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rserker’s Second Playthrough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0)
20화. 악마 남작 (6)
“…….”
“…….”
쓰러진 남작을 눈앞에 두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카딤이 먼저 걸음을 떼자 낑낑대며 목책을 넘어온 던컨이 따라붙었다.
“주, 죽은 걸까요, 나으리?”
“아직은.”
그 말대로 남작은 아직 희미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부상이 워낙 깊은지라 다시 살아나는 건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터진 누비 갑옷 위로 끝없이 울컥거리며 피가 비어져 나왔다.
카딤은 남작을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힘도 좋군, 남작. 그 두꺼운 갑옷을 단번에 꿰뚫다니.”
남작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치켜올렸다.
“하, 하하……. 악마의 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요…….”
“…….”
“이번에도, 이번에도…… 말이지…….”
카딤은 눈매를 좁혔다. 그러다 돌연 ‘모기’를 꺼내들었다. 던컨은 그가 남작의 목숨을 끊어 버리려는 줄로만 알고 화들짝 몸을 떨었다.
하지만 카딤은 칼을 휘두르는 대신 칼자루를 남작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곤 검신을 자신의 팔뚝에 가져다 대 얕게 베어냈다.
“아, 아니, 나으리! 무슨 짓을…….”
던컨의 우려와는 달리 의미 없는 자해는 아니었다. ‘모기’의 흡혈 효과는 다른 자의 손에 들려 있다 해도 유효했으니까.
검신이 주인의 핏물을 받아들이고 남작의 부상을 치유했다. 깊은 관통상에서 옅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창백했던 남작의 낯빛이 희미하게 혈색을 되찾았다.
“으, 으흠…….”
다만 어디까지나 죽음을 잠깐 유예한 것에 불과했다. 저만한 치명상을 전부 낫게 하려면 적어도 백여 명의 피를 받아들여야 할 터. 한 모금 피를 흡수한 정도로는 택도 없었다.
쓱, 혈흔을 문질러 닦고는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는 카딤.
“범인(凡人)이 악마를 마주하면 생의 모든 고결한 의지는 꺾이고 뼈저린 두려움과 생존에 대한 갈망만이 남기 마련이지.”
“…….”
“그러나 남작, 그대는 짓이겨지고도 손가락을 물어뜯는 벌레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악마의 사념을 몰아내고 공멸했다.”
“…….”
“그러니 자책은 그만두거라. 그런 극기심은 결코 아무나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방금 내가 바친 피는 그대의 강철 같은 의지에 대한 헌사다.”
던컨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그는 지금까지 야만인이 인간을 말하는 고깃덩이 정도로만 생각하는 줄 알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존중하는 모습을 보일 거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남작 또한 얼떨떨하게 두 눈을 끔뻑거렸다. 카딤은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작게나마 경의를 담은 말투로 말했다.
“물론 내 힘으로도 그대를 되살려 줄 순 없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말벗 정돈 해 줄 수 있지. 아직 세상에 남기고 말이 있거든 미련 없이 털어놓고 가거라, 남작.”
“……하, 하하. 이거 영광이오……. 그대같이 대단한 전사가 내 최후의 말벗이라니…….”
쿨럭, 깊은 기침과 함께 핏물이 솟구쳤다. 남작은 역류하는 피를 애써 집어삼키고는 말문을 열었다.
“부질없는 산송장의 넋두리라 생각하고 들어주시오……. 나에 대한…… 아니, 몰덴과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건, 모든 건 내 욕심 때문이었소. 그 악마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과거, 몰덴 남작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선조의 공을 인정받아 작위와 영지를 수여받은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가 다스리게 된 곳은 그토록 바라던 성도 인근의 비옥한 영지가 아닌 척박하고 외진 촌구석 영지, 몰덴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최선을 다했다. 조세 제도를 개편하고, 용병을 불러 도적과 괴물을 물리치고, 땅이 없는 자들에게 저렴하게 땅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리쳐도 침입자들은 줄어들지 않았고 지력이 쇠한 농지에선 매년 흉작만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성의 지하에서 기괴하게 생긴 살덩어리를 발견한 거요…….”
흡사 괴물의 내장처럼 생긴 악마는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으로 그를 유혹했다. 바로 몰덴을 인근에서 가장 뛰어난 영지로 발전시켜 주겠다는 것.
악마의 제안답게 조건이 없는 건 아니었다. 허나 그 조건은 얼핏 들어선 도무지 악마가 요구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악마는…… 모든 백성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최선을 다해 영지에 헌신하라 말했소.”
“…….”
그것이 가장 치명적인 함정이었으나 그때는 몰랐다. 남작은 깊은 고뇌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악마는 약속을 지켰다.
갑자기 도적과 괴물들이 사라지고, 땅이 비옥해지고, 몰덴에 정착하길 원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긍정적인 변화들은 선순환을 일으켜 몰덴은 점점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했다.
남작도 계약 조건을 충실히 이행했다.
처음엔 영지민들이 거북한 티를 내 어색하고 체면이 상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친밀하게 다가가자 영지민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가식적으로 좋은 영주를 연기하던 세월은 길지 않았다. 남작은 어느샌가 영지민들을 진심으로 친자식처럼 아끼게 되었다.
하지만 남작의 가슴 한 켠에선 서서히 죄책감과 불안이 자라나고 있었다.
“몰덴의 부흥은…… 내 피땀으로 일군 성과가 아니었으니까……. 악마와 손을 잡는, 지극히 불명예스러운…… 방법을 통한 거였으니까…….”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남작은 명예로운 행동에 유독 집착하게 되었다. 가솔들이 굶주리는 한이 있어도 손님들은 무조건 접대해야 한다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그 정도 집착으로 자라나는 불안을 덮을 순 엎었다. 남작은 매일 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노심초사했다. 혹여 악마의 변덕으로 이 모든 것들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남작의 불안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진작에 씌인 건지, 나중에 씌인 건지…… 나도 정확한 때는 모르겠소……. 확실한 건 내 앞에…… 아들렌 자작과 병사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이미 모두 악마에 씌어 있었소이다…….”
악마는 곧바로 몰락시키는 것보다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게 더 고통스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교묘한 수단으로 적절한 상황과 여건을 마련하고 병사들을 일으켜 몰덴을 완전히 포위했다.
“백방으로 전투를 끝낼…… 해결책을 찾아봤지……. 하지만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가진 모든 건…… 악마의 힘을 빌어 이룩한 거였으니…….”
중병에 걸린 아이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우두커니 지켜보길 넉 달.
결국 남작은 목숨을 바쳐 악마와의 연을 끊고 몰덴을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카딤은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마의 사념이 온전했다면 그대의 의지만으론 죽을 수 없었을 거다. 오히려 그대는 살아남고 몰덴이 몰락했겠지. 악마가 바라는 건 그대의 깊고 깊은 고통과 절망이었으니.”
“……알고 있소. 잘 알고 있지……. 결국 악마를 멸하고…… 몰덴을 구하는 것 또한…… 내 힘이 아니라…… 남의 힘을 빌리고…… 말았다는 것도……. 하, 하하…….”
희미하게 꺼져 가는 자조적인 웃음.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남작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처연한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그래도…… 이 정도면…… 마침표 정도는…… 내 힘으로 찍은 셈…… 아니오?”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카딤은 남작이 똑똑히 볼 수 있게 분명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눈길에서 처연함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차올랐다. 입가에 떠오르는 만연한 미소. 남작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입술을 움직였다.
“델피나에게…… 이 말을 전해주시오……. ……못 해서…… 미안하다고…….”
“…….”
그 말을 끝으로 몰덴 남작의 숨이 끊어졌다.
두 눈을 감지 못 하고 몰덴을 향해 고개가 떨어졌다. 쓸쓸한 새벽바람이 시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카딤은 엄숙하게 침묵을 지켰다. 던컨은 깊이 한숨을 몰아쉬고는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후우, 참으로 딱한 사람이었구만요……. 그런데…… 혹시 델피나가 누굴 말하는 건지 아십니까, 나으리?”
“아마 부인이겠지. 슬하에 자식은 없는 듯했으니.”
눈꺼풀을 쓸어 남작의 눈을 감겨 주는 카딤. 목과 오금을 받치고 시신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행상인을 흘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밤새 지시를 따르느라 수고했다, 행상인.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던진 도끼를 찾아서 돌아오거라.”
“예? 아,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 도끼를 가져온 다음에는 어떡하실 겁니까, 나으리?”
“몰덴으로 돌아가야지.”
“…….”
“이자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보물의 품에 묻힐 자격이 있다.”
다가오는 여명을 등지고, 저물어버린 삶을 들쳐 안고.
카딤은 몰덴을 향해 걸어 나갔다.
*
몰덴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검은 깃발을 지붕에 내걸었다.
가진 거라곤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과 단벌옷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뿐인 옷을 잿물에 푹 담궈 지붕에 걸고는 한동안 벌거숭이로 지내는 쪽을 택했다.
남작의 무덤은 모든 영지민들이 찾아와 볼 수 있도록 내성 앞에 만들어졌다.
청년들은 자진해서 묘비를 깎고 묫자리를 팠다. 아이와 처녀들은 들꽃을 한아름 모아와 흩뿌렸다. 노인들은 다락에 꽁꽁 숨겨 두었던 금화를 꺼내 무덤에 바쳤다. 모두가 지독히 굶주렸음에도 불구,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에는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몰덴의 백성들은 응당 그렇게 해서라도 조의를 표하고 싶어 했다.
남작은 홀로 적군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밀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영지민들은 그저 비탄에 잠겨 애통해하는 걸로 그쳤다.
다만 성 앞의 현장을 수습해야 하는 병사들은 달랐다. 사백 구가 넘는 시체를 치우는 동안 그들은 갖가지 의혹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야만인과 남작, 단둘이서 사백 명을 무찌를 수 있었던 건지, 그전에 어떻게 이리 비쩍 마른 채로 적군들이 살아 움직였던 건지, 아들렌 자작은 왜 저런 괴물이 되어버린 건지, 우리는 그동안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었던 건지…….
의혹에 대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카딤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함구하는 야만인을 윽박지를 수 있을 만큼 담력이 큰 병사는 없었다.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남작 부인이 몰덴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 그에 대해선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았다. 남작이 치세할 적에도 남작 부인은 현명한 조력자이자 검소한 안주인으로 명망이 높았으니.
그리고 남작 부인이 영주로서 수행하게 된 첫 임무는 떠나가는 손님을 배웅하는 것이었다.
몰덴의 중앙 성문, 야만인과 행상인을 향해 남작 부인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용병님. 별다른 인연이 없음에도 몰덴을 도와 적군에 맞서주신 것, 망부(亡夫)를 대신하여 깊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남작에게 대가는 받았거든.”
카딤의 허리춤에 매달린 투척도끼를 들어 올렸다. 병장기에 문외한인 남작 부인도 그것이 굉장한 보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감은 없었다. 훌륭한 무기는 훌륭한 전사의 곁에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하는 법. 저 도끼를 성에 두어봤자 한낱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외려 남작 부인은 몰덴을 구한 은인이라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론 모자라지요. 금화와 식량을 조금 챙겨놓았습니다. 해주신 일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부디 이것이 용병님의 여정에 도움이 되길…….”
그러나 카딤은 사양했다.
“푼돈과 음식 부스러기는 필요 없다. 그보다 해 줄 만한 조언이 하나 있는데.”
“예? 어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계곡이 하나 나온다. 어느 도적단의 본거지였는데 잘 찾아보면 남은 식료품과 물자가 꽤 있을 거다. 들고 다닐 만한 양이 아닌지라 챙길 만큼만 챙기고 그대로 두고 왔거든.”
“…….”
“그걸 가져다가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라. 도적들은 내가 모조리 처죽였으니 염려 말고.”
입술을 달싹이며 멍하니 시선을 던지는 남작 부인.
카딤의 입장에선 어차피 사용하지도 못할 물자들로 선심을 쓰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남작 부인의 입장에선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기 그지없는 소식이었다.
이미 입은 은혜를 제대로 갚지도 못했건만 그만큼 큰 은혜를 또 입고 말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이고 보은을 기약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용병님의 은인은 이제부터 몰덴의 은인이고, 용병님의 원수는 이제부터 몰덴의 원수입니다. 부디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몰덴에 들려주십시오. 다음번에 찾아오셨을 땐 극진한 예우로 맞이하겠습니다.”
카딤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직 마탑까지 갈 길도 멀었는데 다시 오겠다 말하는 건 공연한 약속이었다. 먼 미래에 어떻게 또 발길이 꼬이면 모를까.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전해줄 말이 남아 있었다. 카딤은 남작 부인을 향해 물었다.
“아, 그리고 당신 이름이 델피나 맞나?”
“예, 맞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남작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전해달라 하더군. 튤립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
시간의 흐름이 멎은 것처럼.
남작 부인은 가만히 멈춰 섰다.
눈동자 위로 서서히 이는 물결. 단숨에 기억의 바다를 헤집는 파도. 행여 아내가 실망이라도 할까 애써 너스레를 떨던 마지막 모습.
영주의 입장이니 함부로 눈시울을 붉힐 순 없었다. 남작 부인은 눈을 질끈 감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끝내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흐르는 걸 막지 못했다.
카딤은 발길을 뗐다. 이로써 이곳에서 볼 일은 다 마쳤다. 남은 자들의 슬픔은 이제부턴 남은 자들이 헤아리도록, 방랑자들은 무대 위에서 물러설 때가 되었다.
그런데 성문을 지나 한참을 나아갔을 무렵.
“어, 나으리……? 저, 저길 보십쇼.”
저 멀리 숨 가쁘게 내달려오는 남작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카딤은 발길을 멈춰 세웠다. 남작 부인은 가까스로 그들을 따라잡았다. 숨도 고르지 않고 다급하게 용건을 꺼냈다.
“요, 용병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그날 밤, 그날 밤에 차마 범인(凡人)의 상식으론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이 있었던 건 알겠습니다. 용병님께서도 뜻이 있어 진실을 어둠 속에 묻어둔 것 또한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이와 반평생을 함께했던 동반자로서 이것만은 알아야겠습니다.”
“…….”
“……제 지아비를 찌른 칼은, 분명 자신의 칼이었지요?”
침묵의 긍정.
입이 바짝 말랐다. 남작 부인은 가시처럼 목에 걸려 차마 나오지 않는 질문을 가까스로 토하듯이 꺼내 놓았다.
“……부디 말해 주십시오, 용병님. 그이는 악마에 홀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겁니까? 누구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바랐던 사람인데…… 그토록 비참하고 허무하게 숨을 거둔 겁니까?”
질문이라기보단 차라리 호소에 가까운 말. 지독하게 진실을 원하지만 한편으론 진실을 원하지 않는 모순된 절박함이 묻어났다.
카딤은 누군가를 위안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남작 부인에게 진실을 전해주었다.
“아니.”
“…….”
“그는 강철 같은 의지로 악마를 처단하고 세상 그 누구보다 명예롭게 죽었다.”
그러곤 등을 돌려 다시 걸음을 뗐다.
“…….”
정오의 햇살이 초원 위에 사분히 내려앉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인지라 야만인과 행상인은 눈부신 그 볕을 온전히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점처럼 희미하게 멀어질 때까지 남작 부인은 발길을 떼지 않았다. 목이 부서져라 고개를 조아리며 읊조렸다.
감사하다고, 너무나 감사하다고.
그이의 이름을 악마 남작이 아닌, 몰덴 남작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 줘서.
오