 드래곤은 귀신 같이 알아채고 용언을 외쳐 저지했다. 간간이 조그마한 지옥불은 적중시켰으나, 암막 자체도 튼튼하여 그 정도론 작은 구멍도 뚫리지 않았다.
하지만 멜리사는 패배를 눈앞에 둔 안색이 아니었다.
되레 굉장히 즐겁단 듯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아아, 아아…… 하하학, 하하, 역시, 역시 그렇구나.”
– ……무얼 말이냐?
“너, 너 남들과 보는 눈이 다르지? 열을 보는 건 아니고, 대충 뭐가 얼마나 강하고 위험한지 보는 것 같은데?”
– …….
“근데 파충류니까 열을 보는 편이 좀 더 어울리지 않나? 흐흐, 하하학…….”
――――― 뻐 – 억!
질 낮은 조롱에 되돌아온 응수는 벽력같은 꼬리 치기였다. 세차게 벽면에 부딪히고도 멜리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학, 흐흐…… 아아, 그래서 그랬구나. 어쩐지 기가 막히게 위험한 마법에만 골라 반응하더라. 아아아, 이런 재밌는 발견은 기록해놔야 하는데…… 마탑에 기록을 내버려두고 온 게 또 아쉽네.”
– ……무가치한 잔말이 많구나. 그까짓 걸 알아냈다 해서, 네놈이 본룡에게 씹어 삼켜지는 꼴을 면할 성싶더냐?
“하하하하…… 응, 그럴 것 같아.”
거짓말처럼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공백 어린 낯으로 무표정하게 정색하는 멜리사. 라퓨스트란은 눈초리를 꿈틀 떨었다.
어디선가, 시야를 대거 침식할 정도로 강렬한 붉은빛이 밀려들고 있었다.
“사실 눈치챈 건 한참 전부터 눈치챘어. 그냥, 이젠 말해줘도 상관없겠다 싶어서 말해준 거고.”
– …….
“생각을 좀 해봤거든. 저 암막을 뚫으려면 ‘대마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은신도 안 통하고, 환상도 안 통하고, 왜곡도 안 통하고…… 그러면 어떻게 몰래 준비할까? 어떻게 해야 저걸 뚫을 만한 ‘대마법’을 준비해서, 기고만장한 파충류에게 ‘천벌’이 어떤 느낌인지 다시 알려줄…….”
―――――― 콰과과과과과과 – !!
폭발하는 숨결이 말을 끊었다. 흉악한 발톱이 불의 장벽을 찢고, 거대한 앞발이 각처를 폭풍처럼 휩쓸었다.
라퓨스트란은 직감했다. 무언가, 조만간 치명적인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그걸 막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이 마법사를 죽여야만 했으나, 마법사를 지켜주고 있는 마나는 도통 간단히 없앨 만한 양이 아니었다.
“흐흑, 답은 간단하더라고. 너무 환해서 못 알아볼 수가 없는 ‘불빛’이 있다면…… ‘더 큰 불빛’ 앞에다 숨기면 되는 거잖아?”
– 네놈, 무슨 헛소리를…….
“우리, 과연 그 불빛이 저 암막을 뚫을 수 있을지 한번 확인해볼까?”
멜리사가 부드럽게 손바닥을 내려찍었다.
그 손짓을 따라 하늘이 찢어졌다.
쩌적, 쩌저저적, 쩌저저저저적 – !!
――――― 콰르르르르륵 – !!
흑염으로 타오르는 운석이 암막을 뚫고 창공에 나타났다. 검은 하늘이 풍랑 이는 밤바다처럼 너울거리고, 관통당한 공극으로 눈부신 빛무리가 쏟아졌다.
―――― 쿠우우우우우우…….
드래곤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멜리사가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아, 됐다.”
그건, 흡사 종말이 밤하늘을 가르고 나타난 듯한 자태였다.
실제로 드래곤에게 있어선 종말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가장 깊은 심연의 지옥불을 두른 운석 자체도 위협적이지만, 그보다 더 큰 위협은 그 너머에 있는 것. 이 땅에서 드래곤들의 씨를 말려버린 최악의 천적.
‘굽어살피는 눈’이 최후의 드래곤을 포착했다.
――――――――― 쩌 – 엉!!
암막 너머로 심판의 빛줄기가 쏘아졌다. 라퓨스트란에겐 그것이 각막을 반으로 가르는 시뻘건 칼날처럼 보였다.
퍼서석, 콰 – 앙!!
‘천벌’이 지옥불을 숱하게 뒤집어쓰고도 멀쩡했던 드래곤의 비늘을 살얼음판처럼 손쉽게 바수어 버렸다.
– 크르르르라라악!! 크르르르르라아아악!!
심장 한가운데 대못을 처박는 듯한 고통, 라퓨스트란이 절규를 내질렀다. 날갯죽지를 바들바들 떨며 다급히 볕이 들지 않는 곳으로 기어갔다.
소용없었다. 태양은 이글거리며 남은 암막을 불태우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예 지붕을 이룰 만한 것에 모조리 천벌을 쏟아부어 온 사방의 그늘을 제거해버렸다.
결과는 150년 전에 벌어졌던 일의 재현이었다.
――――――― 쩌 – 엉, 쩌 – 엉, 쩌 – 엉!!
– 크르르라아아아아악 – !!!
죽음을 다발로 묶은 듯 치명적인 빛줄기들이 쏟아졌다. 비늘이 터져나가고, 갑피가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불에 달군 송곳에 푹푹, 찔린 도마뱀처럼 몸부림치며 발악하는 라퓨스트란.
멜리사는 폭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학, 아하하하하! 하하학, 하학, 아하하하하!”
계획이 완벽히 들어맞았다. 위험한 마법을 준비하면 곧바로 알아차렸던 드래곤은 저 운석만큼은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암막 뒤에서 몰래, 태양에 겹쳐 준비한 마법이니까. 저 드래곤에게 있어 제일 큰 위험은 ‘천벌’을 내리는 태양. 그 앞에선 운석을 떨어뜨리는 ‘대마법’조차도 작은 위험이 되어 눈에 띄지 않을 수밖에.
– 크르르라아악, 크륵, 크라라라아아아악 – !!
라퓨스트란은 피 투성이가 된 육신을 이끌고 비척거렸다. 벼랑 끝으로 기어 급히 둥지로 돌아가려 했다.
비웃음에 분노할 정신도 없었다. 드래곤은 그 오만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떨리는 눈동자 속에 천벌에 꿰여 낙화처럼 추락하는 동족들의 잔영이 어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신의 격노 앞에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걸 또다시 사무치게 통감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달아나기 직전, 드래곤은 멈춰 섰다.
불현듯 저 태양의 천벌을 직면한 자신과, 자신의 숨결을 직면한 어떤 인간의 모습이 겹쳐졌기에.
――――――――― 쩌 – 엉!!
그 하찮은 인간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 인간에겐 드래곤의 힘이나 권능이 없었다. 혈혈단신의 비천한 몸뚱이, 다 녹은 방패 하나만 들고 있음에도 그랬다. 투쟁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라는 제 말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온몸을 불살라 증명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인간보다 월등히 강력한 자신은 대체 어떤 추태를 보이고 있는가?
– …….
“아하학, 아하하하…… 어딜, 어딜 가려고, 드래곤? 간만에 본 햇볕일 텐데 일광욕 좀 더 하고 가지, 왜?”
구우우우웅 –
사방을 둘러싼 왜곡 마법이 퇴로를 차단했다. 라퓨스트란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다.
그러나 상관하지 않았다.
아직 한 곳, 열려있는 방향이 있었으니까.
――――――― 쩌 – 엉!!
맞물린 이빨을 부득, 악물고 꽂히는 빛살을 버텨냈다.
– 본룡은, 이 대륙의 만생 위에 군림하는 살아 숨쉬는 파멸…….
타오르는 숨결을 닮은 황금빛 눈동자를 굳세게 치떴다.
– 비견할 적수가 없는 지고의 존재이자, 신화의 시대로부터 살아남은 불멸의 군주……. 이 땅 위의 모든 강자를 무릎 꿇린 지상 최강의 생물이자, 무정한 사토에 파묻힌 동족들의 원념을 잇는 최후의 복수자…….
시야를 한가득 메우는 붉은빛을 일체의 두려움 없이 마주했다.
– 감히, 비겁하게 천상에 숨어 세상을 관음하는 신 따위가…… 본룡을 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입아귀를 벌리고, 심장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포효를 내질렀다.
– [고 – 작 – 네 – 놈 – 따 – 위 – 가 – !! 온 – 천 – 지 – 만 – 물 – 을 – 위 – 시 – 하 – 는 – !! 본 – 룡 – 의 – 날 – 개 – 를 – 꺾 – 을 – 수 – 있 – 을 – 쏘 – 냐 – !!!]
――――― 콰르르르르릉 – !!!
지상에서 저 천상까지,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진청동지의 용언. 황금 성채처럼 장엄한 날개가 광휘의 편린을 흩뿌리며 펼쳐졌다.
‘천벌의 밤’, 천 마리의 드래곤이 저 태양을 살라버리기 위해 일거에 비상했던 그날처럼.
콰 – 앙!!
최후의 드래곤은, 다시금 찬란한 하늘의 뜻을 거슬러 드높이, 드높이 날아올랐다.
*
시퍼런 발톱이 늑대의 옆구리를 내찢었다.
– 크르르륵, 크훠어어엉 – !!
– 깽, 깨갱!!
앞길을 막은 괴물은 오직 이놈 하나뿐, 흑표범은 내장을 늘어뜨린 늑대 너머로 훌쩍 도약했다. 혹여 등에 탄 여인이 다칠까, 세심하게 착지하는 것도 잊지 않고.
파르네오와 릴리아는 수월히 세계수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세계수로 오는 과정은 순탄했다. 헤실리아드의 거리를 배회하는 괴물들은 흑표범의 속도를 쫓지 못했다. 나름 포위망을 펼쳐봐도, 파르네오는 미꾸라지처럼 활로를 찾아 빠져나갔다.
세계수의 내부에도 괴물들이 몇몇 있긴 했다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내부 통로에도 능통한 파르네오는 거리에서처럼 괴물들을 능란히 따돌리고 해치우며 위로 향했다.
그렇지만 두 엘프의 안색은 썩 밝지 않았다.
쿠구구궁, 쿠구구구구…….
위태롭게 요동치는 통로, 우수수 떨어지는 파편.
“제 자매가…… 계시의 전사님을 따라가지 않았군요.”
– …….
멜리사를 지옥으로 유인하는 카딤의 계획은 실패했다.
카딤이 도중에 사로잡힌 건지, 멜리사가 변덕을 부린 건지…… 그 까닭은 불분명했다. 확실한 건, 이대로 상층부에 이르면 그녀와 대면하게 될 거란 사실.
– 크르륵, 크르르르…….
파르네오가 그르렁거리며 멈춰 섰다. 안전하게 드래곤이 대마법사를 제압한 후 올라가잔 뜻. 그러나 릴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뇨……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파르네오 님. 줄곧 이어진 전투 탓에 세계수의 균형이 극히 불안정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가만 있어도 한 시진…… 아니, 반 시진이면 세계수가 땅으로 추락할 겁니다.”
– 크르으으으…….
“걱정 마십시오. 지금은 드래곤께서 분투해주고 계시고…… ‘세계수의 꿈’에 진입만 하면 그때부턴 제 자매도 저를 어찌하지 못할 테니까요. 염치없지만…… 계속 위로 올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파르네오 님.”
마뜩잖다는 듯 귀를 쭝긋거렸지만, 흑표범은 결국 릴리아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뿌리목의 절벽에 이르렀을 무렵, 그들은 멈춰 설 수밖에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 크르륵, 크훠엉 – !
“저, 저건…….”
검은 하늘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운석, 천공에 뚫린 구멍으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줄기.
――― 쩌 – 엉, 쩌 – 엉!!
– ……라아악, 크륵, 크라라라아…….
‘굽어살피는 눈’이 천벌을 내리고, 고통에 찬 목청소리가 울려 퍼졌다. 150년 전의 악몽을 떠올린 릴리아의 낯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놀랍게도, 드래곤은 그때처럼 쉬이 달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날개를 펼쳐 하늘로 비상했다. 날렵하게 회피 기동을 펼치고, 숨결과 용언을 내뿜었다. 광풍처럼 앞발을 휘두르고, 태양에 가까이, 계속 가까이 날아들었다. 그 기백과 분전에 힘입어 몇 줄기 천벌이 무력하게 스러졌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천벌의 위력은 갈수록 더 강해졌다. 투창처럼 날아들던 빛줄기는 차츰 뺵빽해지다가 나중엔 무자비한 폭우처럼 쏟아졌다. 아무리 드래곤이 필사적으로 맞선다 한들, 저렇게 무한한 집중 포화에 대처하는 건 무리였다.
―――― 쩌저정, 쩌 – 엉!!! 쩌저저정, 쩌저저정 – !!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십여 발, 이십여 발…… 천벌이 무더기로 적중하고, 종국엔 백 발이 넘는 천벌이 드래곤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산산이 부서져 반짝이는 비늘 조각, 찢어진 의장기처럼 너덜거리는 날개, 안개비가 되어 흩뿌려지는 피.
– 크르르르…….
최후의 드래곤은 피투성이가 되어 추락했다.
동족들의 원념을 갚지 못한 채, 머나먼 옛날, 그리고 150년 전과 다름없이, 저 천상의 거짓된 신에서 무참히 유린당하여.
세계수의 위에선 사도의 개탄이, 세계수의 밑에선 용인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드, 드래곤이시여……!!”
“라퓨스트라아아아아안!!!”
―――― 콰 – 앙!!
그나마 세계수의 그늘로 떨어져 마지막엔 태양의 시야를 벗어났다. 하나 안타깝게도, 드래곤의 적은 저 하늘의 태양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 손길을 밑으로 내렸다.
가장 높은 곳의 불꽃에 무참히 꿰뚫린 드래곤에게, 이번엔 가장 낮은 곳의 불꽃이 떨어졌다.
―――― 쿠우우우우웅 – !!
지옥의 가장 깊은 심연에 피어오르는 불, 존재를 소멸시키는 검은 불, ‘그리모스의 불꽃’을 두른 거대한 운석.
“안 돼, 라퓨스트란!! 안 돼, 아, 아악…….”
레밀리온이 다급히 날개를 펼치고 비행했으나, 근처에 닿기도 전에 고꾸라졌다. 기실 그가 드래곤 곁에 이르렀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무리였다.
그들은 가장 약한 지옥불을 흩뿌리는 인페르노마저도 어찌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하물며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심연에서 끌어낸 지옥불에 대처할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끝났다.
드래곤은 저 운석에 내깔려 죽을 것이다. 멜리사가 모두를 발견할 것이다. 파르네오는 죽고 자신은 갇히고 세계수는 추락할 것이다. 꿈을 통해 예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릴리아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사명과 직분마저 잊고, 참혹한 미래를 외면하며 출구 없는 어둠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지되지 못한 미래란, 언제나 예측을 불허하는 변수로 가득한 것이니.
―――― 쿠우우우우우…….
검은 운석은 드래곤을 짓뭉개지 못했다.
드래곤의 등가죽에 닿기 직전, 얼어붙은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섰다.
“…….”
“…….”
“…….”
감히 숨조차 내쉴 수 없는 고요.
그 운석을 멈춰 세운 건, 기적이 아니었다.
기적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었다. 신의 축복이나, 불가해한 신비도 아니었다. 기구한 인연의 실타래가 먼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뒤얽히고 엮이며 자아낸, 누군가의 회한과 잊지 못할 기억과 역사적인 만남의 산물이 바로 그 운석을 멈춰 세운 근원이었다.
릴리아는 떨리는 눈망울로 세계수의 밑을 바라봤다.
“……멜리사?”
영원히 되찾지 못할 줄 알았던, 자신의 옛 자매가 그곳에 서 있었다.
*
드래곤마저 떠난 세계수의 뿌리목.
화르르륵 –
낯선 방문객이 불길을 흩뿌리며 ‘영원한 꿈의 홀’에 찾아왔다.
아니, 실은 그 누구보다 낯설되, 그 누구보다 낯익은 방문객이었다. 고된 여정에 지쳐 성격이 조금 까칠해졌으나, 아직 순수한 정열과 용기와 동료애를 간직했던 소녀.
“이봐요. 그쪽이…… 정말로, 제 미래가 맞아요?”
소녀는 품에 꾹 끌어안고 있었다. 무엇이든 새롭게 알아낸 걸 꼼꼼히 적어 둔 기록을. 이제 자신은 잃어버린, 어느 사내와 우연히 만나 세상을 구하게 된 기묘한 여정을 적어 둔 기록을.
잿더미가 된 여인의 입꼬리에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세계수의 꿈에서……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카딤이.”
“…….”
300년 전과 300년 후.
잃어버린 과거와 어긋난 미래가, 뒤틀린 운명의 좌표축 위에서 교차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